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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304)화 (305/582)

제304화. 일상의 균형 (23)

공항에 내리자 그를 마중 나온 서혜나가 보였다.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도현아!”

서혜나가 도현을 끌어안았다. 도현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마주 안아주었다. 그녀는 도현의 얼굴을 붙잡고 이곳저곳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격한 반응에 도현은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한 달 만에 보니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하나 그걸 티내고 싶진 않아 웃음을 띠었다.

본래 부모님은 도현의 촬영에 따라오려고 했다. 그걸 만류한 건 도현이었다. 이미 그 때문에 샌디에이고에 거주 중인데 이번엔 뉴질랜드까지 따라오라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럴 때 동행하기 위해 옆에 있는 사람이 오스카 아니냐고, 앞으로 촬영이 있을 때마다 회사를 빠지고 따라다닐 순 없지 않냐고 몇 날 며칠을 설득한 끝에 간신히 그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었다.

“많이 피곤하지? 일단 집으로 가자. 오스카, 오스카도 고생 많았을 텐데 이만 쉬어요.”

경치 좋은 곳에서 느긋하게 잘 놀다 온 오스카가 어색히 웃었다. 오스카는 두 사람과 동행하지 않고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철컥.

오랜만에 서혜나의 차에 탄 도현은 짐을 트렁크에 넣어두고 운전석에 올라타는 그녀를 보았다.

“집 가면 저녁부터 먹자. 그리고 푹 쉬는 거야.”

그 말에 도현은 갈등 어린 얼굴을 했다.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침대에 머리가 닿으면 그대로 기절할걸. 비행기에서 수면을 취했어도 그 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무리하지 않았다고 생각했건만. 나름대로 뉴질랜드에서의 일정이 부담 되긴 했던 거 같았다.

하지만.

고민하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저, 집에 가기 전에 다른 곳에 들러도 될까요?”

“다른 곳이라니?”

“니키 집이요.”

“니키?”

‘갑자기?’라는 의문이 담긴 목소리였다. 도현도 이게 좀 이상하단 건 알았다. 한 달 만에 귀국해서 곧장 가는 게 친구 집이라니. 근데 신경 쓰여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비행기 안에서 도현은 차근차근, 지난날의 조각을 주워 담았다.

뉴질랜드에 간 이후,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뜸해지던 니콜라스. 그저 귀찮아서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그리 가볍게 넘기면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그다음에 떠오른 건 몇 달 사이 변했던 니콜라스의 태도였다. 하나하나 따로 두고 봤을 땐 그리 이상할 거 없던 것들이 모아두고 보니 확실히 이상했다.

별일 아니라면 좋겠지만.

“오늘은 쉬고 내일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니요. 니콜라스를 봐야 할 거 같아요.”

서혜나는 조금 곤란한 표정을 하다가 이내 알겠다고 말했다. 도현은 아직도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보다가 니콜라스에게 문자를 남겼다.

[나 도착했어. 지금 네 집에 가는 중이야.]

그러자 삼 분 만에 전화가 걸려왔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뭐가?”

- 내 집에 오고 있다며!

“말 그대로지. 집에 누구 계셔?”

- 아니, 나르샤랑 나밖에 없는… 이게 아니지. 왜 갑자기 말도 없이 오는 거야!

니콜라스의 반응을 가볍게 흘려 넘긴 도현이 생각했다. 이렇게 바로 연락이 온 걸 보면, 지난 문자는 의도적으로 무시한 게 맞았던 거 같았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지.

“가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릴 거야.”

- 오라고 안 했거든!

“응. 이따가 보자.”

- 아니, 너….

무어라 더 말을 듣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옆 좌석에서 서혜나가 황당한 눈으로 보는 게 느껴졌다. 도현은 당황스러워하는 그녀를 위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가끔 이렇게 고집을 부리는 편이 낫더라고요.”

한두 번 해보니 솔직히 편해서 계속 쓰게 된다는 단점이 있긴 했다.

“어… 그렇구나.”

얘가 뉴질랜드에서 대체 뭘 하고 온 거지. 당황스러움이 전혀 덜어지지 않은 서혜나가 어색히 대답했다.

지잉-

징-

[니콜라스 가비 : 너 마음대로 전화 끊을래?]

[니콜라스 가비 : 근데 진짜로 올 거야?]

도현이 답장을 보냈다.

[응. 이따 보자.]

