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05)화 (306/582)

제305화. 일상의 균형 (24)

니콜라스는 나르샤를 따라 옛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렸을 때였음에도 그 주인공은 유독 인상에 깊게 남았다.

칙칙한 흑백 화면 속, 비 내리는 거리, 지치고 피로한 낯의 주인공. 나르샤는 니콜라스를 끌어안으며 저 사람은 지금 슬퍼하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간혹 도현을 볼 때마다 니콜라스는 그 주인공이 떠올랐다. 흑백 화면과 축축한 비, 지친 얼굴 같은 게. 그걸 눅눅하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나중에. 언젠가 오랜 기간 병을 앓았다는 걸 들었을 때 니콜라스는 자연히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해했다. 그래서였구나.

물속에 오래 있다 보면 그 비린내가 몸에 배어난다. 그의 친구는 너무 이른 나이부터 아파서 슬픔이 몸에 밴 것이다.

그제야 수수께끼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어. 앞으로는 눅눅해지지 않게 잘 관리해야지. 속으로 다짐하기도 했다.

“나는 부모님이 이혼해도 너처럼 슬퍼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그의 친구는 네가 알던 건 다 틀렸다는 듯이, 또다시 어려워진다.

* * *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다. 벌겋게 달아올랐던 눈이 살짝 커진 채로 내 쪽을 향했다. 그게 꼭 토끼 같아서 약간 웃음이 났다.

“도리토스?”

때아닌 웃음을 짓는 그에 소년이 별명을 입에 담았다. 도현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입을 열었다. 웃으며 말하기엔 적절치 않은 내용이니까.

“…병원에 있을 때.”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좋을지 생각하다 보니 뒷말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부모님은 일 년에 두세 번 정도 나를 보러 왔어.”

덮어둔 기억을 꺼내느라 눈매가 좁혀진다. 다 흘려보낸 줄 알았는데 과거를 들춘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기억이 펼쳐졌다. 한순간도 바랜 적 없다는 듯이 선명한 화질로.

“부모님이 오는 날이 정해지면 난 한 달 전부터 매일같이 창밖을 내다봤어. 혹시 내가 보고 싶어서 며칠 더 빨리 올까 봐. 하루하루 지나가는 게 너무 더뎌서 달력을 몇 번이고 들췄어.”

병을 앓아서 오랜 기간 입원했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당연히 부모님이 옆에 있었을 줄 알았다. 니콜라스가 봐온 부부는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할뿐더러 헌신적이기까지 했으니까.

상상한 적 없는 이야기에 니콜라스의 눈이 흔들렸다.

“기다릴 땐 그랬어. 만나면 나를 안아 주시겠지? 보고 싶었다고 할지도 몰라. 어쩌면 나를 한국에 데려가려고 할 수도 있어.”

남의 이야기처럼 감흥 없이 말을 늘어놓던 도현이 말했다.

“실망할 걸 알면서도 매번 기대했던 거 같아. 그게 반복되고 반복되다가, 바라는 게 점점 작아지고,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어질 때까지.”

아. 말을 하고 나니 알 거 같았다.

도현이 부모님을 사랑할 수 없는 건 그들을 여전히 원망하고,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을 사랑했던 마음이 풍화되어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알알이 흩어진 모래를 다시 모아 바위로 만드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언젠가 다시 바다로 흘러가 굳어지고 암석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오랜 시간 그저 모래 알갱이로 남아 있을 수도 있듯이.

어쩌면 난 지쳐 있었던 걸까?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해가 안 가. 분명히 넌 부모님이랑 사이좋았잖아?”

혼란이 담긴 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지금은 날 많이 아끼시거든.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니야.”

설명하기엔 너무 복잡한 일이었다. 도현은 이것저것 늘어놓는 대신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나도 아직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했어. 그러니까 너도….”

“제대로 말해.”

“…어?”

