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01)화 (302/582)

제301화. 일상의 균형 (20)

결국 맥은 인사 없이 돌아갔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던 도현은 다음 날, 핸드폰에 남아 있는 메시지 기록을 보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맥 버클러 : 체중 조절해야 하니까 택배는 그만 보내.]

내용은 그리 상냥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맥이 잠적을 깨고 먼저 연락했다는 게 중요하지.

사실 내용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재밌는 부분이 있었다. 택배를 보내고 싶어도 못 보낸 지 어언 한 달째. 곧 도현의 촬영은 끝이 나긴 하지만 맥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왠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다가 할 말을 간신히 쥐어 짜낸 모습이 보이는 거 같았다,

도현의 얼굴에서 놀람이 잦아들고 그 자리에 즐거움이 번졌다.

전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영영 인연을 끊어 버리겠다는 목표는 포기한 모양이었다. 도현은 그쯤에서 만족했다. 아예 멀어지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건 틀림 없으니.

미래의 일은 걱정되지 않았다. 맥이 신경 쓰는 건 스스로 느끼는 격차. 그가 배우로서 성공한다면 자연스레 해결될 일이었다. 도현은 맥의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이 풀리니 마음이 편히 놓였다. 이제 이것저것 다른 생각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도현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퍼와의 관계에서는 최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해서 남은 건….

‘서로를 향한 언짢음뿐이지.’

반대로 맥을 대할 땐 이성보단 감정에 충실했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나왔다.

왜지?

도현은 제 상식을 재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가 관계에 서툰 건 사실이지만, 그게 학습 능력이 없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도현은 지난 일 중에 비슷한 것들을 떠올리며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적당한 억지는 원하는 결과를 만드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도현은 제가 만든 문장을 흡족하게 보았다. 조금의 민망함과 수치심을 감수한다면, 훌륭히 쓰일 수 있는 문장이었다.

도현의 행동 방식에 새로운 선택지가 추가된 순간이었다.

글레노키에서 아오라키 마운트 쿡 빌리지로 숙소가 바뀌었다. 마운트 쿡 빌리지는 도로가 끝나는 지점이자, 후커 빙하와 뮐러 빙하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역시나 관광업이 발달한 나라답게 고급 호텔이 있었는데, 호텔에서 보는 만년설이 쌓인 계곡은 장관이었다. 그 경치를 구경할 시간도 없이 시작된 첫 촬영은 후커 밸리에서였다.

촬영지가 워낙 이곳저곳 포진되어 있다 보니 촬영은 순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날씨에 따라 일정이 변화하기도 해서, 미리 공지된 일정에 맞춰 준비해 두어도 소용이 없어질 때가 꽤 빈번히 있었다.

그러다 보니 가장 먼저 예정되어 있던 도현의 촬영이 조금 미뤄졌다.

그렇게 며칠.

도현은 한 동굴에 도착해 있었다.

“저 바위 보이지. 저 바위 옆에 지하수가 흐르고, 거기서부터 이어진 쇠사슬에 픽시가 발목이 묶여 있는 거야.”

데이먼이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해 주었다. 도현은 그가 짚은 곳을 눈에 담았다.

안 보이는 걸 보이는 듯이 연기하는 건 이미 한번 해본 일이었다. 다시 떠올리기 싫은 CF의 추억이었다.

도현은 안타까운 지난날을 회상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데이먼은 집중하는 아이를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눈을 뜬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어요.”

시즌 1에서 필요한 장면은 이미 글레노키에 머무를 때 거의 다 찍었다. 남은 건, 동굴에서 별의 조각을 찾는 장면과 하퍼가 맡은 니흐타와 마주치는 장면이었다.

그것도 후자의 경우는 지금 촬영하긴 하지만, 시즌 1에 들어가지 않는 장면이었다. 편집 도중 각색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결국 공식적으로 도현이 등장하는 장면은 이 동굴에서의 장면이 끝이었다.

‘진짜 적긴 하네.’

대기는 한 달인데 촬영은 일주일 정도… 아니 늦춰져서 이 주일인가.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어차피 다음 촬영도 내년에 예정되어 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분량이 훨씬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도현은 주어진 장면에 충실하기로 했다.

“일단 동굴에 들어가는 장면부터 원테이크로 찍어볼 거야.”

“네. 저 동선 몇 번만 확인해 볼게요.”

“그렇게 해.”

