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03)화 (304/582)

제303화. 일상의 균형 (22)

헤레이즈는 속으로 생각했다.

‘은근히 닮았단 말이지.’

서로 껄끄러운 사이니, 퍼스널 스페이스를 완전히 침범하는 거리감과 보편적으로 ‘낭만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안기 자세를 하면 어색할 법도 한데.

“좋아, 리허설 더 해볼 필요 없겠는데?”

토드 감독이 신나 했다. 그는 어제부터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도현이 제 팔 위에 얹어진 이를 물끄러미 보다 물었다.

“팔 빼도 돼?”

“어차피 네가 받치고 있는 거 아니잖아.”

그러자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그들을 보던 헤레이즈는 가까운 거리감은 전혀 안중에도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이 참 비슷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나는 저렇게 못 할 거 같은데.’

헤레이즈는 한번 상황을 가정해 보았다가, 상상만 해도 불편해서 낯빛을 굳혔다. 으, 싫은 사람과 가까이 있는 것도 모자라 접촉하라니. 그 사람의 냄새가 옷에 밸 걸 생각하니 헛구역질이 났다.

“이번엔 촬영 들어가 보자. 루카, 어지럽거나 힘들면 말하고.”

“네!”

루카를 매단 와이어가 다시 감겼다. 도현은 그 아래에 멀뚱히 서 있었다. 헤레이즈는 좁혔던 미간을 풀었다.

내 일이라면 끔찍하지만, 남의 일이라면 재밌었다. 그의 청회색 눈이 흥미를 가득 담고 두 아이를 응시했다.

“그럼 촬영 들어갑니다.”

액션, 소리가 나고 정확히 일 초 후.

와이어가 내려갔다.

* * *

베이지에 가까운 거친 천으로 된 웃옷이 팔락였다. 수직 방향으로 이는 공기에 붉은 머리카락이 공중에서 흩날렸다. 

얼룩덜룩하게 물든 붉은빛에 먼저 시선이 빼앗겼던 검은 눈이 천천히 비껴나가, 이내 선명한 푸르름과 마주쳤다. 머리카락과 옷 모두 낡은 소녀가 가진 유일하게 깨끗한 색채였다.

공중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아주 짧은 찰나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토드는 그것을 클로즈업해 카메라에 놓치지 않고 담아냈다.

와이어로 속도를 조절한다지만 그래 봤자 겨우 0.7초 남짓.

그 시간을 도현은 참 알차게도 써먹었다. 토드가 눈썰미가 나빴더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만치.

냉담한 검은 눈동자 위로 붉은 실 자락이 보이고 그다음 푸른색과 겹쳐질 때. 하얀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복잡한 감상을 가져다줬다.

놀란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홀린 거 같기도 했다. 그건 무척이나 잠깐이어서, 이윽고 소년이 소녀를 받아냈을 땐 어딘가 못마땅한, 그러나 기본적으로 무표정한 낯으로 돌아와 있었다.

섬세하다.

그 단어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연기였다.

자연스럽게 구불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옅은 베이지색 옷 위에 흐트러지고, 저를 받친 소년의 검은 손목 장식 위로도 흘러내렸다. 마치 품 안에 태양이 떨어진 거 같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침묵했다. 그 모습이 마치 서로를 탐색하는 개와 고양이 같았다.

변화가 생긴 건, 언제까지고 가만히 있을 거 같던 소년이 몸을 굽히면서였다. 다리를 살짝 굽힌 소년이 소녀를 바닥에 부드럽게 내려주었다.

원작에서 종종 ‘우아하다’라고 표현될 만큼 르옌 누바라는 완벽한 예법을 구사하는 인물이었다. 가장 강대한 종족, 전대 길잡이의 후계자라는 위치에 있으면서 제멋대로 굴지 않고 예의를 지키는 것이 르옌을 좀 더 거리감이 느껴지는 신비스러운 인물로 만들었다.