니콜라스의 단호한 목소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되물으며 니콜라스를 보았다. 그의 눈빛이 유난히 깊어 보였다.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다 말하라고.”

“…니키?”

당혹스러운 시선이 그에게 향한다. 니콜라는 그 시선에도 봐줄 생각이 없다는 듯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넌 항상 그래. 네 얘기는 잘 안 하지. 뭘 하자고 해도 네 주장은 하나도 없이 다 좋다고만 하고. 그래서 네가 정말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진처럼 똑똑하지 않아서, 네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단 말이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터져 나왔다. 도현은 얼빠진 표정으로 니콜라스가 쏟아내는 말을 들었다.

“대체 왜 맨날 네 얘기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구는 건데? 아니면 너도 엄마 아빠처럼 나한테는 말해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화들짝 놀라 부정하자 니콜라스가 팔짱을 낀다. 두 눈이 단호한 빛을 냈다.

“그럼 다 말해. 네 말대로 그게 공평하잖아.”

그 말을 이렇게 써먹을 줄은. 도현은 조금은 떨떠름한 기분으로 그를 보다가 달래듯이 말했다.

“믿기 어려울 거야.”

“네가 나한테 거짓말을 하겠냐?”

그러나 소년은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니콜라스가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비웃었다.

“네가? 나한테?”

기도 안 찬다는 말투에 도현은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숨길지언정 거짓말은 안 하는 편이긴 한데. 믿음에 감동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참 모호했다.

도현은 한참을 고민했다.

말하기 싫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걸 어디까지 설명할 수 있느냐의 문제였다.

검은 시선이 어린 낯으로 향한다. 처음 만났을 때보단 젖살이 많이 빠졌지만, 여전히 앳되었다. 도현은 그의 친구가 많은 걸 알게 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다.

사실 공평하단 건 거짓말이다. 애초에 존재의 무게가 달랐다. 결코 공평해질 수 없는 사이였다. 도현은 니콜라스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게 결코 자신이 품은 것만큼 무겁진 않다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든든한 울타리에서 안전하게 있다고 생각한 니콜라스는 사실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울타리를 붙잡고 바람을 막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와 나는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가 좀 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까?

너는 내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도현은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천칭처럼 아래위로 흔들리는 문장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믿기 어려우면 믿지 않아도 좋아.”

그게 긴 이야기의 서두였다.

* * *

니콜라스는 조곤조곤 흘러나오는 말들에 몇 번이고 멈춰 세우고 다시 물어봐야 했다. 간병인이 너를 감당할 수 없어서 매번 한 달 만에 그만뒀다고? 널 왜 감당할 수 없는데? 말 상대가 담당의밖에 없었다고? 다른 또래는? 너를 싫어했다고? 너를 왜?

대체 왜?

의문의 향연이었다.

도현의 말속의 서혜나와 이장혁 부부는 니콜라스가 아는 것과 전혀 달랐다. 그들은 피가 얼음으로 된 것처럼 냉담했다. 그 냉담한 태도로 몇 번이나 외로운 아이를 난도질했다.

어느 순간부터 니콜라스는 도현의 말에 끼어들어 왜냐고 묻지 않았다.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으려다가도, 도현을 볼 때면 다시 입을 닫았다.

이야기는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과거로 갔다가 조금 더 현재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과거로 갔다. 가끔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긴 정적이 자리할 때도 있었다.

니콜라스는 어째서 도현이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왜 ‘믿기 어려우면 믿지 않아도 좋아’라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는지 이해했다.

도현이 꺼내는 말은 그냥 질 나쁜 거짓말이나, 어떤 소설 주인공이 겪은 슬픈 과거사 같았다. 어찌 되었든 니콜라스의 현실에 등장할 거 같은 내용은 아니었다.

진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니콜라스가 아는 진은 아주 영악한 친구였다. 진은 도현을 아주 좋아하지만, 동시에 사리 분별이 뚜렷했다. 아마 이해하는 척 도현을 안아주고 속으로는 그의 말의 진위 여부를 끊임없이 저울대에 올렸을 것이다.

