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08)화 (309/582)

제308화. 운명적 만남? (2)

서혜나와 이장혁은 자리에 앉아서 아이들이 상장을 수여받는 걸 지켜보았다.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그들 부부뿐만이 아닌지,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는 몇몇 학부모들이 보였다.

“도현의 차례네요.”

제 이름을 호명받고 단상에 걸어 올라가는 도현을 보며 밀턴이 말했다. 어수선했던 장내가 조금 조용해졌다. 다들 한 소년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밀턴은 처음 도현을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게 저 아이라니.’

나이가 사십 줄에 들어서기 시작하면 세월의 흐름을 느끼기가 쉽지 않다. 그런 그가 시간이 지났음을 깨닫는 순간은 진의 성장을 발견할 때였다. 아이들은 정말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랐다.

단상에 올라간 저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았을 땐 요정 같은 인상이 강했다. 생기가 돌기보다는 창백한 듯 하얗고, 턱선은 갸름한데 볼살이 통통하고, 키가 또래보다 유난히 작아서 더 그렇게 느껴졌었다.

“도현 리. 새로운 시작을 축하한다. 너는 어디서든 잘할 거야. 내가 너를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렴.”

교장 선생님이 도현을 끌어안으며 덕담을 해주었다. 도현은 졸업장을 쥔 채로 그의 포옹을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아이가 오늘의 주인공이었지만, 도현은 정말 그랬다. 이젠 같은 나이대의 남자아이들과 비교해도 한 뼘은 더 큰 키와 더욱 깊어진 이목구비, 한층 성숙해진 눈빛과 이전에는 없었던 여유로운 분위기까지. 조금은 움츠려 있었던 아이는 이제 많은 사람 앞에서 환하게 웃을 줄 알았다.

밀턴은 학교 밖에 어슬렁거리던 기자 몇 명을 떠올렸다. 학교에 출입하려면 출입증이 있어야 해서 내부로 들어오진 못했지만… 고작 초등학교 졸업식에 기자가 찾아왔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부분이었다.

저 아이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이는 결국 사람들의 주목 속에 서 있을 운명이었다.

“자, 졸업장을 수여했으니 상장도 줘야겠죠. 보자…. 위 학생은 도서 클럽의 일원으로서 훌륭히 활동했으므로 도서 클럽 활동상을 수여합니다. 또한, 델마 아카데미 학생들의 독서량 증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므로 독서진흥상을 수여합니다.”

포멀한 느낌보다는 캐주얼한 느낌의 행사다 보니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인 상을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복도의 쓰레기를 자주 주워 학교의 청결함에 기여했으므로 청결한 어린이상, 놀라운 리더십으로 아이들을 잘 이끌고 중재했으니 이 시대의 리더상, 할로윈 때 귀신의 집으로 즐거움을 선사해 주었으니 친절한 귀신상, 화단의 식물이 시들거릴 때 분갈이하는 걸 도와줬으니 착한 델마인상, 언제나 아이들의 모범이 되리만치 태도가 훌륭했으니 모범상, 훌륭한 연극을 보여 주었으니 최고의 스타상, 재학 기간 내내 모든 시험에서 만점을 놓친 적이 없으니 아인슈타인상… 또 그리고….”

처음에 즐거운 듯이 웃던 아이의 표정이 점차 오묘해지더니, 이내 품 안에 쌓여가는 상장에 질린 얼굴을 했다. 사람이 상장을 든 게 아니라 상장이 사람을 받침대로 쓴 모양새였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밀턴은 도현과의 신의를 지켰다. 그는 저 소년이 아직도 정체불명으로 남은 바이올리니스트 ‘H’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 소년이 계속해서 살아가는 이상 그는 더 유명해질 것이고, 결국 그가 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학교 부지에서 어슬렁거리던 기자들은 그 시작일 뿐이었다.

이제 밀턴은 그에게 바이올린을 하라고 권유하지 않는다. 소년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게 무엇이고 그것에 얼마나 진심인지 그간 충분히 봐왔기 때문이었다.

어째서 그러한 압도적인 두 가지의 재능이 모두 저 작은 몸에 깃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또한 하늘의 뜻일 것이다. 밀턴은 그저 궁금했다. 저 아이가 펼쳐 나갈 미래가.

