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7화. 운명적 만남? (1)
어제부터 자꾸 붕 뜬 기분이다.
아침이 되었는데 도저히 현실감이 돌아오질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규칙적인 수면 습관 덕에 뜬눈으로 밤새는 불상사는 없었단 거였다.
다만, 엄마는 달랐나 보다.
“어… 잘 잤니? 산책부터 할 거지?”
휘어진 눈가 아래가 어둑했다. 사실 저 모습은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도현의 한국행 결정으로 인해 가장 바빠진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서혜나였다.
그녀는 이곳에 Marine 해외 지부를 세웠다. 도현이 델마 아카데미를 다니는 동안 사업은 점차 안정기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퇴원한 지도 벌써 4년이 넘었다. 잠깐, 벌써 4년이라고? 도현은 스스로 생각하고도 놀라워서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시간이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감상에 빠지려는 기미가 보이자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몰아냈다. 아무튼. 4년이라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해외 지부를 진두지휘했던 서혜나는 그 자리를 인수인계하고 떠나야 하니 할 일이 자꾸만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신경 써야 할 것은 회사 일뿐만이 아니었다. 도현의 소속사와 중학교 문제도 그렇고… 심지어 몇 주 전부터 네 졸업식은 완벽할 거라면서 바쁜 와중에 옷까지 제작했다. 그녀는 일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는 거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이 정말 졸업식이라니….”
서혜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6월에 들어서고 그녀는 부쩍 감상적으로 변했다. 가끔은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눈물을 흘릴 기세였다.
“당신이 그러니까 나도 또 울컥하잖아.”
이장혁은 한참 전부터 그러고 있었다. 아, 그는 일주일 전에 이곳으로 왔다. 아들의 졸업식은 절대로 놓칠 수 없다나. 이런 행사에는 가족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 졸업식은 그렇게까지 큰 행사는 아니었다. 하나, 이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게 싫지는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난 시간은 서로에게 스며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도현은 문득 두 사람을 보았다. 애정이 가득 담긴 눈이 이쪽을 향했다. 자연스럽게 일 년 전, 니콜라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 소년은 누군가에게 제 진실을 밝힘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좀 더 깊이 이해했다. 니콜라스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때야말로 도현은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좋아하지 못하는 것. 그 두 가지가 다르단 걸 안 소년은, 어느 순간 불현듯이, 자신에게 시간을 주기로 했다.
처음으로 내린 너그러운 처사였다.
항상 한계까지 내모는 것에만 익숙했던 소년은 그렇게 지난 일 년간 내려놓는 법을 배워가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따라 하는 모양새더라도, 조금씩이나마.
자신조차도 모르는 사이 가지고 있었던 강박을 하나둘씩 알게 되었다. 부모님의 헌신에 보답해야 한다는 강박. 내게 주어진 시간을 한순간도 낭비하면 안 된다는 강박.
“자주 가던 산책로 한 바퀴 돌고 올까?”
“그럼 옷 갈아입고 내려올게요.”
이장혁의 물음에 도현이 가볍게 대답했다. 서혜나와 이장혁도 홈웨어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도현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다가 이 층으로 향했다.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
슬리퍼를 신은 발이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는다. 서혜나와 이장혁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도현의 얼굴은 정오로 넘어가기 전의 시간대처럼 평온했다.
하나둘씩 내려놓기 시작한 후. 도현은 속이 울렁거리는 일이 적어졌다. 그리고 또 한 번 깨닫는 것이다. 그건 당신들을 향한 부채감이었구나, 하며.
도현은 더는 그들에게 부러 잘 대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쁘게 굴었단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정도 이상으로 눈치를 보는 행위를 그만두었을 뿐.
그건 아주 천천히 일어났지만, 소년에게 모든 촉각을 세우고 있던 이들이 알아채기엔 충분한 변화였다. 그들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게 맞는다는 듯이. 어쩔 수 없이 웃는 낯도 아니고 부드러운 사려가 든 얼굴로.
당신들의 노력을 안다. 어쩔 수 없었음도 안다. 내게 퍼붓는 애정도 느끼고 있다. 그 애정이 마르지 않으리라는 것도 이젠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래도 난 당신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은.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산책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했다. 식기가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도란도란한 대화 소리가 식탁을 채웠다. 마당과 이어진 문을 열어둔 탓에 가끔가다 바람 한 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씻고, 옷을 챙겨 입고, 아래로 내려오자 평소 등교할 때와 똑같은 시간이었다. 세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다만 전처럼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학교로 향했다.
