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02)화 (303/582)

제302화. 일상의 균형 (21)

아가, 겁내지 말렴

희미하게 들리는 노랫소리.

바람과 섞인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작았다. 저도 모르게 멈춘 르옌이 귀를 기울였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기시감?

이상한 생각을. 소년이 낯빛을 찌푸렸다.

누바라의 후계자에게 자장가를 불러준 이는 없었다. 아라한은 위대한 수장이었지만, 자애로운 아버지는 아니었다. 소년을 어릴 때부터 보살핀 이들도 먼저 말을 걸지 않는 이상 늘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누바라의 후계자란 건 그런 위치였다.

착각일 것이다. 그리 여겼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쪽을 향해 걸었다. 절벽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높은 지대의 맑은 공기와 그 아래 흐르는 계곡의 물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질수록 걸음은 느려졌다. 시야를 가린 덩굴을 치워낸 르옌은 소리의 진원지를 찾을 수 있었다.

어둠은 달님이 지켜주고

길은 별님이 밝혀주니

등허리를 전부 덮는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물결쳤다. 높은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탓에 하늘에 진 노을처럼 보이기도 했다. 낡은 가죽신을 신은 발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아가, 밤은 너를 사랑한단다

검은 눈동자가 그 광경을 담았다.

무슨 생각인지 모를 무표정한 낯 위로 드리워진 은발이 저물어가는 태양에 노을빛으로 은은히 물들어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있던 소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견고하지 못한 것을 파고드는 바람의 소리.

이건…. 소년의 시선이 위태로이 휘청거리는 소녀에게 닿았다. 소녀가 앉은 나뭇가지 끝에서부터 빠르게 균열이 일고 있었다.

* * *

시즌 1의 비하인드이자 니흐타의 첫 등장 장면.

이 장면에서는 와이어를 이용한 액션이 들어갔다. 절벽 너머로 뻗은 가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니흐타가 추락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루카 하퍼는 와이어에 매달린 채 추락하는 장면을 연기해야 했다.

성인 배우라면 크게 문제는 없을 장면이었지만, 루카 하퍼는 어린 소녀였다. 촬영 현장은 평소보다 더욱 조심스러웠다. 스턴트맨도 고려 사항에 있긴 했지만, 하퍼가 나서서 거절했다고 들었다.

도현은 스태프들이 모여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크로마키를 세워두고 만든 임시 세트장에는 와이어 연기를 위한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원래 추락 장면 같은 경우, 그다지 높지 않다면 배우가 에어매트 위로 직접 뛰어내리는 편이었다. 그러나 원작에서 니흐타가 추락한 절벽처럼 아주 높은 곳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이 경우 전문적인 스턴트맨이 와이어에 매달려 직접 뛰어내리기도 하지만, 그런 액션을 할 수 있는 스턴트맨 중에 루카 하퍼와 동일한 체구를 가진 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선택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합성이었다.

먼저 드론 카메라를 이용해 절벽을 배경으로 찍은 후, 연기자가 크로마키를 배경으로 펼치는 연기를 편집을 거쳐 합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날 첫 장면, 그러니까 니흐타와 르옌이 만나는 장면까지만 먼저 찍었다. 그게 꽤 괜찮은 그림이 나와서–사실 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얌전하던 토드 감독이 흥분했을 정도로 아주 괜찮았다. 특히 영화 속 노래조차 히트시킨 하퍼의 노래 실력이 엄청났다.- 분위기가 굉장히 화기애애했다.

도현은 스태프들이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안전 점검을 하는 것을 보았다. 하퍼는 떨리는 건지 신난 건지 구분이 안 되는 상기된 낯이었다.

“너 안 무섭겠어?”

“높이도 낮잖아. 절벽에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서 아쉬운데?”

헤레이즈의 질문에 하퍼가 허세를 부렸다.

“높은 곳에 익숙해지려고 패러글라이딩도 배웠거든.”

“오… 패러글라이딩을?”

어쩌면 허세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퍼의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나 보다.

“난 높은 곳은 싫던데….”

“아서는 심심하면 떨어지잖아.”

“그렇긴 하지.”