밀턴의 시선이 이제는 상장에 깔린 것 같은 소년을 지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에게 닿았다. 시선은 도현을 향한 채 진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솔직히 밀턴은 도현에게 고마웠다. 어려서부터 남다른 구석이 있긴 했지만, 어째서인지 미래에 대한 목표나 열정은 없어서 걱정이었던 진이 도현과 어울리면서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밀턴은 진심으로 저 소년의 미래에 축복이 가득하길 바랐다.

“여기까지. 상장을 수여하겠습니다.”

“와아아!!”

여기저기서 박수와 환호 소리가 들렸다. 밀턴도 손바닥을 마주치며 아이를 향해 축하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 * *

상장이 너무 많아서 부모님한테 맡기고 돌아왔다. 자리에 돌아와서 앉자 헤더가 키득이며 그를 보았다.

“좋겠다, 상 많이 받아서?”

“그러는 너도 많이 받았잖아.”

“뭐, 그렇긴 하지.”

헤더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 후로 아이들이 나와서 졸업장을 비롯한 상장을 수여받았다. 그다음에 이어진 것은 졸업생 공연이었다.

도현은 졸업 공연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는 학교 축제나 할로윈 같은 행사에서 자주 나섰으니까. 졸업 공연은 다른 아이들이 중심이 되어 하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하에서였다.

‘음, 조금 재수 없게 들리려나….’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다. 축제도 행사도, 도현이 끼어들면 그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배우라는 특수성과 그의 정신 연령이 한몫한 거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도현은 이 공연을 순수하게 즐기고 싶었다.

“…나왔다! 저기 가운데가 진이네!”

이번 졸업 공연은 진의 첫 정식 공연이기 때문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자 붉은 커튼이 젖혀지며, 그 안에 대기하고 있던 밴드부 멤버들이 모였다. 도현에게는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이 도현을 영입하기 위해 몇 날 며칠간 따라다닌 적이 있었으니까. 결국 내가 이겼지만.

가운데에 선 진은 일렉 기타를 메고 있었다. 그리고 베이스 기타를 멘 다비드는 그 옆에 서 있었다.

어떠한 순간을 떠오르게 만드는 장면에 도현은 묘한 감상에 잠겼다. 그 영화를 찍었던 게 벌써 이 년 전이었다. 루카 하퍼와 사이가 틀어진 지는 일 년이 넘었다.

걔는 잘 지낼까.

하퍼를 마지막으로 본 건 윈저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였다. 그 후로는 얼굴 볼 일이 없었다. 그 탓에 자연스레 잊고 있었다가 이제야 생각이 났다. 뭐… 알아서 잘 지냈겠지만. 그 애는 어디서든 중심에 설 애였다.

도현은 크리스마스의 밤을 떠올리다가 표정이 묘해졌다. 일 년 중 미국인들이 가장 즐거이 노는 날이라 그랬을까. 묘하게 들뜬 분위기와 크리스마스의 밤, 아이들의 웃음소리 탓이었을까?

파티 초반에는 서로 보는 둥 마는 둥 하던 하퍼와 도현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마치 그 일이 있기 전처럼 평온하고 즐거운 대화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다음 날. 두 사람은 그렇게 군 적 없다는 듯 또다시 서로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아니다. 잊자. 도현은 기억을 치워냈다. 괜히 기분만 뒤숭숭해졌다. 도현은 준비가 끝난 것처럼 보이는 무대에 집중했다.

구경하고 싶다고 해도 진은 안 된다는 말만 했다. 그날 보라면서. 그래서 도현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얼마나 잘하나 하는 마음도 조금, 아주 조금 있었다. 진이 공연 연습을 한답시고 밴드부하고만 어울리며 도현을 소홀히 한 것이다.

사실 그가 하기에는 조금 양심 없는 생각이었다. 오디션 준비한답시고 매번 대본만 들여다보고, 촬영한답시고 심심하면 학교에 몇 달 동안 빠지던 도현이었으니.

그래도 서운할 수는 있지 않은가?

