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297)화 (298/582)

제297화. 일상의 균형 (16)

응, 그래.

알고는 있었다.

다른 배우들이 온다는 소리는….

“오랜만이야.”

“응, 잘 지냈어?”

마주 보는 얼굴에 가식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 호호 정답게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두 아이에 데이먼이 흐뭇한 표정을 했다.

얘도 온다는 뜻이었지. 루카 하퍼를 보던 도현은 문득 떠오른 감상을 내뱉었다.

“머리카락 잘 어울리네.”

루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의외란 표정이었다. 그리 깊이 생각하고 내뱉은 말은 아니라 도현은 입을 다물며 침묵했다.

“내가 뭘 해도 괜찮긴 해.”

놀란 것도 잠깐. 코웃음을 치며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턱을 세운다. 그 모습에 도현은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말을 추가했다.

“그래. 자유분방한 게 너랑 꼭 어울려.”

“…뭐?”

“데이먼, 시험의 날 촬영 마치면 숙소 옮긴다고 했죠?”

“야, 잠깐. 너 그거 칭찬 아니지.”

“칭찬 맞는데?”

“하?”

뭐 문제 있냐는 듯 응수하자 어이없는 기색이 되돌아온다. 그에 느긋하게 웃어 보이자 약이 오른 듯 미간이 좁아지는 게 보였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색은 검붉다. 밝은 햇살 아래에 서면 채도 높은 빨강이고, 어두운 곳에선 언뜻 검은색처럼 보였다.

그 아래 있는 흰 피부과 쨍한 푸른 눈과 어울리지 않는 듯 조화로웠다. 강렬한 인상이었다. 루비나 사파이어같이. 혹은 금방이라도 타올라 잿더미가 될 것같이.

‘머리카락 멀쩡하나?’

도현이 본 것만 해도 보라색, 갈색, 빨간색이었다. 머릿결이 남아나질 않을 거 같았다. 알아서 하겠지만.

가발을 써도 될 텐데 꼭 제 머리를 염색하는 걸 보면, 일종의 배우로서의 신념일까. 도현은 제 매끄러운 머리카락 끝을 매만졌다.

이 머릿결은 유지될 예정이었다. 도현이 맡은 역할, 르옌 누바라의 머리카락은 백색. 정확히는 은백색. 탈색으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거니와-촬영 내내 그 색을 유지하다간 누바라족이 은백색 머리카락이 아닌 스킨헤드가 될지도 몰랐다-한 가지 더 불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르옌은 장발이니까.’

정확히는, 쇄골까지 내려오는 기장이었다. 나중에는 허리까지 기르는 거 같은데 첫 등장에서는 어깨를 스치는 길이로 표현되어 있었다.

“너도 친구를 만나면 그 또래 애 같구나.”

두 사람의 대화를 오랜만에 만난 친근감의 표현, 정도로 받아들인 데이먼이 웃었다. 도현은 그 오해를 풀어주지 않았다.

“공지한 대로 아오라키 마운트쿡 빌리지로 옮길 거야. 촬영이 예정대로 끝나면 모레엔 이동하겠지.”

글레노키와 파라다이스를 떠난다니 아쉬웠다. 그러나 그 아쉬움보다는, 몇 주나 기다렸던 촬영이 다가온 기쁨이 더 컸다.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몇몇 배우들과 스태프들만 있어서 나름 한산했는데, 지금은 사람이 가득 모여 북적거렸다.

그러던 중, 레비 올란도-그러니까, 도현이 가장 기대했던 배우이자 누바라족의 수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눈매를 접으며 눈인사를 보냈다. 얼음 같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진이 보면 좋아했겠네.’

레비는 검은색이 잘 어울리는, 어딘가 싸한 인상의 젊은 미남자였다. 정작 맡은 배역은 흰머리지만. 어쨌든.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면 어딘가에 존재하는 유서 깊은 마피아 조직의 보스 정도 될 거 같은 분위기를 지녔다.

그리고 실제로 갱단 출신이었다.

그의 과거사는 좀 유명한 편이었다. 그가 19살에 찍은 영화 에서 레비는 코카인에 중독된 비행 청소년 역할을 맡았는데… 음, 현실이 잘 반영된 편이었다.

실제로 레비는 15살부터 코카인 중독이었으니까.

재밌는 사실은, 그가 코카인 중독자를 연기하면서 되레 코카인을 끊었다는 것이다. 후에 인터뷰를 보면 그것이 감독과의 약속이었다는 거 같았다.