낡은 가죽신이 푸른 잔디에 닿고, 이윽고 소녀가 온전히 제 두 발로 땅을 딛고 섰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세 걸음 정도. 아까와 다르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탐색의 시선이 오간다.

푸른 눈빛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소녀의 푸른 눈은 하늘이나 바다보다는 잘 세공된 보석을 닮아 있었다. 움직이지도, 흐르지도 않고 욕망을 위해 영원히 아름답게 박제된 것 따위를.

내 기척을 읽었나? 르옌은 기척을 숨기는 일에 탁월했다. 그렇다면 이 소녀가 그만큼 대단한 실력자라는 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르옌의 감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죽으려고 한 건가.

나뭇가지에서 추락하던 순간, 눈앞의 이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순종적일 정도로 순순하게 그 흐름에 몸을 맡겼다. 도현의 얼굴에 마땅찮은 기색이 짙어졌다. 그는 나약한 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끝내 나온 말은 그조차도 의외였다.

“…아까 그 노래. 뭐였지?”

소녀는 질문을 예상치 못했는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길게 흘러내렸다. 이내, 생각보다 더 낮고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들려주던 자장가야.”

인상적인 만남에 비해 퍽 평화롭고 단조롭기까지 한 대화였다. 그런가. 가볍게 대답한 소년이 잠깐 푸른 보석을 박아놓은 거 같은 눈을 응시하다가 더 볼일이 없다는 듯 뒤를 돌았다.

“그게 전부야?”

의외의 목소리가 걸음을 붙잡았다. 소년은 몸을 틀어 푸른 눈을 보다가 툭, 말했다.

“죽으려는 이에게 더 물을 건 없어.”

냉담할 정도로 무심한 대답이었다. 홀로 남은 소녀는 그 뒷모습이 숲에 가려져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멈추었다고 느낄 만큼, 미동 없이.

* * *

촬영이 끝났다.

추가적으로 필요한 장면이 생긴다면 후에 추가 촬영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은 끝이었다. 촬영 팀은 나름 긴 시간 함께했던 배우를 위한 송별회를 열고 있었다.

도현이 봤을 땐 그냥 송별회를 핑계로 먹고 마시고 싶은 게 분명했다. 미국인들은 좀 파티에 미친 편이었다.

파티를 가장 적극적으로 즐기는 건 오늘 밤의 또 다른 주인공, 루카 하퍼였다. 날씨가 흐린 탓에 도현의 촬영이 미뤄졌던 며칠간 촬영한 사람은 루카 하퍼였다. 어쩌다 보니 하퍼와 도현의 촬영이 동시에 끝이 난 상황이었다.

“자! 마셔라!”

데이먼이 껄껄 웃으며 잔을 쥐여 주었다. 말만 들으면 뭐 위스키라도 되는 거 같지만 안에 담긴 건 무알콜 칵테일이었다. 도현이 잔을 받아 들자 데이먼이 조금 짠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정말 고생 많았다.”

“다 데이먼 덕분이죠.”

“아니, 네가 한 거지. 난 솔직히 그 일이 생기고… 네가 하차한다고 할 줄 알았거든. 지금 생각하면 멍청한 걱정이었지만.”

“어떻게 얻은 배역인데 그만두겠어요.”

물론 쉽게 얻었어도 그만둘 일은 없었을 것이다. 도현은 그 말을 하는 대신 싱긋 웃었다.

“그래. 내가 아주 기가 막히게 뽑아줄게. 너를 욕하던 사람도 눈알이 제대로 박혀 있으면 절대로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히게!”

데이먼은 알코올이 들어가면 말투가 조금 거칠어지는 타입 같았다. 도현은 그와 말을 몇 번 주고받다가, 토드 감독에게 불려가는 그를 배웅해 주었다.

“오스카. 왜 안 먹고 있어요?”

“응? 아니야. 잘 먹고 있어.”

도현이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거, 걱정 있는 얼굴인데.

“뭐 문제 있어요?”

