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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300)화 (301/582)

제300화. 일상의 균형 (19)

맥은 도현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말, 진심으로.

처음에 천막 뒤로 끌고 왔을 땐 진짜 놀라서 소름이 다 끼쳤다. 그 후에 누가 봐도 화가 난 상태면서 아니라는 듯 싱글싱글 웃어대니… 솔직히 좀 무서웠다. 얘 왜 이래.

일단 진정부터 시켜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너 똑똑하잖아. 일부러 피한 거 다 알면서 왜 이러는 건데?”

입이 방정이지. 맥은 제 자유분방한 주둥이를 때리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체념했다. 진심이긴 했으니까. 아니, 사실 그게 가장 본심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좋게 봐줘서 고맙지만, 그 질문은 돌려줘야겠네요. 제가 이러는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물어요?”

돌아온 대답에 기분이 이상한 맥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분명 싫은 소리는 하나도 못 하는 애였는데….

문득, 맥은 도현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저보단 작지만, 전에 비해선 몰라볼 만큼 큰 키. 여전히 하얀 피부는 위에 올라간 화장 탓에 언뜻 창백해 보였다. 어리다고 생각했는데 눈가에 음영이 꽤 깊게 잡혔다. 그래도 볼에는 앳됨이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가발 같지 않게 자연스러운 은발을 보던 맥은 생각했다.

많이 달라졌다.

처음 만났을 땐 일방적으로 싫어하느라 제대로 볼 생각을 안 했다. 일련의 사건 이후엔 그때의 이미지가 너무 깊게 박혀, 보호해야 할 애로 인식하게 되었다. 눈 떼면 큰일 나는 물가의 어린애 정도로.

그런데 지금은.

‘누가 누굴 걱정해.’

맥 앞에 서 있는 애는 그 악조건에서 주연 자리를 따내, 전 세계의 비난 속에서도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킨 한 명의 배우였다. 열 명에게 묻는다면 아홉 명은 대단하다고 추켜세울 만한, 그런 애.

일방적으로 느꼈던 거리감은 촬영장에서 당연하다는 듯이 주변을 휘어잡는 도현을 봤을 때 더욱 커졌다. 목에 쇠사슬을 차고 볼품없는 천을 걸친 저와 주목 속에 서 있는 도현. 배역이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현실 반영이 잘될 수가 있을까. 자조하던 맥은 무언가 깨달았다.

도현은 맥이 걱정하며 불쌍하게 볼 애가 아니었다. 불쌍한 사람을 고르자면 배역에 모두 떨어지고 엑스트라 자리를 겨우 얻어낸 나겠지.

이제야 확신이 선다.

맥은 씁쓸한 기분을 애써 외면하며 차갑게 말했다.

“이렇게 나를 한심하게 만드니까 좋냐?”

공격적인 어조에 검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무 심했나. 맥은 동요를 숨기기 위해 사납게 세웠던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솔직히 나 같은 놈이 뭐가 좋다고 이러는지 모르겠거든.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어. 너는 심사 위원석에 있었고 나는 그런 너한테 열등감이나 쏟아내는 모자란 새끼였잖아.”

사납던 기세를 누그러트렸지만 어쩔 수 없는 자조가 묻어 나왔다.

“지금도 그래. 눈이 있으면 봐. 그때랑 똑같잖아.”

몇 달간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관계를 끊어내기로 마음먹어서 그런가. 놀라울 정도로 속내가 솔직하게 흘러나왔다.

“너는 중심에서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데 나는 우스운 원피스나 처입고 몇 초 겨우 등장하지. 그런 주제에 와우, 자존심은 못 버려서 너한테 이 지랄을 떨고 있네. 진짜 대단한 머저리 아니냐? 내가 봐도 더럽게 한심한데, 네 눈에는 얼마나 더하겠어. 안 그래?”

조롱하듯 비아냥거리면서 목깃을 잡아당겼다. 답답했다. 조금 트인 숨통에 숨을 내쉬며 검은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러니까 그만 좀 하자. 너랑 있으면 내가 너무 한심해 미칠 거 같아.”

