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06)화 (307/582)

제306화. 일상의 균형 (25)

시원한 손끝이 이마를 매만진다.

바람결에 흘러 들어오는 새소리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가만히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고 있다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는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다른 손으로는 책을 읽고 있던 이가 시선을 내렸다.

검은 시선을 마주한 진이 부러 눈가를 찡그렸다. 너무 눈부셔. 그러자 제가 읽고 있던 책을 눈 위에 덮어준다. 이제 좀 나아? 응.

진은 책 아래서 눈을 깜빡였다. 속눈썹이 종이에 쓸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읽을 것이 없을 텐데도, 소년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진은 손가락으로 책을 살짝 들어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니콜라스의 이사 준비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진행되었다. 바다가 자연스럽게 흐르는 것처럼. 그만큼 니콜라스는 무척이나 평온해 보였다.

그는 이별을 요란하게 대하지 않았다. 한낮의 하늘 아래서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웃으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공을 치고 나아가다가 다비드와 어깨를 부딪쳤는지 서로를 노려본다.

또 저러지. 반사적으로 생각한 진이 이번엔 눈을 도르륵 굴려 무릎베개를 해준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멍하니 흔들리는 나무를 응시하던 도현이 시선을 느꼈는지 소녀를 바라봤다.

흰 얼굴은 아주 잔잔한 음악 같다. 진은 문득 제 가장 친한 친구들이 낯설다고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변화는 너무 갑작스럽고 불시에 일어나서 시기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의 가정사를 저보다 도현이 먼저 알았을 거란 사실 말이다.

왜 나는 알려주지 않았어?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물음을 꿀꺽 삼켰다. 언제까지나 완벽한 삼각형일 줄 알았는데. 변의 길이가 같던 삼각형이 갑자기 들쭉날쭉하게 변해버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진은 둘 중 누구에게도 그 기분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건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다.

지니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 사귄 친구는 니콜라스였다. 그리고 짧은 시간 만에 운명같이 친해진 친구는 도현이었다. 진에게는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소중한 이들이었다.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건 없는 걸까? 진은 여전히 몇 년 전, 이곳에서 셋이 노닥거리던 그 시점에 머물러 있었다.

이 또한 커가는 과정인 걸까? 알 수 없었다. 책을 도현에게 돌려주고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있자니 멀리서 달려오는 사람이 보였다.

“진!”

상기된 얼굴로 활짝 웃는다.

“봤어? 내가 이겼어!”

진은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기대감이 가득 담긴 눈을 반짝거린다. 어느새 5년 가까이 흘렀다. 이전의 모습은 거의 잊어갈 정도로 훌쩍 컸는데 눈빛만은 여전했다.

어쩌면 내가 아직 덜 컸는지도 모른다. 모든 건 변화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진은 변하는 것보다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다. 진이 사랑하는 건, 그곳에 오랫동안 있을 무언가를 끊임없이 보는 것이었다.

역시 서운하다.

어른스럽게 이해해보려고 해도 섭섭한 심정이 안 들 수는 없었다. 진의 금갈색 눈동자가 조금 퉁명스러운 기운을 담아 옆에 앉은 소년을 흘겨보았다.

그래도 진은 그들을 탓하진 않을 것이다.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로 두 사람이 슬픔을 좀 더 의연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건 기쁜 일이니까. 이러나저러나 진 레이시는 제 친구들을 끔찍하게 아꼈다.

어쩌면….

진이 더운데 왜 여기로 나와 있냐고, 나무 아래로 가는 편이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다비드를 보았다.

어쩌면 섭섭할지언정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건, 그녀의 마음이 쉬어갈 수 있는 나무가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땀 냄새 난다고 그를 타박했다.

도현은 다비드와 대화하는 진을 보다가 손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읽고 있었던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인생은 아이의 상태에서 서서히,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남자가 되는 것처럼 그러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아이에게서 놀랍게도 완성되고 성숙한 인간의 면모가 나타난다. 그러한 면모는 서로 들어맞지도 조직적이지도 않으며, 아이의 내면에서 연관성이나 논리성 없이 상충 되어 거의 광기처럼 나타난다.

다행히도 우리 어른들은 이 상태를 사려 깊게 관조하는 데 익숙하며, 인생을 대단히 심각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소년들에게는 그 시기는 지나가는 것이라며 위안을 준다.1)

우리도 그런 걸까?

* * *

친한 친구가 멀리 이사를 가도 하루는 어김없이 흘러갔다.

“어디 가?”

“…아.”

헤더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길게 트인 복도를 보는 눈이 조금 당황에 물들었다. 왜 이 길로 들어왔지.

“아니야. 잠깐 다른 생각 하느라.”

