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8화. 일상의 균형 (17)
스태프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며 호수 앞에 모인 배우들의 동선을 확인했다. 의상에 쏟아부은 돈만 해도 영화 몇 개쯤은 그냥 만들 수 있는 수준. 그만큼 각각의 종족마다 고유의 특징이 살아 있었다.
여기서 CG까지 덧대어지면, 한눈에 종족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토드 감독의 매서운 눈이 세트장을 쭉 훑었다. 신성한 나무는 호수 중앙에 있는 설정이라, 후에 CG 작업을 통해 만들어야 했다. 해서, 호수 앞에는 초록색으로 된 판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번에 그의 시선은 몇 주 사이 친해진 우더족 배우들을 지나,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는 두 누바라에게 닿았다.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어?”
“…어렵네요.”
“그럼 다 해보면 되겠지.”
“좋아요. 그게 낫겠어요.”
무언가 열심히 의논하는 것 같던 둘은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장면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자주 봤던 장면이다. 신시아와 헤레이즈, 그리고 도현이 모여서 틈만 나면 저랬으니. 경치도 좋은 곳에 왔으니 좀 쉬어도 될 텐데 도현은 휴식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열심이죠?”
“그러네요.”
토드는 데이먼의 질문에 수긍했다.
도현은 정말 열정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토드나 데이먼, 혹은 다른 감독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전날 생각했던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리고 대체 어디서 시간이 난 건지, 오전에는 수업을 듣고 숙제를 했을 텐데 점심쯤 되면, 그들의 의견을 모두 참고하여 새로운 정답을 찾아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나면 신시아와 티타임을 가졌다. 그 시간에 도현이 하는 일은 항상 같았다.
책을 읽는 것.
대여섯 번 정도 다른 소설책을 본 적이 있으나, 그 또한 물어보면 ‘참고하기 좋을 거 같아서요.’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고도 남은 시간에는 신시아와 호숫가를 걸었다.
문득 누군가 그 대화를 들었을 때, 대화의 주체는 그들이 아닌 르옌과 브닌나였다. 르옌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하는지. 어떤 추억이 있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들은 작중에 나오지 않은 과거의 것을 대화를 통해 만들고, 다듬어갔다. 서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도 막힘없이 튀어나올 때까지.
그리고 헤레이즈의 촬영이 끝나면 셋이서 대본 리딩을 하거나 연기를 맞춰봤다. 한 번은 셋이 방에 옹기종기 모여 영화를 보길래 드디어 쉬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나누는 대화는 충격적이었다.
- 저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방금 손가락 움직인 거 봤어?
- 나도 이 대사에서 저렇게 연기해보면 어떨까? 한번 봐줄래?
영화 감상이 아니었다.
영화 분석이었다.
신시아도 이끼나 온갖 식물을 찾아다니며 제 취미 생활을 즐기고, 하다못해 헤레이즈도 아무것도 안 하며 만화를 보고 낄낄거리며 쉬건만. 도현의 모든 생활은 연기로 귀결되어 있었다. 무서우리만치.
“대단한 친굽니다. 솔직히 걱정도 했는데….”
토드가 말끝을 흐렸다.
저기 태평한 표정의 어린 배우는 신경도 쓰지 않는 거 같긴 했지만, 촬영 팀에선 도현을 반기지 않는 이들이 꽤 되었다. 대표적으로는 기획팀장부터, 그의 협력 감독까지.
윗선이 못마땅하게 보면 그 아래는 휘둘리기 마련. 그저 정당하게 오디션을 본 죄밖에 없는 아이는 정당하지 않은 적개심을 받았다.
모를 수가 없는 눈빛과 말투였는데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무서워하지도 분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흘려 넘겼다. 본인이 신경 쓸 건 하나밖에 없다는 듯이.
처음에는 코웃음 치던 이들도 하나둘씩 그 아이에게 시선을 주기 시작했다. 잔잔해 보이다가도 연기를 할 때면 언제나 강렬한 빛을 내는 검은 눈동자,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얼굴, 식지 않는 열정.
그건 사람들을 동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도현을 볼 때마다 답답한 듯 한숨만 푹푹 내쉬던 기획팀장은 이제 식사하다가도 도현을 보며 더 먹으라고 한 소리 하고 지나갔다. 처음부터 도현을 극구 반대했던 감독은 여전히 고집을 꺾진 않았지만, 도현을 볼 때마다 은근히 시선이 누그러졌다.
스태프들도 마찬가지. 처음엔 이슈의 주인공을 꺼리던 이들도, 다정한 얼굴로 다가와 도와줄 게 있는지 묻는 소년을 미워하기란 쉽지 않았다.
퉁명스럽게 말해도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에 다시 말을 걸어주는 상냥한 아이를 미워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꽁꽁 언 이들은 여기에 없었다.
동양인 소년.
주제넘게 배역을 꿰찬 배우.