진심이었다. 아니, 진심이 아니었다. 글쎄. 말하면서도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도현과 친하게 지내면서 자괴감만 들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잠적한 뒤로 매주 도착하는 택배를 받으며 안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해. 결국 말해 버렸는데.

‘이게 맞지.’

맥은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차피 옆에 남아봤자 나는 변하지 않는다. 부럽지 않다고 세뇌했지만, 사실 집에 방문할 때마다 그 넓은 정원과 그려놓은 것 같은 저택에 배가 아팠다. 그런 곳에 살면서 재능조차 가진 어린 동생을 볼 때마다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박탈감을 수습해야 했다.

맥은 스스로조차 속이면서 아닌 척하는 걸 이제 좀 그만하고 싶었다.

“제가 맥을 힘들게 해요?”

“어. 이제 알아듣네.”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될 대로 돼라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에 맥은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저도 맥 때문에 힘들어요.”

단연코, 이런 대답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맥은 크게 확장된 눈으로 제 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도현은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저도 맥 때문에 힘들다고요.”

“뭐… 뭐라고?”

“그럼 안 힘들겠어요? 갑자기 연락도 없지. 친구들 연락까지 다 무시하고 잠적하지. 그렇게 굴고 말도 없이 촬영장에 나타났으면서 하는 말이 겨우 이건데.”

맥은 정신이 혼미했지만, 애써 날아가려는 영혼을 붙잡고 멀쩡한 척 대답했다.

“그, 그럼 아는 척하지 말든가. 잘됐네. 서로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면 되잖아.”

그러나 말을 더듬는 것까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 탓에 싸늘한 표정을 지어도 전혀 싸늘해 보이지 않았다.

“근데 전 다 참아요.”

놀라우리만치 깔끔하게 맥의 말을 씹은 도현이 제 할 말만을 뱉었다. 맥은 이제 눈앞의 상대를 낯선 무언가를 보듯이 봤다.

“다 참는다고요. 맥이 먼저 잠적했으면서 이렇게 적반하장으로 나와도, 다.”

아니, 듣자 하니 어이없네.

“하아? 야. 누가 너보고 참으랬어? 안 참으면 되잖아.”

“그러니까 맥도 참아요.”

이번에도 깔끔하게 씹어 먹은 도현이었다. 맥은 이제 완전히 황당하단 표정이 되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고 받아들였는지, 도현이 친절하게 덧붙였다.

“저 때문에 힘들고 귀찮고 성가셔도 맥이 그냥 참으라고요. 둘 다 참는 거니 나름 공평하지 않아요?”

공평이 다 얼어 죽었다.

“내가 싫다면?”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의외로 쉽게 물러난다. 맥은 곧장 안심하지 않고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저 애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즘 뭐가 제일 맛있었어요?”

역시 방심하지 않길 잘했지.

또 잠적하면 또 택배 공세를 할 거란 예고에 맥은 잠시 아득해졌다. 불현듯이 조금, 잘못 걸린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정답이었다.

* * *

터덜터덜 돌아오는 도현에게 말을 건 건 루카였다.

“아까 그 사람, 그 배우 맞지?”

“응?”

“너랑 영화 찍은 사람 아니야? .”

만나는 걸 봤나. 도현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있어?”

“왜?”

“왜겠어? 친해지고 싶어서지.”

루카는 맥에게 흥미가 많았다. 저 말도 안 되는 놈이랑 작품을 찍어본 사람이니 말도 잘 통할 거 같았고, 무엇보다 영화에서 이사야는 꽤 인상적이었다.

얘한테 좀 밀리기는 했어도… 이사야의 캐릭터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이도현과 단둘이 등장하는 상황에서 매력적으로 보였다는 거 자체가 루카에겐 충분히 흥미로운 일이었다.

“안 돼. 맥은 너 안 좋아할걸.”

도현은 진심이었다. 그야, 남들이 보기에 조금 잘사는 도현도 별로 안 좋아하는데 날 때부터 할리우드 패밀리인 루카 하퍼를 좋아할 리가. 그 진심 어린 대답이 루카의 성질을 긁은 모양이었다.

“두고 봐. 내가 너보다 더 친해져서 올 테니까!”