이미 와이어 연기를 몇 번 해본 헤레이즈가 수긍했다. 아서가 워낙 날다람쥐처럼 이 나무 저 나무 뛰어다니고, 툭하면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 때문에 불가항력이었다. 조금 과격한 장면은 스턴트맨이 대신해도 와이어 연기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대화 소리를 배경으로 한 채 도현은 생각에 잠겼다.

이번 시즌에서 르옌의 액션 연기라고 하면… 칼 휘두른 거? 저번에 찍었던, 픽시의 날개를 베어내던 장면이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 있을 장면 정도.

지금은 이 정도뿐이지만, 시즌이 진행되고 등장인물이 성장할수록 액션은 더욱 과격하고 화려해졌다.

‘액션을 배워야 하나.’

배우면 뭘 배워야 하지. 발레도 액션 연기에 도움이 될 거 같긴 한데… 체조? 아니면 격투기? 아예 액션 스쿨을 다니는 편이 좋을까?

“레비.”

“음?”

“레비는 액션 연기를 직접 하는 편이에요?”

이런 건 잘 알 것 같은 데다가 할 일이 없어 보이는 사람한테 물어봐야지. 도현은 또 저를 한 손으로 들어 올려 안고 있는 레비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엄마 아빠도 도현을 이렇게 들고 다니지 않았다. 레비는 아주 습관이 된 건지 심심하면 번쩍번쩍 도현을 들어 올렸다. 심지어 그는 촬영도 끝이 난 상태였다. 시즌 1에서 도현과 만만치 않게 적게 등장하기 때문이었다.

촬영이 끝났으면 돌아갈 법한데, 레비 올란도는 이왕 온 김에 휴가를 즐기다 가겠다며 남았다. 휴가를 즐길 거면 따로 놀러 다닐 것이지, 촬영장에 구경하러 와서 도현을 귀찮게 하고 있었다.

“대부분 내가 했지.”

“그럼 어렵진 않아요?”

“액션이라고 해도 주먹질하는 장면밖에 없어서 어렵진 않았어.”

주먹질하는 장면이 어렵진 않다니. 의아하던 도현은 레비의 과거 이력을 떠올리곤 납득했다. 그는 폭행 사건에도 여러 번 연루되어서 경찰서에 간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애초에 범죄 조직 출신이잖아.

물어볼 대상을 잘못 잡았다.

“왜. 액션이 어려워?”

“아니요. 지금 그런 건 아니고… 나중에 전투랑 전쟁 장면이 자주 나오잖아요. 그때를 대비해야 할 거 같아서요.”

“스턴트맨한테 안 맡기고?”

“너무 어려운 장면이라면 몰라도 웬만하면 제가 연기하고 싶거든요.”

“욕심이 있는 편이네.”

가볍게 말한 레비가 뜬금없는 주제를 꺼냈다.

“반지의 제왕에서 보로미르가 죽고 프로도가 배로 강을 건너려고 한 장면 혹시 알아?”

“네? 네.”

“거기서 샘이 같이 가려고 강물에 뛰어들었잖아. 그때 샘 역을 맡은 배우분이 크게 다쳤어. 강에 있던 유리 조각이 발바닥에서 발등까지 꿰뚫었거든.”

“…아프겠네요.”

“헬름 협곡 전투에서 아라곤 역을 맡은 분은 칼에 맞아 이가 부러졌어. 아, 그때 부러진 이를 들고선 접착제로 붙이고 다시 찍자고 했대. 스태프들이 말렸지만. 대단하지 않아? 나도 이빨 부러진 친구를 본 적 있는데, 걘 아파 죽으려 했거든.”

그 이빨 부러진 친구를 어디서 본 건지 좀 궁금했지만, 묻지 않기로 했다. 솔직히 본인이 부러트렸다는 대답이 돌아올까 봐 겁났다.

“아라곤은 촬영하면서 온갖 고통은 다 느껴봤을 거야. 오크 머리통 차다가 오열한 장면, 그때 발가락 두 개가 부러져서 진심으로 오열했던 거고… 물에 떠내려가는 장면을 찍다가 진짜 위험해진 적도 있어. 옷이랑 장비의 무게를 고려하지 못해서 진짜 가라앉아 버렸거든.”