“그래? 네가 바보 같은 짓을 할 때도 다 있네.”

헤더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한다. 도현은 헤더를 따라 본래의 궤도를 걸으며 아까 보았던 복도가 학교 내 수영장으로 통하는 길이었단 걸 생각해냈다.

니콜라스가 전학 간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클럽 활동을 마치고 그를 데리러 갔던 습관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이상한 기분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니콜라스는 이사 소식을 알린 날로부터 정확히 오 일 뒤. 뉴욕으로 떠났다.

이별은 딱히 요란하지 않았다. 울 줄 알았던 니콜라스는 씩씩했고 인정이 빠를 것 같았던 진은 오히려 펑펑 울었다. 도현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비현실적인데 지극히 현실감이 느껴졌다.

차에 짐을 싣던 니콜라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날따라 유독 초록빛이 선명해 보였다. 도현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연락할게’라고 말했다.

그렇게 니콜라스는 떠났다.

어차피 뉴욕이라고 해도 같은 땅덩어리 안이다. 조금 번거롭긴 해도 날 잡으면 놀러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예전에 비해선 자주 만나지 못하겠지만, 촬영 때를 생각해 본다면 비슷할지도 몰랐다.

그러니 별일은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틀렸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낯선 곳에 혼자인 것과 익숙한 곳에 혼자인 것. 그건 하나로 묶일 수 없는 감정이었다.

다소 복잡해진 눈이 창가를 향한다.

퇴원 이후로 언제나 떠나는 건 내 쪽이었다. 촬영도 한국도. 다 도현이 어디론가 가는 거였다. 니콜라스랑 멀어져도 그건 도현이 한국에 가기로 선택했기 때문이지, 니콜라스의 부모님이 갈라서기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 먼저 곁을 비우는 경험은 속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도현은 이 텅 빈 허전함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채였다. 그러나 또한 알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복도로 새지 않고 제대로 갈 거란 걸.

영영 못 보는 게 아니다.

도현은 그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이어져 있는 유대를 느꼈다. 그건 비단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날. 니콜라스와 도현이 나눈 대화는 단순히 비밀을 공유한 게 아니었다. 처음으로 상대에게 스스로 민낯을 보여 준 거였다.

무엇이든 처음은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게 자아와 연관된 거라면 더욱. 그런 무형의 감정이 그렇게 단단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래서 도현은 괴로워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또한 그의 삶이 흔들거리며 나아가는 과정일 테니까. 지금껏 그랬듯 그는 다시 균형을 잡고 똑바로 걸어갈 것이다.

* * *

10월 5일.

앞으로 가끔 하루를 기록하기로 했다. 허전해서 이것저것 해보다가 생각해낸 거다. 

지금 해보니까 나름 소일거리로 할만한 것 같다.

.

.

.

10월 31일.

할로윈이 밝았다. 

작년에는 할로윈 준비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번 년에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친구들이 계속 귀신의 집을 다시 해주면 안 되냐고 물었다. 어디서 들은 건지 클럽 활동을 할 때 도서관을 찾아온 후배들이 보고 싶다고 부탁했다.

고민해보겠다고 했는데 이번엔 교장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결국 나는 그들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전처럼 이야기까지 짤 필요는 없었다. 언제부터 준비한 건지, 하겠다고 말하자마자 창작 클럽 친구들이 시나리오를 가져왔거든.

두 번째 귀신의 집은 성황리에 끝났다. 가끔 학교 관계자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크게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다. 

나는 몇 년 전에 처음으로 내 기사를 써 주었던 앨리슨이 생각났다. 처음으로 귀신의 집을 했을 땐, 그녀가 기사를 써 주었는데.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여기서 쌓은 인연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11월 4일.

맙소사.

11월 5일.

잠깐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진이 다비드와 만난단다.

오, 잠깐.

.

.

진정했다. 

사실상 나랑 니콜라스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진은 다비드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안정적인 관계를 선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였냐고 물어보니 할로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할로윈? 그날 진은 프랑켄슈타인 분장을 했는데…. 근데 왜 나는 일주일 동안이나 눈치채지 못한 걸까?

* * *

휘익-

휘슬 소리가 크게 울렸다. 니콜라스는 물 밖으로 올라왔다. 물기가 뚝뚝 흘러내렸다.

“구간 기록이 0.09초 단축됐네.”

“어! 정말요?!”

니콜라스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코치가 그의 기록을 일지에 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열심히 해. 이번에 열리는 주 대회 나가야지.”

“네!”

씩씩하게 물안경을 쓴 니콜라스가 제 뺨을 찰싹 쳤다. 정신 집중, 정신 집중! 여기서 만족하기엔 모자라도 한 모자랐다. 그는 첫 시작부터 세계에 섰던 제 친구를 떠올렸다. 그다음은 이 순간에도 저를 앞지르려고 아등바등하고 있을 라이벌이었다. 