그러자 오 분 정도 후에 대답이 돌아왔다.

[니콜라스 가비 : 그럼 우리 집 말고]

[니콜라스 가비 : 너네 집으로 가자]

[니콜라스 가비 : 나 오늘 네 집에서 자고 갈래]

“엄마.”

“응?”

“오늘 니키가 집에서 자고 가도 돼요?”

“엄마는 괜찮지. 니키 집에서 안 놀고 우리 집에서 놀려고?”

“네. 그럴 거 같아요.”

“그럼 니콜라스 데리러 갔다가 집에 가면 되겠네.”

[그렇게 하자.]

[그럼 두 시간 후에 문 앞으로 갈게.]

그러다 문득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물어보았다.

[근데 부모님 허락은 받은 거지?]

[니콜라스 가비 : 나르샤한테 말했어]

나르샤한테 말한 거면 된 거지. 마음에 걸리는 것도 해결되자 도현은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조금 피곤하긴 했다. 도현이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어 조용한 숨소리를 내뱉자, 그런 도현을 흘끗거리던 서혜나가 음악 볼륨을 줄였다.

* * *

“부모님 이혼한대.”

멈칫.

니콜라스를 픽업해서 데려오고, 막 이 층에 올라와 방에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한 달 만에 방에 발을 디디기 무섭게 니콜라스가 폭탄을 떨어트렸다. 도현의 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침착하게 두어 걸음 더 들어간 도현이 니콜라스가 방 안에 들어온 걸 확인하고 방문을 닫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지옥 같은 침묵이 깔렸다.

니콜라스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기 때문에, 그의 갈색빛 고수머리가 이마부터 눈까지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입매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도현은 잠시 창문을 내다보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땐 그나마 초저녁이었는데, 어느새 밤이 깊어 있었다.

“저녁 안 먹었지?”

“…응.”

“일단 내가 아래서 먹을 것 좀 가져올게. 편하게 있어.”

조심스럽게 방을 나서서 문을 닫았다. 복도에 선 도현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부모님이 이혼하신다고.

아. 조각조각 떨어져 있던 것들이 단숨에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이윽고 완성된 퍼즐은 왜 몰랐을까 싶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애정을 갈구하던 니콜라스. 나르샤의 남자 친구를 싫어하던 니콜라스. 여행 내내 예민해 보이던 니콜라스. 그리고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지던 앰버와 앤토니 씨.

그가 힘들 때 같이 있어주지도 못하고 알아주지도 못했단 사실에 심장에 추라도 달린 것처럼 무거웠다.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도현은 알았다. 이보다 조각들이 더 많이 모였더라도 자신은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다. 조각을 모아 그림을 만드는 건, 그 그림을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니까.

도현은 아니었다. 그는 서혜나와 이장혁이 이혼을 한다고 해도 불안하거나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 안타까울 순 있더라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할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알아낼 수 없던 일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반응이, 어떤 대처가 적절한 거지. 도현에게는 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주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독 느릿했다.

“응? 뭐 필요한 거 있니?”

“저 저녁은 방에서 먹을게요.”

“…어?”

“죄송해요. 니콜라스랑 둘이 해야 할 말이 있어서요.”

“어… 아니, 아니야. 그럴 수 있지. 괜찮아. 그럼 이거 담아줄까?”

표정을 빠르게 수습한 서혜나가 말했다. 도현은 니콜라스에게 주의가 쏠려 있는 탓에 그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서운함을 잡아내지 못했다.

“가져가서 먹을 거면 이것보단 간단한 게 낫겠다. 잠시만. 과일도 좀 썰어야지.”

서혜나는 분주하게 움직여 음식을 이것저것 담아주었다. 본래 준비했던 건 한식 같은데 담긴 건 보다 집어 먹기 편한 종류였다. 도현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기다려봐. 엄마가 가져다줄게.”

“제가 가져갈게요. 그리고 부탁드릴 게 있는데….”

도현은 망설이다가 결국 말을 뱉었다.

“오늘만 이 층에 올라오지 말아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서혜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내다가, 이내 필요한 거 있으면 내려와서 말하라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그런 서혜나의 얼굴을 잠깐 응시했다. 만약 두 분이 이혼하신다면…. 한번 상상해 보았지만, 역시 자신의 반응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대신 도현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공감할 수 없다면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면 될 일이었다. 도현도 경험한 적 있었다. 부모님의 불화를 겪은 어린아이의 심정을.

