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일상의 균형 (18)
“…잘하네.”
루카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의 첫 대본 리딩이 생각났다. 흐름이 저 애한테 집중되었던 순간. 루카에게 충격을 가져다주었던 그 경험.
그땐 작은 연습실에 몇 안 되는 인원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면, 지금은 그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 감독들까지.
그러나 무대의 크기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처럼 여전히 자연스럽게 이목을 집중시키고 그 중심에 선다. 그게 당연하다는 저 태도가 대단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미약한 질투가 일었다.
루카는 제 안에 일어나는 감정을 인정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달래는 대신 승부욕을 불태웠다.
내가 언제까지 이렇게 부러워하고만 있을 줄 알아. 두고 봐. 루카는 며칠 뒤에 있을 촬영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그와 별개로 도현의 연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원작에서 아서는 유난히 르옌을 의식한다. 이 장면을 본다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것이다.
저런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어떻게 무시하겠어.
“컷! 하늘을 보는 장면부터 다시 갑니다. 대열 흐트러지지 않고. 타이밍 잘 확인하세요.”
레디, 액션!
토드 감독이 장비 위에 올라타 외치자 다시금 배우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조차 잘 보이지 않는 푸르른 하늘이지만, 후에 CG 작업을 거쳐 새카맣게 변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스태프의 신호에 맞춰 이번엔 호숫가로 시선이 향했다.
모든 이들이 그 장엄한 풍경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을 때였다. 철컥. 허리춤에 맨 검이 흔들리며 작은 소리를 내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한쪽 무릎을 꿇은 르옌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바라의 길 앞에 무한한 영광을.”
“나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모든 것은 바라시는 대로.”
자칫 잘못 연기하면 소꿉놀이처럼 보일 수 있을 텐데, 그런 어색함이 어디에도 없었다. 깔끔한 동작으로 일어난 소년은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그가 걷는 길마다 사람들이 홍해처럼 비켜섰다.
소년은 오직 목표만이 중요하다는 듯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호수에 발을 디뎠다.
“르옌 님! 저도 같이 가요!”
그 뒤를 아서를 비웃었던 소년, 호르헤 조반니가 따라갔다. 그러자 호르헤를 따르는 무리가 엉거주춤 그 뒤를 따랐다.
줄줄이 호수로 향하는 모습에 생전 처음 보는 신비로운 풍경에 넋을 놓았던 아서도 정신을 차렸다.
“롤랑! 실레! 저 다녀올게요!”
“조심하고…! 이런, 벌써 가버렸나.”
롤랑이 아서가 사라진 곳을 보며 목덜미를 긁었다. 그 옆에 선 실레가 두 손을 맞잡고 신성한 나무를 향해 기도한다. 부디, 저 아이가 옳은 길을 찾아 무사히 돌아오기를.
그 간절한 기원을 담은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컷이 울렸다.
* * *
‘아까 얘기하던 게 이거였나.’
토드 감독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카메라 너머의 배우를 보았다. 조금 전에 롱 쇼트를 찍었다면 지금은 풀 쇼트. 아라한과 르옌에 초점을 두고 찍고 있었다.
이 풀 쇼트 장면은 몇 번째 반복 촬영 중이었다. NG가 나서가 아니라, 배우들의 실험 정신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무미건조해 보이는 관계를 연출하더니 다음번에는 꽤 부드럽게 연기했다. 그러니까, 나름 부자 관계답게 말이다.
어느 쪽도 괜찮았다.
그 아라한이라면 다른 이들 앞에서 부자 관계의 돈독함을 티 내려 하진 않을 테니 무미건조한 연기도 적절했고, 그럼에도 새어 나오는 미약한 온화함은 서로가 서로에게 예외란 것이 잘 보여 또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정하기 쉽지 않겠군.’
토드가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리고 도현은.
‘재밌다.’
쿵, 쿵 뛰는 심장을 느끼고 있었다.
레비 올란도는 대단했다. 그 섬세한 컨트롤, 인상적인 연기와 발성이란. 어째서 그가 유명한 배우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연기법은.
‘나랑 닮았어.’
그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레비는 나와 닮았다. 연기에는 흐름이라는 게 있다. 이 순간을, 분위기를, 관객을, 그리고 상대 배우를 얼마나 장악하느냐. 얼마나 내 의도대로 이끄느냐. 그것 때문에 주도권 싸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전에 강이든 배우와 연기했을 때처럼.
그때는 서로를 잡아먹으려고 이를 세웠다. 방심하면 상대의 흐름에 잡아먹힐 거란 긴장감이 가득했다. 일종의 기 싸움이라 봐도 좋았다.