주로 나누는 대화 내용은 한국에 가서 무얼 할지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방 델마 아카데미 건물이 보였다.
반에 모인 후 함께 이동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도현을 데려다준 후 먼저 강당으로 향했다. 도현은 반 풍경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리! 왔어?”
“세상에. 헤더.”
도현은 잠깐 말을 찾지 못하다가 한 박자 느리게 입을 열었다.
“너 오늘 정말 멋지다.”
“네가 그런 말 해봤자 안 믿기거든?”
“진심이야.”
헤더는 꾸미는 것과 거리가 있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라지기로 한 모양인지, 앞뒤 길이가 언밸런스한 드레스를 걸치고 있었다. 앞부분을 보면 미니 드레스인데 뒤는 발목까지 내려오리만치 길었다.
“고마워. 너도 멋져. 나도 진심이야.”
헤더가 기분 좋게 웃으며 칭찬을 돌려주었다. 도현은 헤더와 몇 마디를 더 나누다가 반을 둘러보았다. 평소 체육복을 입고 다니던 아이들은 모두 드레스 업을 한 채였다. 운동장에서 뒹굴어 지저분한 모습만 보았던 도현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얘들이 걔들이라니.
“도리! 이따가 나랑 사진 찍자!”
“나도, 나도!”
“나랑도 찍어야 해!”
감상에 잠길 새도 없이 주변이 아이들로 가득 채워졌다. 익숙한 일이었다. 촬영 이후로 델마 아카데미에서 도현의 인기는 거의 절정에 치달았으니.
처음 학교에 왔을 때, 인사하는 것조차 어렵고 어색했던 소년은 이제 저를 둘러싼 이들에게 웃으며 대답을 돌려주고 있었다.
“나랑도 찍어줄 거지…?”
조심스레 묻는 이는 아일라였다. 아일라는 5학년이 되어 도현과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일 년 만에 같은 반이 된 그녀는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응, 좋아.”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같은 반이 되고 나서 한 달 정도는 도현을 슬슬 피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아일라와 도현, 그리고 헤더가 한 팀으로 묶인 것이다.
‘그때 참… 다사다난했지.’
그 조별 과제를 떠올린 도현이 입술을 다물며 웃음을 참았다. 어찌 되었든, 그 팀 업을 계기로 세 사람은 서로에게 남았던 앙금을 모두 풀어냈다.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말이다.
“오, 이런. 여기 신사 숙녀가 모여 있네!”
반에 들어온 줄리아 선생님이 주접을 떨었다. 놀랍게도 5학년 담임 선생님은 줄리아였다. 도현의 첫 담임 선생님이었던.
그 시간은 도현에게만 변화를 가져다주진 않았나 보다. 열정이 넘치지만, 어딘가 초보 선생님 티를 풀풀 냈던 줄리아는 경력이 쌓이고 완전히 프로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자, 집중. 모두 졸업식 순서는 기억하지?”
“네!”
“팸플릿 나눠줄 테니까 까먹으면 이거 보고… 그리고 다들 이야기 하나씩은 준비해 왔겠지?”
“네!”
아이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델마 아카데미의 졸업식은 꽤 간단했는데, 이벤트라고 할 만한 건 네 가지였다. 첫 번째는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의 연설, 두 번째는 상장 수여, 세 번째는 공연, 그리고 네 번째가 제일 특이했다. 의자에 졸업생들이 둘러앉아 각자 학창 시절 가장 즐거웠던 이야기를 하나씩 하는 거였다.
줄리아를 따라 강당으로 향하면서 도현은 헤더에게 물었다.
“너는 말할 거 준비했어?”
“응? 응. 준비했지.”
“뭔지 물어봐도 돼?”
“아니. 비밀이야. 이따가 들어!”
장난스럽게 웃던 헤더가 도로 물었다.
“넌? 넌 뭔데?”
“그럼 나도 비밀 할래.”
“아, 뭐야!”
헤더가 싱겁다며 불만을 표했다. 도현은 헤더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실 준비 못 했는데.
그가 게을러서는 아니었다. 도현은 성심성의껏 말할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근데 문제는 그거였다.
‘즐거웠던 일이 너무 많았는데 어떻게 골라.’