그런 부정적인 시선을 벗어내고 보면 도현은 아름답고, 열정적이며, 선하고 예의 바른 소년이었다. 그 어떤 트집조차 잡을 수 없는.
토드 감독은 소년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떠한 항의와 불화도 없이, 오롯이 본인의 행동만으로 주변을 변화시켰다.
주인공은 분명 헤레이즈인데, 촬영 분위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정작 단 한 장면조차 촬영한 적 없는 도현이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저 애가 쉬지 않고 연기만 생각하는 게 그 일 때문인 줄 알았거든요. 일종의 트라우마로 인한 강박, 그런 거요. 근데 지금 보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닌 거 같네요.”
토드가 걱정한 건 그 부분이 아니었지만, 수정하지 않고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눈이 너무 즐거워하고 있잖습니까. 꼭 물 만난 물고기 같아요.”
레비가 갑작스럽게 도현을 들어 올렸다. 덜렁 들어진 도현이 깜짝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내려주세요!”
“아라한이 이렇게 르옌을 들어서 놀아주지 않았을까?”
“그러겠어요? 잠깐, 지금 장난치는 거죠?”
스태프들이 그들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애정과 친근함을 담은 시선이 소년에게 향해 있었다. 토드의 카메라가 그 모습을 담고 돌아갔다.
* * *
“촬영 곧 시작합니다.”
토드 감독의 말에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정리되었다. 오늘 등장하는 장면이 없어 스태프들 사이에 끼어 구경하고 있던 루카는 그들을 시선에 담았다.
장관이었다.
제각각 독특한 복색을 한 사람들이 일시 정지를 누른 것처럼 멈춰 있었다. 그리고 동영상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레디, 액션!”
슬레이트가 내려가자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 * *
“와….”
“이 녀석아, 정신 팔리지 마!”
동그랗게 뜬 눈이 여기저기 움직이느라 바쁘다. 종족의 대표란 놈이 품위 없이 헤벌레거리자 콧수염이 독특하게 난 사내가 머리통을 갈겼다. 소년이 뒤통수를 매만지며 불평했다.
“…롤랑! 아프잖아!”
“너는 일족의 대표이자 가장 단단한 가지다. 추악한 화려함에 현혹되지 마. 제대로 봐. 지금 네가 봐야 할 게 뭔지.”
“갑자기 왜 진지하게….”
불평하는 목소리와 달리 똑바로 선 소년이 사내의 말대로 광장을 제대로 둘러본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 같은 머리카락이 구불구불 흩날렸다. 그 사이로 빛나는 눈동자가 호수에 단단히 뿌리 내린 신성한 나무를 지나, 그 앞에 모인 이들을 담아낸다.
뭐를 보라는 거야, 롤랑은. 시험의 날이라고 아침 댓바람부터 마을 소녀들이 수호의 문양을 그려준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주변을 살피며 둘러보던 소년은 이윽고 위화감을 느꼈다.
“쯧, 저리 비천한 것들도 후보라니.”
한 남자가 경멸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주변을 둘러싼 이들이 조소를 머금었다. 소년은 그 말에 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저 주먹을 움켜쥐기만 할 뿐인 무리를 보았다. 확연히 비견되리만치 남루하고 초라했다.
같은 후보인데 왜 저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격차와 혐오에 아서의 눈이 떨렸다. 옆을 돌아보자 우더의 가장 지혜로운 가지이자 스승, 실레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서가 침음을 삼키며 다시 광장을 응시했다.
그때.
조소를 짓는 무리에 속한 소년과 문득 눈이 마주쳤다. 훤칠한 키에 짧게 깎은 머리카락이 사나운 눈매를 도드라지게 했다. 소년의 뱀 같은 눈이 스윽, 미끄러져 내려 아서를 훑었다. 이내 그의 눈에 경멸이 어린다.
그래, 경멸.
그 눈빛은 명백한 경멸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아보는 시선에 아서는 태연할 수 없었다. 신비롭고 신기했던 풍경이 순식간에 낯설어졌다. 아서의 안색이 어두워진다.
그것도 잠시.
광장에 고요가 내려앉는다. 그들의 시선이 오직 한 방향으로 향한다. 아서는 그를 경멸했던 소년이 환희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과장되게 무릎을 꿇는 광경을 보았다.
그 소년은 시작일 뿐이었다.
쿵!
모든 이들이 무릎을 꿇자 흙먼지가 날렸다. 소름이 돋는 광경에 멍청하게 서 있는 아서의 어깨를 누군가 힘 있게 내리누른다.
그의 삼촌, 롤랑이었다.
“롤랑, 지금 왜.”
“쉿. 조용히… 고개 숙여.”
롤랑의 눈에 언뜻 깃든 두려움을 발견한 아서가 입을 다물었다. 순순히 롤랑이 이끄는 대로 무릎을 꿇은 아서는, 깊은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호기심에 고개를 들었다.
이내, 생기를 띤 입술이 벌어졌다.