반면에 레비는… 달랐다. 분명 그는 능숙한 배우고 도현도 만만하지는 않은데, 서로 부딪히질 않았다. 마치 같은 흐름에 올라타서 부딪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서로에게 상충하지 않고 오히려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걸 레비도 느낀 모양이었다.
잠깐 주어진 휴식 시간.
“이상하게 편해.”
그가 대뜸 꺼낸 말에 도현이 그를 쳐다보았다. 레비가 빠진 주어를 추가했다.
“너랑 연기하는 거 말이야.”
“저도 그래요.”
“너도 느꼈어? 역시….”
레비의 눈이 반짝 빛났다.
“너 옛날에 개….”
“아니요.”
레비가 다시금 입을 열기 전에 한 번 더 강조했다.
“안 했고, 안 할 거고, 아니에요.”
“코카인 얘기 아니야.”
“…그럼요?”
들어나 보자는 심정이 되어 도현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레비가 담담한 투로 말했다.
“옛날에 경찰서 간 적 있냐고.”
그리고 후회했다.
역시 말을 하게 두면 안 됐는데. 옆에서 헤레이즈가 대체 무슨 대화를 하는 거냔 표정을 지었다. 도현도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결국 한숨과 함께 답했다. 앳된 얼굴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그런 적 없어요….”
“아니구나. 미안해.”
도현의 부정에 레비가 선뜻 대답했다. 이상한 걸 물어봐 놓고서 수긍은 또 굉장히 빠르다. 도현은 레비를 이해하길 포기했다.
도현이 어깨를 늘어트리자 레비가 그를 익숙하게 안아 올렸다. 도현은 레비가 자신을 말하는 애착 인형 정도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내려달라고 하면 내려줄 건가요?”
“조금만 있다가. 너 시원하거든.”
애착 인형이 아니라 아이스 팩이었다. 확실히 옷이 겹겹이 걸친 형태라 덥긴 했다.
“저는 불편해서요.”
“안타깝네.”
그게 전부인가. 아무래도 내려줄 생각이 없는 거 같아 도현은 고개를 숙였다. 여기저기서 날아와 꽂히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궁금한 거나 물어보자 싶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한테 그런 얘기는 왜 하시는 거예요?”
“그런 얘기?”
“코카인이나, 경찰서나. 그런 거요.”
도현은 살면서 한 번도 불량하단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잘 손질된 생머리, 불필요한 동작이 없는 태도를 본 이들은 백이면 백, 모범생이라고 여기는 편이었다. 데이먼도 학교에 빠졌단 도현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았던가.
“흠… 그건, 뭐랄까.”
잠깐 고민하던 레비가 말했다.
“너한테서 비슷한 느낌이 나서?”
“누구랑요?”
“당연히 나지.”
당연하기까지 한 일일까. 물론, 도현도 연기를 하면서 비슷하단 느낌을 받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연기에서였다. 닮았다고 하기엔 두 사람이 살아온 환경은 너무나 달랐다.
도현이 아리송해하고 있자 레비가 주제를 환기했다.
“그보다, 아까부터 계속 누굴 보는 거야?”
“네?”
“저쪽은… 단역들인가.”
“…쳐다보지 마세요.”
“왜?”
레비가 말을 꺼낸 순간 살짝 굳었던 낯이 다시 평소대로 돌아와 있었다. 도현이 지극히 일상적인 어조로 말했다.
“들키면 도망갈 거라서요.”
“…봐, 이러니까 내가 자꾸 묻지.”
레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벌써부터 새카맣게 굴고 있는데, 곱게 자랐다고 주장하니. 이 정도면 돌연변이 수준 아닌가.
레비 올란도.
그의 날개 뼈에는 지울 수 없는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자극적인 것만 찾아 헤맸던 어린 시절. 겁 없이 박아 넣었던 표식. 그 문신은 지워냈음에도 여전히 흉터로 남아, 상체가 나올 땐 특수 분장을 거쳐야 했다.
레비는 그곳에서 많은 인간군상을 보았다. 쓰레기 같은 놈, 쓰레기가 아까운 놈, 불쌍한 놈, 멍청한 놈, 약에 절어버린 놈, 사탄도 울고 갈 놈…. 그러나 그런 인간들에게도 공통점은 있었다.
어딘가 하나씩은 결핍되고 고장 난 인간들이라는 거. 뭐, 그렇지 않았다면 밑 구석까지 기어들어 오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레비는 그런 인간들은 만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인간들 사이에서 커서 그런가. 아니면 본인이 그런 인간이라 그런가.