“문제는 무슨. 오늘같이 좋은 날 문제가 뭐 있겠어. 친구들이랑 칵테일이나 마셔. 물론 무알콜로.”

“말해 봐요. 뭐가 걱정인데요?”

통하지 않자 오스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냥… 분량이 생각보다 더 적어서.”

감독이 도현의 분량을 줄인 건 아니었다. 예정된 만큼 정확하게 찍었다. 그러니 저런 말을 하는 건 한 가지 이유뿐이었다.

는 전 세계 사람들이 벼르고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도현한테는 좀 부정적인 방향으로. 오스카는 그런 사람들을 설득하기에 분량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거겠지.

“오스카. 전 여전히 제 연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에요.”

“네 연기를 무시한 건 절대 아니야!”

“저도 그건 알아요.”

그의 상냥한 마음에서 기인한 걱정일 것이다.

“뭐… 오스카의 생각처럼 영화가 개봉해도 절 여전히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겠죠. 아무리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더라도 분량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분량조차 씹어 먹을 연기 실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도현이 말을 이었다.

“그래도 괜찮지 않아요? 전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도 더 잘할 거니까요. 결국엔 저 아닌 르옌은 상상할 수 없게 될 거예요.”

가정이 아닌 확신이었다. 도현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놀아요. 오스카도 고생 많았잖아요.”

“너어는….”

그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련이 철철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내가 한국에 따라가야….”

“여자 친구랑 내년에 결혼한다면서요?”

“맞다, 내 허니가 있었지….”

오스카는 재작년부터 만난 여자 친구와 슬슬 결혼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만약 결혼 계획이 없었다면 진짜로 도현에게 인생을 배팅하고 한국까지 따라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사랑에 굴복한 오스카가 안타까운 눈으로 도현을 응시할 때였다. 툭, 어깨를 치고 가는 이에 도현이 고개를 돌렸다.

“…헤레이즈?”

“어? 아닌데?”

“뭐가 아니야?”

“아 아서인데? 우더의 가장 단단한 가지! 가장 영예로운 전사!”

“헤레이즈 아이데?”

“아니라니까?”

“너 술 마셨어?”

도현의 물음에 오스카가 깜짝 놀라 헤레이즈를 보았다. 자세히 보니 평소보다 뺨이 상기되어 있을뿐더러, 눈도 풀려 있었다.

“응? 아니?”

“뭐 마신 거야?”

“차…?”

술 냄새가 많이 안 나는 걸 보니 독한 걸 마신 건 아닌 거 같았다. 헤레이즈가 일부러 마셨을 리는 없고….

“네가 마신 거야?”

“아니?”

누가 줬나 보군.

도현은 의심스러운 사람을 추려보았다. 사실 추릴 것도 없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사람은 누가 봐도 호시탐탐 위스키를 노리고 있는 저 붉은 머리 소녀였다.

“근데 너 왜 나한테 말 걸어?”

“뭐?”

“너 누바라잖아. 싸가지 없는 새끼.”

헤레이즈의 주사는 역할 과몰입인가 보다. 도현과 오스카가 시선을 교환했다. 이걸 어떡하지.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저기, 헤레이즈.”

“아… 오지 마. 냄새나.”

오스카가 상처받았다. 솔직해지는 부작용도 있는 거 같았다. 도현이 오스카의 팔을 토닥였다.

“술 냄새 말하는 걸 거예요.”

“그래… 고맙다.”

힘없이 대답하던 오스카가 몇 초 후 슬그머니 물었다.

“근데 나 정말 냄새나니?”

아무래도 헤레이즈는 은근히 소심한 오스카에게 씻을 수 없는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도현이 아니라고 위로하려는데-실제로 오스카는 청결한 편에 속했다- 터프한 손길이 도현의 멱살을 잡고 끌었다.

“여긴 냄새가 너무 지독해. 그리고 시끄러워.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근데 왜 내 멱살을 잡고….”

“조용!”