아름다운 백색의 옷을 차려입은 무리였다. 그 위로 달빛을 담아낸 듯한 은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하나같이 젊고 아름다웠으며, 강인해 보였다.
무리의 맨 앞.
성스러운 빛을 퍼트리는 지팡이를 쥔 청년의 모습에, 아서는 뒤늦게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상상외로 너무 젊은 외양에 알아보는 게 늦은 것이다.
“아라한 누바라.”
아서가 탄식처럼 내뱉었다. 모를 수 없는 이름. 모든 종족의 수장이자 신성한 나무의 인도자.
전대의 길잡이였다.
그에게 신경이 팔려 아서는 가운데서 걸어 나오는 이를 한 박자 느리게 발견했다.
새하얀 이들 사이에서 홀로 흑색으로 점칠된 소년은 유독 눈에 띄었다. 몸을 감싸는 의복, 어깨에 두른 갑주와 팔목의 아대, 등 뒤로 맨 활과 활통까지 모두 검었다. 무리와 같은 색채를 띠는 건 뒤로 넘겨 묶은 머리카락뿐이었다.
아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보이는 이들에게서, 그리고 소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애는, 이번 대 길잡이 후보다.
이곳의 공기가 그 한 소년에게 집중되었건만, 고아한 얼굴엔 한 조각의 감흥조차 없다. 그저 이 모든 게 무의미하다는 듯 고요했다.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던 소년이 그를 보고 황홀하다는 듯 입꼬리를 찢었다.
“일어나라.”
아라한 누바라, 그의 가벼운 명령에 무릎을 꿇었던 이들이 몸을 일으켰다. 다른 이들을 따라 굽혔던 아서도 홀린 듯 일어서다가 무언갈 발견하고 멈췄다.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정신이 번뜩 들었다.
“저들은 대체….”
잘그락. 조용한 가운데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만이 울렸다. 날카로운 것으로부터 보호할 천조차 없는 이들의 발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여자, 남자, 늙은 자, 어린 자 할 것 없이 흰색의 단출한 천 옷만을 걸친 이들은, 전부 목에 쇠사슬을 걸고 있었다.
비이상적인 광경에 아서의 눈이 찌푸려진다. 그런 아서의 귀에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들은 노예다.”
“노예?”
“모든 종족의 수장? 하! 잘 들어라, 아서. 아라한 저자는 그런 지배자가 같은 게 아니야. 그저 파괴밖에 모르는 정복자지.”
“롤랑, 그건.”
“실레 할멈. 난 말할 건 해야겠소. 언제까지 아서를 아무것도 모르는 천치로 둘 생각이오? 아서, 시험이 시작되면 네가 제일 경계해야 할 존재는 누바라와 그의 개들이다.”
실레가 안타까이 말했다.
“과거부터 이어진 증오를 그에게 물려주면 안 된다. 아서는 인도자거늘.”
“알고 싶어요.”
“아서, 아이야….”
“걱정 마세요. 스승님이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 주셨잖아요.”
실레의 주름진 손을 잡으며 말하는 두 눈이 맑았다. 이 아이의 눈은 마치 냇물 같구나. 실레는 그 냇물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길을 찾는 자…. 그렇구나. 그랬어.”
실레가 무언가 느낀 듯 입을 다물자 아서는 그녀의 손을 쥔 채 롤랑을 응시했다.
“롤랑, 이제 말해줘.”
그의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아서의 표정이 침중하게 가라앉았다. 수장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오랜 친구들을 전부 죽이고, 그들의 일족까지 몰살한 아라한. 폭정에 반항한 이들을 차례로 죽여 본보기로 보이고, 쓸모 있는 것들은 남겨 복속의 인장을 찍어 노예로 만든 과거의 역사.
차마 숨길 수 없는 증오와 적대감이 롤랑의 얼굴에 떠올랐다. 산적 같은 얼굴이 더욱 험악해진다.
“우리도 피해갈 수 없었다. 아서, 지금 우리의 목에 쇠사슬이 매여 있지 않은 건 수치다. 그들에게 복종해 살아남았단 뜻이니.”
롤랑이 붙잡은 어깨에서부터 통증이 일었다. 옷이 구겨질 만큼 악력이 들어간 손에서 핏줄이 솟았다. 아서는 삼촌의 낯선 모습에 그 손을 쳐내지도 못하고 그의 눈빛을 마주쳤다.
“그러니 잘 봐라, 내 조카야. 그들의 폭정을. 저 참혹한 모습을. 똑똑히 새겨 넣어!”
“롤랑.”
“아서. 아서 우더.”
롤랑이 목을 숙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네가 길잡이가 되어야 해.”
아서는 그 속에서 무언가 타오르고 있었다고,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하늘로 향했다. 적개심에 타오르던 롤랑조차 넋을 잃고 하늘을 응시했다. 어깨를 쥔 손에 힘이 풀렸지만 아서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달이, 기울었다.
동시에.
〖별을 품은 이들이여〗
세계가 까맣게 물들며 호수가 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