얼마나 도현을 믿는지와는 상관없었다. 그냥 진이 타고난 성향이었다.

그러면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모두가 그를 싫어했는데 그게 그의 병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병이 낫고 나자 부모님도 과거의 일들을 후회하고 지금의 관계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누구나 화자가 피해망상 환자라고 여길 터였다.

도현이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뜸을 들였다. 이내 몇 번이고 반복한 문장을 다시금 중얼거렸다. 믿기 어려우면 믿지 마.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돼. 조금은 어색한 미소가 얼굴 위에 올라온다.

니콜라스는 도현이 이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자신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은, 다른 사람은 그를 정신 병원에 데려가고 싶어 하겠지만 난 도저히 그가 내게 거짓말을 할 거 같지 않아서.

“믿기 어려워.”

검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눈을 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발견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엄마 아빠랑 그런 사이로 지내는 거야?”

넌 화도 안 나냐? 진심 어린 몰이해가 그를 향했다. 도현은 잠깐 얼떨떨한 표정을 하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그가 대답을 꺼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느 순간 도현이 고개를 떨궜다. 우는 건가, 싶어서 어깨를 짚으려는 순간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시금 고개를 든 도현은 얼굴에 웃음기를 띠고 있었다.

“그러게.”

그리고 내뱉는 말이 저거다.

“너 진짜 멍청이야?”

어이가 없어져서 물었는데 도현은 실실 웃기만 했다. 니콜라스는 그가 다 속이 터지고 분해서 도현에게 타박을 늘어놓았다. 처음으로 잔소리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바뀐 순간이었다.

그날 밤.

니콜라스와 도현은 다락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제는 다양하게 튀었다.

부모님이 이혼 서류에 언제 지장을 찍으러 갈 예정인지. 그걸 처음 알게 된 게 언제였는지. 그런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병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퇴원하고 처음 친구를 사귀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같은 것들. 공통분모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주제는 통통 튀었다.

그래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밤이 깊어지고 새벽달이 떠오를 때까지 다락방에서는 말소리가 들리다가 어느 순간 조용한 숨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 * *

“야, 도리토스! 나가자!”

“나 도서부 활동하러 가야 해.”

“또? 어제도 그랬잖아!”

“촬영 때문에 많이 빠져서 이번 주 점심은 다 클럽 활동이야.”

“그런 거 그냥 그만두면 안 돼?”

“야. 니가 뭔데 우리 에이스를 뺏어 가려고 해?”

같이 도서관에 가려고 반에 찾아왔던 헤더가 눈을 뾰족하게 세우며 말했다. 니콜라스가 불퉁한 얼굴로 툴툴대다가, 재촉하는 친구들에 공을 가지고 나갔다.

도현은 친구들과 어울려 운동장으로 향하는 니콜라스의 뒷모습을 보다가, 팔짱을 끼는 헤더에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며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가자 사서 선생님과 도서관 단골들이 그를 반겨주었다. 달라진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니콜라스에게는 세계가 부서질 만한 커다란 일이 일어나고, 도현의 오래된 비밀은 비밀이 아니게 되었는데도 일상은 여전했다.

두 사람도 여전히 친구였다. 장난도 치고 시비도 걸고 그러다가도 웃고 떠들며 노는.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도현은 니콜라스가 어딘가 성숙해졌음을 느꼈다. 평소처럼 웃고 떠들어도 예전의 마냥 해맑고 천진하던 느낌과는 달랐다.

눈을 떠보니 훌쩍 커버린 느낌이라 못내 아쉽다가도 단단한 유대가 얽힌 눈빛을 보자 이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주일 뒤. 앰버 씨와 앤토니 씨는 이혼 절차를 밟았다.

그날 저녁. 니콜라스는 도현을 찾아와서 한 가지 소식을 전했다. 엄마를 따라 뉴욕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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