<불량경찰>의 송하가 가출한 이유였으니까.

도현은 그때의 기분을 되살렸다.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 가며 니콜라스의 기분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방에 가까워졌다.

방으로 돌아오니 니콜라스가 보이지 않았다. 도현은 방 내부를 살피다가 침대 위의 이불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 다락방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역시나. 카펫 위에 돌돌 말린 이불이 있었다.

쟁반은 한쪽에 잘 두고 니콜라스의 옆에 가서 앉았다. 이불 뭉치가 살짝 들썩였다.

“…여행 때랑 반대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꺼낸 말이 겨우 이거였다. 도현은 자신이 위로에 끔찍하게 재능이 없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언제 알았어?”

“옛날부터.”

“그랬구나….”

다시 정적.

“진은 알아?”

“걘 몰라.”

송하는 이럴 때 무슨 말을 원했을지 생각하는 건, 오히려 악수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송하를 기쁘게 만들 수 있는 건 문제의 원인인 부모님밖에 없었으니까. 도현은 그만 길을 잃어버린 기분에 손을 말아 쥐었다.

그때, 니콜라스가 벌떡 일어나 이불을 치웠다. 두 눈은 그새 운 것인지 벌게져 있었다.

“원래 너한테도 말 안 하려고 했어.”

노려보는 눈과 다르게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렸다.

“너는, 너는 모르잖아! 이게 어떤 기분인지. 너도 그렇고, 걔도 그렇고. 너네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까 이런 건 모르잖아.”

아. 도현은 지금껏 니콜라스가 그들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다르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들에게 난 이해받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이게 얼마나 용기 낸 일인지도 알 거 같았다. 도현도 그랬으니까.

“나는 옛날부터 그랬어. 솔직히 확실히 안 건 몇 달 안 됐는데, 사실, 어릴 때부터 어느 정도 알았던 거 같아. 아냐. 알았어. 너는 이런 기분 모르겠지.”

원망처럼 쏟아진 마지막 말에 도현은 니콜라스란 한 명의 사람을 그제야 제대로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평소의 장난스러움도 약간의 허세도, 유치한 면모도 모두 걷힌 니콜라스는 그저 길을 잃은 어린애였다. 어른스러워 보여도 그저 겁이 많았을 뿐인 송하처럼.

그렇구나. 도현은 서서히 그를 이해해갔다.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아이에게 부모님은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니콜라스는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세계에서 무력하게 겁에 질려 있던 것이다.

도현 또한 세계가 부서져 본 적이 있어서 알았다. 나를 감싼 안온한 알을 부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게 얼마나 두렵고 아픈 일인지 겪어봐서 알았다. 그리고 지금, 니콜라스는 그 과정에 서 있다.

이번 일이 지나고 나면 니콜라스 또한 바뀌게 될까. 도현이 바뀌었던 것처럼, 그렇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도현은 니콜라스의 손을 잡았다.

엄마 아빠가 너무 미워. 진짜 싫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나르샤도 마음에 안 들어. 너도 마찬가지야. 다 싫어. 다 마음에 안 든다고. 두서없이 말을 내뱉는 니콜라스를 보던 도현은 생각했다.

내가 알을 깨는 순간 내 옆에 있어준 건 너였다. 그러니까 나 또한 네가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게 공정할 것이다.

도현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마음속에 꽁꽁 묶어두었던 과거를 꺼내었다.

“나는 뭐든 공평한 게 좋아. 한쪽만 손해 보는 건 좋아하지 않거든. 그러니까 말하는 거야. 이편이 공평하니까.”

난데없는 말에 에메랄드색의 눈동자가 도현에게 와 닿았다.

“네 말이 맞아. 나는 그런 거 몰라.”

말하리라고, 그것도 친구에게 말하리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그러나 도현은 생각보다 덤덤하게 말을 뱉어냈다.

“나는 부모님이 이혼해도 너처럼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솔직히 좋은 친구는 아닌 거 같았다. 이로써 네가 내게 동질감을 느끼고, 나를 더 특별히 느꼈으면 싶으니까. 조금 변명하자면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달라진 게 별로 없는 걸지도 몰라. 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거든. 그들도, 나도 노력하는데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네 외로움을 덜어주고 싶었다. 혼자 남은 기분은 너무 끔찍하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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