데이먼의 허락 아래 도현은 동선을 세 번 정도 확인했다. 세 번째 확인할 때는 걷는 위치를 두 번째와 완벽히 똑같게 할 수 있었다. 밟는 돌 하나마저 동일하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도현은 온전히 외웠단 확신이 서자, 확인을 끝내고 스태프가 알려준 자리에 가서 섰다.

신시아가 열심히 하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도현은 신시아를 향해 작게 웃어 보인 후, 옆에서 웩 하는 표정을 짓는 하퍼를 무시한 다음,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위가 이곳저곳 널린 숲이 보였다. 숲속의 깨끗한 공기가 폐 속에 가득 들어왔다. 도현은 머리를 비워냈다.

“레디.”

이제부터 생각할 건 하나뿐이었다.

“액션!”

별의 조각.

그것을 손에 넣어야 한다.

* * *

바스락. 수풀을 헤치고 나온 소년의 시선이 주위를 훑다가, 한 곳에 닿았다. 애초부터 그곳이 목적이었다는 듯 발을 뻗는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카메라가 소년의 뒤를 따랐다. 소년은 길을 잘 아는 것처럼 깊이, 더 깊이 들어갔다.

이윽고.

동굴이 나타났다.

“여기가 맞았군.”

작게 중얼거린 도현이 동굴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 르옌이 주변의 기척을 확인하는 장면.

후에 드론으로 찍은 숲 안의 풍경이 몇 배속을 누른 것처럼 빠르게 재생되는 장면이었다.

도현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카메라가 그 옆모습을 비스듬히 담아냈다. 햇빛을 받은 은발이 조금 노란빛을 내었다.

낯선 기척에 문득문득 반응하고, 또 그 무의식적인 반응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몇 달 사이 능력을 조절하는 게 놀라우리만치 섬세해졌다. 흐름이 아닌 주변을 읽는 것 정도는 쉬울 정도로. 게다가 제3의 세계를 엿보는 게 아니니 그 정도로는 부작용조차 없었다.

간단한 장면에 이렇게까지 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도현은 뭐든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출연하는 장면이 적은 만큼 더.

서서히 주변의 기척이 들리기 시작한다.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 작은 다람쥐가 내달리는 소리.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

숲의 소리가 들려왔다.

* * *

토드 감독의 눈에 놀라움이 서렸다.

후에 편집을 거친다면 모를까. 촬영하는 지금은 특별할 부분이 없는 장면인데.

‘분위기가 독특해.’

진짜로 뭔가 듣고 있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그냥 은발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귀와 아름다운 얼굴이 그 자체로 신비로워 보이는 것도 있지만….

아까까지 멈춰 있던 바람이 도현이 눈을 감자 살랑이며 불었다. 어떻게 타이밍조차 저렇게 그린 듯이 완벽할 수 있는 거지.

이 나이 먹고 이런 동심이 들 줄은 몰랐는데… 마치 숲이 귀를 기울이는 거 같았다.

‘온 숲이 도와주는 거야, 뭐야.’

토드 감독은 제 생각이 우스워 짧게 피식 웃었다.

길게 드리워졌던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고,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영원할 거 같았던 순간이 끝이 났다.

보는 이들을 묘한 감상에 빠트린 당사자는 아무런 감흥 없는 검은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동굴을 응시했다.

* * *

동굴까지 가는 장면을 몇 번 반복해서 찍었다.

“있지, 정말 뭐가 들려?”

“응?”

“으응, 넌 꼭 진짜 듣고 있는 거 같아.”

내심 찔렸지만, 태연한 척 미소를 걸었다.

“그냥 들리는 척하는 거지.”

“숲이 널 좋아하나 봐.”

신시아는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이 퍽 자유로운 편이라 이렇게 종종 난데없는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도현은 신시아에 대한 관찰을 마친 상태였다. 몰입이지만, 몰입이 아니다. 신시아는 이미 브닌나를 또 다른 자기 자신으로 받아들여 버린 거 같았다.

저래도 괜찮은 건가 싶긴 하지만… 얘기하는 걸 들어 보면 브닌나 역할을 맡기 전에도 엉뚱한 성격이었던 거 같았다.

말릴까 고민도 해봤다. 그가 역할 몰입으로 자아에 혼란을 겪어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덩어리 님을 불러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그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크기가 크진 않지만, 저렇게 영혼이 견고한 인간은 드물다. 걱정할 인간이 따로 있지….

도현은 저나 잘하기로 했다.

“숲은 너도 좋아해.”

“정말이야?”

“응.”

“어린애들이냐.”