도현은 굳이 루카를 막지 않았다. 맥은 은근히 허들이 높아서, 누군가 친한 척 다가온다고 쉽게 허락해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게 루카 하퍼쯤 되면 더더욱.

그러나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이미 단역 배우들이 처소로 이동을 마쳐서 루카는 맥과 친해지는 건 고사하고 한 마디 대화조차 나눌 수 없었다. 도현은 속으로 조금 안도했다.

만약 맥이 루카랑 친해지면 그건 그거대로 상처일 거 같았으니까.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근데 왜 엑스트라 역에 지원했대? 더 비중 있는 역할에 도전해도 됐을 거 같은데.”

옆에 가만히 있던 헤레이즈였다. 잠깐 고민하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맥도 지원자였어. 네 역할.”

“오.”

짧은 감탄사를 뱉은 헤레이즈가 수긍했다. 그러다 약간 아쉬운 투로 말했다.

“다른 역할이라도 지원하면 좋았을 텐데.”

“했어. 호르헤 조반니.”

“아하….”

헤레이즈는 이번에야말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누바라족의 노예 무리에 끼어 있던 걸 상기한 것일 터다. 호르헤 조반니 역은 최근 멜로드라마의 조연으로 이름을 알린 배우가 차지했다.

“근데 그런 거 말해도 돼?”

“다른 사람한테 말할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런데….”

말끝을 흐리던 헤레이즈가 중얼거렸다.

“뭐, 솔직히 대단하긴 하네. 끝까지 포기 안 한 거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눈을 깜빡이던 도현이 조용히 동의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여겼다.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는 맥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이나.

맥은 왜 모를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그의 부족한 자존감은 자존심과 자기애 사이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도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깨닫는 날이 오길 기다릴 수밖에.

단역 배우와 도현이 머무는 곳은 다르다. 맥이 출연하는 건 오늘 하루뿐. 내일 아침이 되면 다른 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도현과는 더 마주칠 일이 없었다.

도현은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결국 말을 얼버무렸지.’

뭐가 제일 맛있었냐는 질문에 대답은 안 해주고, 또다시 ‘미친놈’이라 하고선 도망쳤다. 차마 배우들 사이로 숨은 그를 끌어낼 수는 없어서 입맛을 다시며 포기해야 했다.

도현은 아직도 관계가 어려웠다.

맥이 밀어내는 걸 느꼈을 때, 도현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다. 맥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그의 의도대로 멀어지는 게 맞을까? 아주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자 속에서부터 거부감이 치고 올라왔다. 절대 싫어.

언제부터 맥이 이렇게 중요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나. 잘 모르겠다. 솔직히 첫인상은 엉망이었다.

도현은 아직도 종종 맥의 푸른 눈이 가라앉을 때면 그 복도의 그림자, 바닥에 흘린 음료수 따위가 기억나곤 했다. 그의 주변엔 유독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이 많은데, 그의 푸른 눈은 이상하게 자주 마음을 시리고, 불안하게 했다.

그럼에도 놓을 수 없는 건….

아마 처음이기 때문이겠지. 용서받고 싶어서 진심으로 사과한 사람이.

맥은 참 다채로웠다. 진심으로 도현을 싫어했으면서 진심으로 동경하고, 동시에 미안해하고, 결국엔 사과했다. 그건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었다. 한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걸 맥을 통해 알았다.

이것도 정답이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그저 첫 작품을 함께한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었다. 막 알을 깨고 나온 새끼 새가 처음 본 것을 각인하듯이, 그렇게 말이다.

결국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최근에 취했던 행동을 그대로 답습했다. 그러니까, 인터라켄에서 의식이 반쯤 가출했을 때 말이다.

이번의 대화는 ‘네가 친구 하기 싫어도 친구 할래’의 기출 변형이었다. 흑역사니 뭐니 하면서 괴로워했으면서 또 똑같은 짓을 저지른 자신에 도현이 마른세수를 했다.

- 그건 네 본성이 드러난 거뿐이거든.

아무래도 덩어리 님의 말이 사실인 듯싶었다. 몇 달이 지나고 나서야 도현은 그 말을 인정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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