“…그래서 액션은 하지 말라는 얘긴가요?”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한 시선이 맞닿았다. 레비는 제가 왜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열심히 해보라는 말이지.”

도현이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알겠어요.”

“그래? 도움이 됐어?”

“아니요. 레비한테 답이 없는 걸 알겠다고요.”

이 사람한테 정상적인 조언을 기대하면 안 되었던 거다. 제 실책을 깨달은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해.”

그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래 봤자 통하지 않았다. 그 짧은 사이에 이만큼이나 가차 없이 대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걸 레비가 해냈다.

눈매는 상처받은 척 늘어트렸으면서 입꼬리는 슬슬 올라간다. 말이 좀 심했나 싶었던 도현은 그에게서 관심을 꺼버렸다.

“액션 스쿨 알아볼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오스카가 물어왔다. 도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좀 더 생각해 보고요. 에드워드한테도 한번 물어본 다음에 정하게요.”

“그것도 좋겠네. 그럼 발레는 어쩌게? 그만둘 거야?”

“아니요. 그건 계속해야죠.”

“잘 생각했어. 아난다 달리아, 그 배우도 어렸을 때부터 발레랑 체조를 했는데 그게 액션 연기에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하더라고.”

도현도 그녀의 액션 연기를 본 적 있었다. 액션 연기 엄청 화려하던데. 직접 한 거였구나.

도현이 레비와 떠드는 사이 촬영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하퍼가 와이어에 매달렸다. 리허설을 하는 듯, 몇 번 와이어를 타고 떨어지는 걸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엔 좀 아등바등하더니 나중에는 폼이 나왔다.

토드 감독이 하퍼를 보며 빨리 익힌다며 감탄했다. 아무래도 하퍼는 뭐든 빨리 익히는 편 같았다. 아니면 오기 전에 배웠다던 패러글라이딩 덕분인가.

도현은 왠지 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뭔가 더….

“아.”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도현이 짧게 탄식했다. 그래, 그게 있었지.

“왜?”

“배울 게 생각나서요.”

“뭔데?”

“궁도요.”

오스카의 질문에 대답하며 도현은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언제쯤일까. 한국에 가서 배우면 될 거 같은데.

르옌 누바라는 무기를 다양하게 쓰는 편이긴 했지만… 가장 잘하는 건 활쏘기였다.

첫 번째 자격 증명 시험을 통과한 길잡이 후보들은 신성한 나무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일종의 학교처럼 정령에게 수업을 받는데 거기서 전투, 그중에서 활쏘기에 압도적인 재량을 보였다는 서술이 있었다.

할 게 많겠네.

발레도 배우고 궁술도 배우고 액션 연기도 배우고…. 그러면서 틈틈이 책도 읽고 꾸준히 바이올린 실력도 갈고닦고. 거기에다가 학교도 다니고 촬영도 하고. 할 게 산더미였다.

막막해야 정상일 텐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퍼의 추락 연기는 수월하게 끝이 났다. 토드 감독은 지시할 때마다 하퍼가 찰떡같이 알아듣자 상당히 신이 난 모양이었다.

‘넌 재능 있어’라며 추켜세우는 그에 하퍼가 씩 웃었다. 왜인지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도현! 네 차례야.”

“네!”

도현은 씩씩하게 세트장으로 향했다.

“와이어로 연결되어 있어서 무겁진 않을 거야. 그래도 혹시 다칠 수 있으니까 몇 번만 연습해보자. 일단 하는 것부터 봐봐.”

토드 감독의 말이 떨어지자 스태프들이 시범을 보였다. 와이어에 매달린 사람이 머리보다 조금 더 위쪽에서 떨어지자, 그대로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이 받아낸다.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였다.

“이렇게 받아도 하나도 안 무겁거든.”

와이어 길이를 정확하게 맞춰놨기 때문에, 받는 사람에게 부담이 가지 않는다는 설명이었다. 시범이 끝나고 도현이 손을 뻗었을 때의 길이를 재서 와이어 줄의 길이를 다시 맞추었다.

“이제 네가 한번 해보자.”

토드 감독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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