떠올릴 때마다 웃음이 나서 도저히 한 가지를 고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마지막 등교일인데 아무 이야기나 대충 고르고 싶지도 않고 말이지.
지금까지 받은 학교 숙제 중에서 이게 제일 어려웠다. 역시 마지막 숙제다웠다. 평가 방식이 아니라 다행이지. 만약 이게 졸업 관문이었다면 퍽 난감했을 것이다.
강당에 들어가자 이미 자리를 채운 학부모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부부가 도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도현도 마주 흔들어 주는데, 누군가 어깨를 잡았다.
“도리야아!”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현은 얼굴에 반가움을 띄운 채 뒤를 돌았다. 그리고 살짝 입을 벌렸다.
“너….”
“나 어때? 예뻐?”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눈앞의 소녀를 보았다. 진은 4학년 때까지는 성장이 두드러지지 않았다가, 5학년 때 갑자기 쑥 커버렸다. 여자애들이 먼저 자란다던가. 1년 사이에 몰라보게 성숙해진 얼굴은 벌써 중학생 같았다.
진은 몇 달 전에 허리까지 길렀던 머리카락을 어깨선 위까지 싹둑 잘랐다. 굽슬거리는 단발은 그녀의 주근깨와 아주 잘 어울렸다.
매력적인 금발 사이로 토파즈 귀걸이가 보였다. 드레스는 토파즈와 비슷하지만 좀 더 흰 기가 섞여 있었다. 밑단이 발레리나의 의상 같은 드레스를 입은 진은 작은 요정 같았다.
도현은 그제야 제 친구가 상당히 미형임을 깨달았다. 물론 그간 그녀가 못생겼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 뿐이었다. 중요한 건 진이지 진의 외양이 아니니까.
“진짜 예쁘다. 요정 같아.”
“그치? 나도 오늘 나 보고 깜짝 놀랐다니까! 너무 예뻐서. 오늘은 나도 너한테 안 밀리는 거 같지?”
“진, 나는? 내가 쟤보다 더 멋지지?”
어느새 옆에 와 있던 다비드였다. 그는 회색 셔츠에 푸른색 넥타이, 검은색 바지를 받쳐 입고 있었는데 키가 유난히 커서 그런가, 어른 흉내를 낸 아이들 사이에 교복 입은 중학생이 끼어 있는 느낌이었다.
진이 웃음기를 지운 낯으로 심각하게 다비드와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눈빛이 몽롱해졌다. 진이 황홀한 눈으로 도현을 보며 말했다.
“…미안, 다비. 넌 멋진데, 쟨 마스터피스야.”
…왜 날 노려봐. 도현은 다비드의 따갑다 못해 뜨거운 시선을 받고 억울해졌다. 항상 나만 가운데 낀 패티지. 도현은 진심으로 니콜라스가 그리워졌다. 저 커플은 둘이서 알콩달콩 잘 놀다가도 도현을 사이에 끼워 넣고 짜부시켰다….
한 번은 진을 붙잡고 말한 적 있었다. 그래도 남자 친구인데 자꾸 내 외양을 찬양하면 신경 쓰이지 않냐고. 그랬더니 돌아온 답은 가관이었다.
- 후… 도리토스, 잘 들어.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어. 탓하려면 너를 탓해. 너의 그 도를 넘은 아름다움을 말이야…!
진은 갈수록 정신이 조금… 아니다. 말을 삼가겠다. 아무튼 그 후로 도현은 그녀를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근데 니콜라스 생각하니까 보고 싶네.
니콜라스는 며칠 전에 진과 도현보다 먼저 졸업식을 마쳤다. 가고 싶었는데…. 수업 중이라 갈 수 없었던 게 아쉬운 일이었다.
“자, 델마 아카데미 졸업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자리에 앉아주세요!”
“이따가 봐!”
도현과 다른 반이었던 진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다비드도 도현의 어깨를 툭 건든 후 멀어졌다. 어찌 되었든 나름 친근한 사이인 그들이었다.
도현도 자리로 향했다. 먼저 자리를 맡아두었던 헤더가 제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길래 그곳에 앉았다.
단상에 오른 교장 선생님이 마이크를 툭툭 두드리더니 정면을 보았다. 그의 푸근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정말 멋진 날이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도현은 잠깐 형광등이 달린 천장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들뜬 분위기와 웅성거리는 소리, 카메라 소리와 벌써부터 훌쩍이는 몇몇 아이들….
그 말이 맞았다.
정말 멋진 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