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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295)화 (296/582)

제295화. 일상의 균형 (14)

“…뭐야, 쟤 아침부터 왜 저래?”

괴이한 것을 보는 눈빛에 진이 자기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좋은 아침.”

“어, 어….”

“미안한데, 나 좀 혼자 있어도 될까?”

“그러든가…?”

“고마워.”

툭. 도현이 다시금 고개를 떨궜다. 이른 아침부터 테라스에 나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도현에, 니콜라스가 못 본 척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문을 닫아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미쳤지. 도현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아침이 밝고,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깬 도현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다가 떠오른 기억에 사색이 되었다.

- 대화할 가치도 없지, 맞아. 네가….

- 그럼 네가 친구 하기 싫다고 해도 친구 해도 돼?

자신이 부렸던 추태가 낱낱이 떠올랐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괴롭건만 놀랍게도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 니콜라스가 걱정돼서…. 제가 잘못한 거예요?

엄한 얼굴로 혼을 내는 서혜나에 시무룩하게 기가 죽은 얼굴로 물었다. 잘못한 거냐니…. 당연하지! 뭐 그딴 걸 묻고 있었던 거지? 그것도 그런… 그런 얼굴로?

- 죄송해요. 혼내지 말아주세요.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요.

“제발… 그만.”

도현은 이제 고개를 들고 다닐 자신이 없었다. 새록새록 솟아나는 새로운 기억은 다채로운 충격을 안겨다 줬다.

더 가관인 건, 대체 뭐에 씐 건지 그동안 지키던 비밀까지 나불댔다는 거였다.

- 따라다니는 걸 어떻게 알았냐고요? 그야, 느껴지니까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기운이 있거든요. 그래서 알았어요. 아, 니키도 그렇게 찾았는데….

어디 가서 사이비 취급받기 딱 좋은 소리였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사람들이 도현의 말을 그냥 ‘기감이 좋다’ 정도로 받아들였단 거였다.

…이게 다행인 게 맞는 걸까. 아니, 나 대체 왜 그런 거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 때는 저런 말을 하는 줄 인식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냥 따뜻한 물에 잠겨 둥둥 떠다니는 나른한 감각만 선명해서….

벌떡.

도현이 예고 없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거실에서 흘끔흘끔 도현을 보던 서혜나와 이장혁이 움찔 놀랐다.

“도현아, 어디 가니?”

어디론가 다급히 향하는 모습에 서혜나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방이요. 할 게 생각나서요.”

“자, 잠깐만. 잠깐.”

“네?”

“혹시 어제 혼난 일 때문에 속상한 거면… 엄마 아빠도 걱정해서 그런 거니까, 음, 니키 일도 네 탓이 아니고….”

“네?”

갑자기 우물쭈물 말하는 이장혁에 도현이 의아해하다가, 이내 어제 자신이 보여준 모습을 상기하고 귓불이 달아올랐다.

지금 이거, 나 또 도롱이 벌레처럼 침대에 박혀 있을까 봐 하는 말이지.

“그런 거 아니에요.”

이걸론 부족하단 생각에 열심히 머리를 굴린 도현이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 오스카한테 연락하려고요. 오스카도 알아야 할 거 같아서요. SNS 운영에 관해서도 좀 묻고 싶은 것도 있고요.”

말하고 나니 그럴듯했다. 말한 김에 볼일이 끝나고 오스카한테 연락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아, 그런 거니?”

납득할 만한 내용이었는지 이장혁의 안색이 밝아졌다. 도현은 잠깐 문을 좀 닫고 있겠다고 말한 후 방으로 쏙 들어갔다.

철컥. 문이 잠긴 걸 확인한 도현이 다급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덩어리 님!”

【어제 잘 봤어!】

“…….”

낄낄, 경박하게 웃어대는 빛 덩이에 도현이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심각해?】

“안 그러겠어요?”

【그렇게 부끄러워할 거 없어. 어제 그건 네 본성이 드러난 거뿐이거든.】

“본, 성이요?”

【본성이지. 네가 불완전한 영혼으로 자라지 않고 정희성의 경험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런 성격이었을 테니까.】

뭐?

“그렇게… 애 같은 성격이요?”