재밌는 사실은, 할리우드 판에 그런 인간들이 꽤 많다는 사실이었다. 쓰레기 소굴에 있었을 땐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그저 반짝반짝 빛나는 세계처럼 보였는데 까보니 실상은 이렇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쓰레기장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하듯이.
그러나 그것이 이 어린애한테, 그것도 타칭 청정해의 일급수와 맑은 공기만 마시고 요정처럼 곱게 컸다는 애한테 느껴진다는 건 그로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어젯밤, 감독들과 대화 도중 제가 도착하기 전 도현의 행적을 들은 레비는 헛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아이를 대견하다는 듯이 말하는 이들이 신기했다. 그거,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닌데.
무언가에 미친 인간치고 제대로 된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게 마약이든 연기든, 뭐든. 그래서 레비는 이 어린애가 흥미로웠다. 멀쩡한 척 구는 건지, 정말 멀쩡한 건지.
“여기서 어떻게 도망을 가? 섬인데.”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그래서 언제 내려주실 건데요?”
“촬영 시작하면.”
흥미는 곧 관심이다.
레비는 이 소년에게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어른스러운 성격이나 연기에 진심으로 미쳐 있는 것이나, 그런 것들. 어떤 배경에서 자랐길래 이렇게 큰 건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도 흥미로웠고 배우로서도 재밌었다.
그러니 잘 대해줘야지. 레비는 가볍게 생각하며 품 안의 것을 안았다. 도현이 체념한 낯을 했다.
당사자의 의견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호의였다.
* * *
촬영을 마치고 시끌벅적해졌다. 내일부터 촬영지가 바뀌어서 장비를 모두 철수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소란은 기회였다.
“너 어디 가?”
“볼일이 있어서. 기다리지 마.”
“내가 널 왜 기다려?”
“내일부터 따로 다닐까?”
“내가 미안하다, 새끼야.”
가벼운 물음에 격한 사과가 돌아왔다. 도현이 어깨를 으쓱한 후 뒤를 돌았다. 오스카에게는 이미 양해를 구해놓은 후였다.
“빨리 와.”
아무래도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헤레이즈를 퍽 힘들게 하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익숙해진 풀 냄새 쪽으로-신시아였다.- 붙어서며 말했다. 잠시 그를 안쓰럽게 보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디 가니! 분장은 풀어야지!”
아. 도현은 아차 한 얼굴로 스태프를 돌아보았다. 그를 붙잡은 스태프가 분장실로 데려가려 하길래 도현이 그녀의 옷깃을 조심히 붙잡았다.
“잠깐만… 이따 하면 안 될까요?”
“빨리 끝내…는 게 뭐가 중요하겠니. 그래. 다른 사람부터 하면 되지. 헤레이즈! 너부터 이리 오렴.”
순식간에 설득당한 스태프에 도현이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고맙다고 인사한 후 다시금 발을 옮겼다.
목적지는 단역들이 모인 천막이었다. 때마침 도현이 원하는 타깃이 천막에서 나오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은 건지 단출한 흰 원피스에서 멀쩡한 사복으로 바뀐 상태였다.
성큼성큼.
다리를 길게 뻗어 한달음에 그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가 채 쳐다보기도 전에, 그 팔을 붙잡아 천막 뒤쪽으로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놀란 이가 깜짝 놀라 몸을 떨다가, 이내 자기를 잡아당긴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곤 얼음이 되었다.
도현이 눈매를 휘었다. 분장을 풀지 않은 도현은 여전히 은발을 아래로 묶어 내린 상태라, 유난히 인외스러웠다. 그러나 천사 같은 얼굴과 다르게 상대의 팔을 쥔 손에는 힘이 좀 더 들어갔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너.”
“와, 신기하네요. 다시 만날 줄은 알았지만, 그게 뉴질랜드일 줄은 몰랐거든요. 제가 조금만 더 주변에 관심이 없었으면 아마 영영 몰랐겠죠? 아닌가. 방영일에는 알았으려나.”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누가 봐도 비꼬는 모양새였다. 그 낯선 태도에 상대의 얼굴에 당혹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두 눈동자가 떨리는 게 단단히 놀란 모양이었다.
도현이 분위기를 환기하듯 가볍게 말했다.
“장난이에요. 그래서 잘 지냈어요, 맥? 제가 보낸 디저트는 잘 먹었고요?”
“미친놈….”
맥이 온 진심을 다해 말을 뱉었다. 그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도현이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맥의 안색은 더 안 좋아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