도현은 열 살짜리 주정뱅이한테 난생처음으로 멱살을 잡혀 끌려가야 했다. 어이없기도 하고 웃기기도 해서 체념한 채 따라가는데, 넉살 좋게 어른들 사이에 껴서 놀고 있는 루카 하퍼와 눈이 마주쳤다. 반사적으로 서로 눈을 찡그렸다.

뭘, 봐.

시비조가 다분한 입 모양이었다. 도현은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자기가 일 벌여놓고 ‘뭘 봐’라니? 뉴질랜드 올 때 양심을 비행기에 분실한 걸까.

경멸 어린 눈빛을 보내자 하퍼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도현이 다시 어처구니없어졌다.

얘들아, 너네 왜 얼굴로 대화하는 거니. 그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하퍼의 매니저가 떨떠름히 생각했다. 쟤네 사실 친한 거 아니야? 하퍼가 들었다면 분개했을 생각이었다.

“얘 술 마신 거야?”

“아… 레비.”

“줘. 내가 방에 데려다 놓을게.”

그러더니 헤레이즈를 번쩍 들었다. 헤레이즈가 반항하는 걸 가볍게 제압한다. 이제 보니 저만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냥 드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았다. 취향 참 독특했다.

도현은 레비와 함께 헤레이즈의 숙소로 향했다. 도중에 헤레이즈의 매니저가 헐레벌떡 달려왔지만, 이미 그는 취한 상태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레비가 잘 데려다 놓기로 했다.

서늘한 밤공기를 느끼며 도현이 물었다.

“레비는 계속 촬영지에 있을 거예요?”

“이제 볼 거 다 봤으니까 놀러 다녀야지. 말했잖아. 휴가라고.”

“그 볼 게 저인가요?”

“맞아. …기분 안 나빠하네?”

“나쁠 게 뭐가 있겠어요?”

실력 좋은 배우가 제 촬영에 관심을 가졌다는데 좋은 거 아닌가. 그보단 레비가 정상적인 사고를 했다는 게 더 신기했다. 레비와 도현은 서로를 신기한 것 쳐다보듯이 보았다.

다음 날.

도현은 하퍼와 함께 숙소를 나왔다. 배웅하러 나온 헤레이즈는 평소보다 얼굴이 흙빛이었다. 도현이 괜찮으냐고 묻자 헤레이즈가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안 괜찮아. 신시아 너 진짜….”

“…신시아?”

“으음, 미안. 난 허브차인 줄 알았어.”

신시아가 맹하게 대답했다.

“그게 어딜 봐서 허브차야!”

“하지만 이끼랑 맛이 비슷했는걸. 그래도 그거 알코올 1%밖에 안 되던데….”

신시아가 조금 모자란 것을 보는 눈으로 헤레이즈를 응시했다. 그 눈에 떠오른 진심 어린 안쓰러움에 헤레이즈가 펄펄 뛰었다. 도현은 당혹스럽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어제 사건의 범인이 하퍼가 아니고 신시아라고? 그 당혹스러운 낯을 보던 하퍼의 눈이 샐쭉 가늘어졌다.

어제 노려본 게, 그럼….

도현이 그 시선을 외면하자, 흰 얼굴 위로 비웃음이 떠올랐다. 도현은 민망해졌다. 애꿎은 사람을 의심하고 비난한 거 아닌가. 물론 눈빛으로만 했지만, 어쨌든.

그러나 잠시 후.

공항으로 향하는 차에 탄 도현은 더는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 촬영 끝나서 내일 돌아가.]

어제 도현이 친구들에게 남겨놨던 메시지 아래로.

부재중 전화 4건.

그 밑으로 무언가 망설인 듯, 20분 후에 보낸 것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목적어가 빠진 문자에 도현은 미궁에 빠졌다. 대체 뭐지? 한참을 고민해 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도현은 일단 문자를 보내두었다.

“도현, 벨트 매야 해. 핸드폰도 끄고.”

“네. 잠시만요.”

집에 도착하면 니콜라스한테 전화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답장이 돌아오지 않은 핸드폰을 껐다.

(다음 편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