【애 맞잖아? 작은 인간아.】

팅. 무언가 뇌를 들이받은 기분이었다.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덩어리 님이 틀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도현은 잠시 아찔한 충격에 빠져 허우적댔다.

【이참에 널 좀 풀어주는 게 어떠냐? 내가 보기엔 넌 너무 통제가 심해. 그것도 너한테만. 이런 걸 인간들이 컨트롤 프릭이라고 하던데.】

“그런 단어는 언제….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에요.”

물론 메리가 도현에게 강박적 성격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해준 적은 있었다. 그녀에게 들은 강박적 성격 장애의 특징이 잘 들어맞기는 했다. 그래도… 나 정도면 정상 범주 아닌가. 도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너를 감시하다 보니 이것저것 보고 듣는 게 많아져서 말이다. 흠… 그나저나. 그건 어떤 느낌이었어?】

덩어리가 말하는 걸 바로 알아들은 도현의 눈이 조금 몽롱해졌다. 감각을 되새기듯 느릿하게 내려간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졌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건, 꼭.”

말을 고르던 도현이 눈매를 좁혔다. 입술을 달싹이며 몇 번 망설이다가 솔직히 말했다.

“꼭 제가… 신이라도 된 거 같았어요.”

인간의 것, 아니, 살아 있는 생명체의 감각을 벗어난 감각.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듣고, 모든 흐름을 이해한 거 같은 기묘하던 순간.

【역시 그런가.】

그 이후에 이어지던 몽롱함도 그 연장선에 가까웠다. 마치 반절 정도 순간적으로 엿보았던 세계에 발을 걸친 기분이었다. 그때의 도현은 현실에 존재하면서 현실에서 유리되어있었다. 모순적이었다.

【작은 인간아. 너도 얼추 눈치챈 거 같지만, 어제 넌 의식의 반절이 세계의 큰 흐름 위에 얹어져 있었어. 그게 네 무의식이 표면 위로 올라온 이유고. 집주인이 집을 비우니 그 자리를 채운 거지.】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짐작한 바였다.

“그럼 그 능력을 사용하면 늘 그런 부작용을 겪는 건가요?”

【아니.】

화색하던 도현은 이어진 말에 입을 작게 벌렸다.

【더 안 좋아질 테지.】

“더요…?”

거기서 더?

이미 사람들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막막한데 거기서 더? 진심이냐고 묻는 얼굴에 덩어리가 단호히 말했다.

【한 번은 괜찮다. 어쩌면 몇 번 정도는 문제없겠지. 그러나 반복될수록 너는 현실과 멀어질 거야. 모든 섭리는 무의미하고 유의미한 법. 작은 인간아, 다른 생명체가 세계의 흐름을 모르고 살아가는 건 그 또한 섭리라서란다.】

작은 인간은 놀랍도록 고지식한 영혼이었다. 그 무결함은, 고지식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괜히 덩어리가 컨트롤 프릭이라고 한 게 아니었다.

작은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깨우쳤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물론 자기 나름대로 힘을 이리저리 쓰는 거 같긴 했지만, 덩어리 입장에서는 세계를 어지럽힐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구슬치기를 하는 격이었다.

‘그런데 이 정도까지 세계를 엿볼 수 있을 줄이야.’

그동안은 고작 영혼이 흘리는 색이나 존재감을 느끼는 정도였는데.

그래서 그동안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

덩어리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도현이 힘에 욕심내지 않은 건, 영혼 고유의 무결함 덕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자체가 섭리일지도 몰랐다. 뭉쳐 있는 것이 으레 가지는 생존 본능. 그것이 덩어리가 채 눈치채기도 전에 이미 느끼고 있던 거다.

존재하는 것이 인지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랜 시간 존재해온 조율자는 처음으로,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만약 계속 세계를 받아들인다면 그 끝엔 어떻게 될 것인가?

참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운 가설이었다. 결국 존재가 흩어져 흐름의 일부가 될지, 또 하나의 흐름으로 재탄생할지.

혹은, 조율자와 엇비슷한 무언가가 될지.

조율자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한낱 필멸자는 고뇌에 찬 얼굴로 무언갈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생명체는 그 존재를 이루는 껍데기에 홀리겠지만, 조율자의 눈에는 그 속에 존재하는 영혼이 비쳐 보였다. 껍데기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아름다운 본질이.