청소년 시기에 경찰서를 들락날락거리던 레비는 그 영화를 계기로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다. 성실한 배우로 다시 태어났다고 봐도 좋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퇴폐미’ 하면 떠오르는 할리우드 유명 배우 중 한 명이었다. 그의 가장 의외인 점은 거친 과거와 사람 여럿 홀릴 거 같은 외양에도 불구하고 19살 이후로 아무런 스캔들이 없다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도현은 레비가 많이 궁금했다. 온실 속 화초나 다름없었던 자신과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자라나, 결국 같은 길을 걷게 된 사람이니까.

계속 쳐다보면 무례일 거 같아 적당히 시선을 떼고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그 외에도 누바라족 배우들은 전부 미남미녀들이었다. 가장 미인이 많은 일족 중 하나가 누바라족이라더니, 원작 고증이 철저했다. 참고로 이건 마리아 공식 오피셜이었다.

도현은 그들 한 명 한 명 모두 머릿속에 새겨두었다. 기척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낯설다고 또 반응하면 안 되니까.

그래도 다행인 점은… 이곳에 머무른 몇 주간 도현이 많이 발전했다는 것이었다. 이젠 무작정 기척부터 읽으려 들진 않았다.

그러다가 익숙한 것이 가까워지는 게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조금 힘들어 보이는 낯의 헤레이즈였다.

“너 나한테 좀 붙어 있어.”

그러면서 손목을 쥔다. 평소에는 터치하는 걸 꺼렸으면서 이러는 걸 보니 어지간히 힘든 모양이었다.

도현은 이제 그 심정을 거의 완벽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도현도 사람이 늘어난 후 신경이 예민해졌으니.

‘헤레이즈는 맨날 이렇게 살았던 건가?’

잠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도현이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걱정스레 물었다.

“마스크는 안 써?”

“무례해 보이잖아. …아, 루카? 루카 맞지? 언제 도착했어?”

뒤늦게 존재감 강한 붉은 머리를 발견한 헤레이즈가 어색하게 인사하며 은근슬쩍 손을 뺐다. 도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헤레이즈의 옷깃을 반대로 잡아챘다.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이건 이거였다.

청회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야, 놔라. 싫어, 네가 붙어 있으라며. 대충 그런 대화가 오갔다.

“방금 왔어. 다시 보니까 좋네.”

“그, 그러게. 나도.”

누가 봐도 어설픈 대답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 제 발로 걸어온 걸 후회하는 눈치였지만.

“둘이 대화 나누고 있을래? 난 신시아 좀 찾아보고 올게.”

기회를 놓칠 도현이 아니었다.

도현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헤레이즈에게 루카를 떠넘기고 자리를 뜨는 데 성공했다. 말이 떠넘겼다지, 헤레이즈는 루카와 사이가 좋았다. 그냥 이렇게 저를 이용해먹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저러는 거지.

역시나. 화기애애한 대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자리를 피하는 게 옳은 선택이었다 느끼며 도현은 사람이 몰리지 않은, 외진 숲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거야?”

묘한 미성에 발걸음을 멈춘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성큼 다가온 레비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얼굴에 음영이 지자 뚜렷한 티존이 도드라져 보였다.

“친구 찾으러요.”

“친구?”

“신시아요. 브닌나 역할을 맡은….”

“아아, 그 애.”

레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는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은근히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생긴 건 전혀 다르지만, 어딘가 분위기가 비슷했다. 둘 다 미묘하게 염세적인 느낌이 있어서 그런가.

오스카가 홀로 고민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서로를 관찰했다. 도현은 흥미로운 동료이자 선배 배우를, 레비는 곱게 자란 거 같은데 왠지 동류처럼 보이는 어린아이를.

어두운 눈동자를 깜빡인 레비가 고개를 기울였다.

“얘야(kid), 너 혹시 코카인 해?”

“…네?”

잘못 들은 건가. 뇌가 말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도현이 멍하니 있자 먼저 정신을 차린 오스카가 기겁했다.

“우리 애는 간접흡연도 안 해요!”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열성적으로 말을 토해냈다.

“보세요! 청정해에서 난 일급수 물과 깊은 숲속에서 맑은 공기만 마시고 자랐을 거같이 생겼잖아요!”

“…그건 좀.”

떨떠름하게 반응한 건 도현이었다. 오스카는 제 발언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는지 당당하게 어깨를 폈다. …왜 수치심은 나의 몫이지?

“해? 안 해?”

“안 해요.”

“잘했네.”

머리를 토닥이는 손길에 도현은 넋이 빠져나갈 거 같았다. 왜 이런 걸로 칭찬을 받는 거지.

“앞으로도 하지 마.”