질 수 없지.

니콜라스의 얼굴에 호승심이 떠올랐다.

* * *

12월 2일.

니키는 정말 최고다. 그는 뉴욕주에서 열린 대회 400m 자유형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는 천재가 틀림없다. 나는 그가 너무 자랑스럽다.

(12월 첫 주부터 두 번째 주까지는 무언가 썼다 지운 흔적만 남아 있다.)

12월 21일.

벌써 겨울 방학이네.

12월 22일.

윈저가 크리스마스 파티에 초대했다.

12월 23일.

가야 하나?

12월 24일.

가기로 했다. 

대신 헤레이즈와 신시아도 함께 갔다. 헤레이즈는 조금 고민하다가 수락했고 신시아는 고맙게도 바로 좋다고 말해줬다.

12월 25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지 않겠다.

1월 2일.

진과 함께 니콜라스의 집에 놀러 갔다. 며칠간 그곳에서 생활할 예정이었다. 앰버 씨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니콜라스는 신이 나서 우리를 이곳저곳 구경시켜 주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그의 학교였다. 니콜라스가 앤토니 씨가 아니라 앰버 씨를 따라간 건, 뉴욕에 있는 주립학교가 수영으로 유명한 탓이었다.

그는 거기서도 두각을 보인다. 니콜라스는 날개를 단 것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1월 8일.

정말 즐거웠던 일주일이었다. 찍은 사진을 인화해서 나눠 가졌다.

벌써 겨울 방학도 끝이네.

1월 12일.

개학하기 무섭게 추가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로 향했다. 왜 항상 학기 중에 촬영이 있는 거 같지.

아무튼 촬영을 위해 뉴질랜드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신성한 나무 내부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구현되었다.

지금 찍는 장면은 시즌 2에 들어갈 초반 장면이었다. 아직 시즌 1 개봉도 한참 멀었으면서 미리 촬영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역배우이기 때문이었다. 성인 배우들과 달리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니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게 미리 촬영을 해둬야 했다. 그것도 초반부라서 금방 끝났다.

3월 4일.

이제 진과 다비드는 델마에서 제일 유명한 커플이었다. 다비드의 오랜 짝사랑은 아이들의 취향을 저격한 모양이었다. 갈수록 다비드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르고 높아졌다.

잠깐만, 애들아. 다비드는 진이 있잖아….

4월 1일.

발레 학원에서 승격했다.

이제 P/B 반이 아니었다. 중간에 촬영이나 이런저런 일정이 있었던 탓에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걸렸지만, 어쨌든 다시 단사와 같은 반이 되었다.

이제 좀 몸이 내 의도대로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원하는 곳에 내 손끝이 가 있는 감각은 나를 즐겁게 만들었다. 새 옷을 가져와 입히던 엄마가 골격이 많이 커졌다며 놀랐다. 발레 덕분일까?

4월 22일.

오랜만에 리암을 만났다. 리암은 로잔나와 잘 되어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왜 이렇게 주변에 커플들만 있는 거 같지? …혹시 니콜라스도 여자친구를 사귀었을까? 그에게 문자를 보내봤더니 욕이 돌아왔다. 

왜?

4월 28일.

오늘은 에드워드와 만났다. 

요즘 반가운 얼굴들을 자주 보는 것 같다.

6월 1일.

매독스를 통해 한국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조율했다. 조율만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조율 이전에 엔터테인먼트를 고르는 데는 더 오래 걸렸으니 한 달은 나름대로 빠른 편이었다. 

여기까지 얘기가 오간 것도 한국에 아빠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장은 내가 한국에 갔을 때 찍을 예정이긴 한데 사실상 정해진 거나 다름없었다. 

남은 학기를 마치고 나면, 이제부터 한국에서의 활동은 해당 엔터테인먼트를 통해서 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와 별개로 미국에서 활동은 여전히 매독스 소관이었다.

내가 한국에서 속하게 된 엔터테인먼트는 새솔 엔터테인먼트. 소속된 연예인을 살피니 꽤 반가운 이름이 보였다. 

아람이 잘 지냈나 보네.

6월 2일.

계약 하루 만에 캐스팅 건으로 연락이 왔다.

6월 14일.

메일로 대본을 받아봤는데 흥미로웠다. 3일 정도 고민하고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너무 오래 고민했나?

6월 17일.

내일은 졸업식이다. 내 기분은… 모르겠다. 그냥 일찍 자야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도저히 글이 써지지 않는다. 

그럼 이만 줄이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


1) 카렐 차페크, 평범한 인생, 1998,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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