옆에서 헤레이즈가 한심하다는 듯이 보았지만, 이건 진짜였다. 모든 흐름은 각각 파장과 색을 가지고 있어서 때론 잘 동화되고 때론 물과 기름처럼 서로를 밀어냈다.

어떤 곳은 처음 가보는데도 집처럼 편안하고, 어떤 곳은 매일 가도 정이 안 생기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잘 맞는 이들은 파장이 서로에게 잘 동화되는 이들이었다.

아무튼, 신시아의 영혼은 갓 움튼 새싹같이 투명한 연둣빛이라 이 숲과 잘 맞았다.

물과 기름 같은 사람은….

도현의 시선이 차례로 데이먼과 하퍼에게 닿았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 배우를 참 잘 뽑았네.

“도현!”

멀리서 토드 감독이 도현을 불렀다. 다음 장면 촬영을 위한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아까 데이먼이 말해준 위치 기억해?”

그의 질문에 도현이 그렇다고 답했다. 시원시원한 대답이 마음에 든 것인지 토드 감독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노바우드 대륙에는 신성한 동물이 존재한다.

창공을 누비는 말, 실라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뱀, 스마고그.

그리고 끊임없이 타오르며 다시 태어나는 새, 픽시.

각자 수호와 지혜, 생명을 관할한다고 알려진 이 세 신성한 동물은 과거에는 태초의 종족에게 도움을 주며 함께 살았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그저 전설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피이이이-

날개와 발목에 쇠사슬이 감긴 처참한 모습으로 구슬피 우는 새는, 신비롭게도 그 깃털이 모두 붉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쇠사슬에서 벗어나고자 얼마나 몸부림친 건지 군데군데 핏물이 배어났지만, 이상하게도 상처는 없었다.

그를 보는 검은 눈동자가 잠깐 흔들린 듯했으나 곧 잔잔히 가라앉았다.

르옌은 픽시에게서 시선을 뗀 채 무릎을 굽혔다. 검은 시선이 지하수 아래로 연결된 쇠사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스릉.

허리춤에 찬 칼을 빼내자 서늘한 금속음이 들렸다. 르옌은 그대로 울음소리를 내는 픽시에게 다가갔다. 날붙이를 들고 접근하는 이에 픽시의 몸부림이 더욱 거세어졌다.

“가만히 있는 게 덜 아플 거야.”

들으리라 믿고 한 소리는 아니었는지, 말이 끝나는 순간 팔이 휘둘러졌다. 픽시의 날개가 베이며 불꽃으로 된 깃털이 타올랐다.

르옌은 하얀 손을 내밀어 상처로부터 떨어지는 핏물을 받았다. 손바닥에 고인 핏물은 신기하게도 점점 황금빛을 띠더니, 이내 작은 빛 덩이로 변했다. 그 신비로운 광경에 무심하던 검은 눈에도 살짝 놀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도 잠깐.

손을 꽉 쥐자 빛 덩이가 스르르 녹아내려 몸에 흡수되었다. 르옌은 잠시 숨을 멈추고 몸에 차오르는 감각을 느꼈다.

이내, 흰 낯에 만족스러움이 어린다.

탁. 칼을 도로 칼집에 넣은 르옌은 곧장 동굴을 나가지 않고 슬피 우는 새를 보았다. 그가 베었던 날개는 이미 온전히 나아 제 상태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 모습을 눈에 담던 르옌이 입매를 굳히고 몸을 틀었다. 동굴 밖을 향하는 발걸음이 유독 느렸다. 피이,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다가, 점점 멀어졌다.

밖으로 나오자 햇빛이 내리쬐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동공이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축소되었다. 눈매를 찡그리던 르옌이 시선을 내려 제 손바닥을 쳐다보았다.

빛 덩어리를 흡수했던 손은 아무런 흔적 없이 깨끗했다. 그러나 몸에서는 신성한 기운이 느껴졌다. 몇 번 손을 쥐었다 펴던 르옌이 생각했다.

시시한 일이다.

정령이 주관하는 첫 번째 시험이, 신성하다 칭송받는 불멸의 새가, 이리 쉬이 손에 들어오다니. 조소를 머금던 르옌이 손을 내렸다.

시험은 마쳤으니 남은 건 돌아가는 일뿐.

지루한 낯으로 걸음을 옮기던 르옌이 무언가를 느낀 듯 멈춰 섰다. 날카로운 시선이 반대쪽을 향했다.

시선 끝에는 절벽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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