모든 것이 그렇듯 이번 일도 마찬가지. 생존 본능이 보낸 경고를 무시하고 가능성을 깨우친 것조차 섭리일 뿐.

조율자인 덩어리에게는 그런 도현을 말릴 의무도, 권한도 없었다. 그가 이대로 방치하여 궁금증을 해소한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하는 건.

【특별함이 언제나 달가운 결과를 만들지는 않는단다. 네가 가장 잘 알겠지.】

도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네 현실이 중요하다면 세계가 아닌 주변을 보거라.】

순수한 호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무어라 항변하려던 도현은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검은 눈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네 보호자가 오는구나. 이것 하나는 기억하거라. 언제나 선택은 네 몫이란 걸.】

덩어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며 찾으려 시도하지 않았다. 이젠 알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지켜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똑똑-

“도현아, 전화는 다 했니?”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도현이 방문을 열었다.

“아직 못 했어요. 잠깐 할 게 있어서요. 혹시 지금 나가야 하나요?”

“오늘은 숙소에서 쉬기로 해서 괜찮아. 아침 식기 전에만 나와.”

“그럴게요.”

도현은 웃는 낯으로 방문을 닫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특별함이 언제나 달가운 결과를 만들지는 않는다’라….

그래, 모를 리가 있나. 그 특별함 탓에 어떻게 살았는데. 어떻게 살아남았는데.

“…솔직히 이건 반칙 아니에요?”

혼잣말이었지만, 명백한 대상이 있는 말이었다. 도현은 지친 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내가 어떻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겠어. 다시 생각해봐도, 너무한 일이었다.

* * *

위기가 한번 찾아온 것치고 여행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최대 피해자라고 볼 수 있는 니콜라스 가족이 회의를 좀 하는 거 같더니 일정대로 여행을 지속하자고 한 덕분이었다.

남자에게서 정말 그 이상의 의도는 없었다는 걸 알게 되어 조금 분위기가 풀린 것도 있었다.

그 이후의 변화라고 하면- 역시 니콜라스였다.

니콜라스는 놀랍게도 더 활기차졌다. 도현은 처음엔 그가 일부러 괜찮은 척하나 의심했지만, 관찰 결과 ‘진짜 괜찮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오히려 니콜라스는 지고 있던 짐을 벗어던진 듯 후련해 보였다. 그의 여유는 의외의 부분에서 나타났는데, 바로 찰스와의 관계였다. 찰스를 밀어내기만 하던 니콜라스는 이제 아무렇지 않게 장난을 주고받기까지 했다.

진이 두 사람을 보고 드디어 찰스의 갸륵한 정성에 니키가 탄복했다며 중얼거려, 도현은 마시던 음료를 뿜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또 하나는, 도현과의 관계였다.

그날의 일은 니콜라스에게 퍽 인상 깊게 박힌 거 같았다. 그 도현이 저를 찾으려 엄마조차 내치고 달려왔다는 것과-

“으으응? 한 번만 해주면 안 돼?”

“안 돼.”

“왜에, 한 번만!”

“나도 보고 싶어!”

“넌 못 봤지? 도리토스가 그 사람보고 살벌하게, ‘그 손 떼고….’”

“그만!”

그래, 그때 좀 흥분해서 말이 거칠게 나가긴 했다. 그러나 자꾸만 그 일을 들춰내니 부끄러워 죽을 거 같았다. 놀리듯이 말하고 있으면서 에메랄드빛의 눈동자가 동경과 애정으로 반짝여서 더욱.

그뿐이면 다행이지.

그날 저녁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절대 본성이 드러났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도현은 두고두고 화자 되는 이야깃거리였다.

도현의 흑역사만 쌓인 여행이 끝나고 방학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다시 새로운 학년을 맞이할 때까지 말이다.

-그랬다.

어느새 시간은 성큼 흘러 5학년의 시작.

도현은 이제, 델마 아카데미의 졸업 학년이 되었다.

그리고.

[‘뉴질랜드에서 한 컷’ 패스파인더 배우들의 평화로운 한때!]

새 학년 새 학기를 즐길 틈도 없이, 예정되었던 촬영을 위해 뉴질랜드로 출국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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