그의 정신세계가 조금 남다르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긴 했다. 그걸 이런 식으로 체험할 줄이야.

“…그럼 너 혹시,”

“뭐든 안 해요.”

“그렇구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 미팅에서 잠깐 봤을 땐 되게 멀쩡한 사람이었는데.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했다.

“흠….”

레비가 그를 보고 생각에 잠겼다. 또 이상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지만, 얼굴이 뭐라고 그조차도 분위기 있어 보였다.

도현은 그의 입에서 또다시 헛소리가 나오기 전에 친구를 찾으러 가야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떴다. …잘못 짚었나. 뒤에서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신시아.”

“응? 왔어? 여기 봐. 이건 라임모스래.”

커다란 나무 뒤편을 돌자 땅에 쪼그려 앉은 신시아와 그런 신시아에 익숙한지 한쪽에서 쉬고 있는 그녀의 매니저가 보였다.

“라임 맛이 날까 궁금해서 보고 있었어.”

“안 날 거야.”

“그렇더라. 이끼 맛이었어.”

심지어 벌써 먹어봤구나. 그녀의 매니저가 체념한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끼니까 이끼 맛이겠지. 이제 가자. 다들 저기 있어.”

“으응, 그래.”

신시아가 무릎을 탈탈 털며 일어났다. 매니저는 드디어 이곳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감격해하고 있었다. 오스카의 동정 어린 눈길이 그녀에게 향했다.

도현은 신시아와 나란히 걸었다.

곧 저녁 시간이었다. 천천히 걷던 신시아가 저물어가는 해를 보다가, 나른하게 말했다.

“내일부터는 이끼를 찾아다닐 시간이 없겠지?”

“아무래도.”

“그래도 좋아.”

신시아의 두서없는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내일부터는, 뉴질랜드 관광객이 아닌 패스파인더 배우였다. 본업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 * *

“와, 레비. 너무 멋져요.”

“내가 봐도 그래.”

“역시 보는 눈이 있네요.”

“너도 마찬가지야.”

어느새 레비와 친해진 루카가 쿵짝쿵짝 잘도 말을 주고받았다. 날개 뼈 아래까지 내려오는 은백색의 머리카락을 반묶음 한 채, 고풍스러운 백색의 의복을 입은 레비는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두운 인상에 흰색의 신비로운 착장이 묘한 대비를 불러일으켰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보다는 정말 판타지 세계의 존재 같았다.

몇 번 더 감탄하던 루카는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몰리는 것에 자연스럽게 그 방향을 따라갔다.

그리고 인상을 구겼다.

못 볼 걸 봤다는 듯 다시 레비를 보며 감탄하는 루카를 실시간으로 모두 지켜본 헤레이즈가 고개를 저었다.

레비는 아무래도 좋은지 저를 보고 종알종알 떠드는 루카의 말을 경청해주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뗀 헤레이즈가 토드 감독과 무어라 말을 나누고 있는 도현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헤레이즈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어깨 부근까지 내려오는 기장이 이상할 법도 한데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본디 흰 피부는 밝은 머리 색과 어우러져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별로 코스프레 같지 않네.’

어색하거나 이상하면 비웃으려고 했는데 그건 어려울 거 같았다. 대신 헤레이즈는 감독과 떨어진 도현의 뒤에 접근해 낮게 속삭였다.

“쟤 너 보자마자 똥 밟은 얼굴 하더라.”

“…….”

떫어진 얼굴에 헤레이즈는 만족스러워졌다. 좋아, 어제 받은 건 돌려줬다.

“심심해서 그래?”

너 그렇게 할 거 없냐. 그리 묻는 얼굴이었다. 가볍게 무시한 헤레이즈가 대뜸 물었다.

“너 계속 이대로 지낼 거야?”

“왜?”

“나도 별로 신경 쓰고 싶진 않은데, 너랑 걔랑 되게 진한 사이잖아. 그래도 돼?”

“너 말을….”

무어라 말하려던 도현은 문장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도현이 연기를 잘하는 건 알았다. 그러나 루카는 또 모르는 이야기 아닌가. 지난 영화 때도 아슬아슬했는데 사감이 섞여 연기가 흔들리게 되면….

그런 헤레이즈의 생각을 끊은 건 무심한 목소리였다.

“지금 상황이 더 도움 되니까.”

“…너 혹시.”

설마, 설마.

“너, 혹시나 해서 묻는데… 연기 때문에 일부러 화해 안 하는 거 아니지?”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깜빡였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흰 얼굴이 의뭉스러웠다.

“글쎄.”

…이거 변태 아니야?

헤레이즈는 처음으로, 루카가 안쓰러워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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