스위스 여행 이후로 묘하게 뻔뻔해진 도현이 태연한 얼굴로 생각했다. 그사이, 마이크를 쥔 진이 호쾌하게 웃었다.

“첫 곡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위해 준비한 곡입니다. 우리 밴드가 뭉치도록 도와준 고마운 계기기도 하고요. 제목은 말하지 않을게요. 들으면 다들 알 테니까!”

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치잉- 하는 소리와 함께 드러머가 시작을 알렸다. 도현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이거… 설마.

도현의 입이 벌어짐과 동시에 진의 입이 열렸다.

Look around.

The world is upside down.

세상에.

Shining stars fall to the ground.

Walkin on the streets is just corpses.

I feel like I’ve become a dolt.

루카 하퍼의 목소리가 반항적인 거침을 품고 있었다면, 진은 거칠기보다는 유쾌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매력적이었다. 평소에도 진의 목소리가 듣기 좋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이렇게 노래 부르는 걸 제대로 듣는 건 처음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They say.

“Lower your head when you walk on the street. If not, you’ll fall.”

Can’t I fall or stumble?

노래를 단숨에 알아본 이들이 저마다 흥미롭거나 즐거운 낯을 했다. 도현은 무대와 제게 번갈아서 쏠리는 시선을 느끼며, 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So tell me.

What are you gonna say?

뭐라고 할 거냐고?

넌 진짜 미쳤어, 지니 레이시.

도현의 얼굴에 차츰 미소가 번지다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 서운해할 수조차 없게 만드는 친구였다.

서혜나가 최근에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네 졸업식은 완벽할 거라고. 그녀는 이런 상황이라도 내다보았던 걸까?

정말이지 완벽하기 짝이 없었다.

밴드부 공연은 첫 번째 곡을 포함하여 연달아 세 곡을 연주한 후 끝이 났다. 그 후로 다른 팀이 무대에 올라가 공연을 펼쳤다. 대략 한 시간가량 이어지던 공연이 끝나고 잠깐의 정비 시간이 이어졌다.

선생님들은 단상 아래에 긴 나무 블록 같은 것을 층층이 놓았다. 그 후 아이들을 인솔하여 자리에 앉혀 놓았다. 학부모와 아이들이 마주 보는 구도였다. 단상에 걸터앉은 아이들부터, 한 칸씩 낮아지는 블록에 앉은 덕분에 가려지는 아이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왼쪽부터 차례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즐거웠던 이야기를 꺼내고 나면, 다른 사람들은 박수 치며 호응을 해줬다. 편안한 분위기에 긴장하던 아이들이 차츰 웃음꽃을 피웠다.

진이 꼽은 최고의 순간은 2학년 음악 수행 평가였다. DJ-N 조의 경험은 잊지 못할 거라며 말하는 진에 도현은 감동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꼈다. DJ-N의 N을 맡은 니콜라스가 이 자리에 없는 게 아쉬웠던 것이다.

헤더가 꼽은 순간은 굉장히 의외였다. 그녀는 몇 달 전의 일, 그러니까 헤더와 도현, 아일라가 같은 조가 되어 조별 과제를 준비했던 때를 골랐다. 아일라는 놀란 얼굴로, 그러나 울컥한 눈으로 헤더를 보았다. 그날 이후로 두 사람 우정이 심상치 않아 보이더라니…. 그들은 생각보다 더 서로와 가까워진 모양이었다.

두 사람 외에도 아이들의 가장 특별했던 순간에 도현이 함께했던 경우는 많았다. 귀신의 집, 축제 날 했던 연극, 소풍…. 아이들의 소중한 시간에 저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못내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윽고 도현의 차례가 되었다. 진의 초롱초롱한 시선과 헤더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이 느껴졌다.

“저는….”

도현은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지금이 가장 즐거운 거 같아요. 사실 돌아보니 모든 순간이 즐겁게 느껴지거든요. 나중에 돌아봤을 때, 이 순간도 그렇게 느껴질 테니까… 지금으로 할래요.”

그게 뭐냐며 야유와 멋지다는 함성이 함께 쏟아졌다. 그러나 결국 도현의 이야기도 하나의 이야기로 받아주기로 했는지,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델마 아카데미의 졸업식이 끝났다. 도현은 졸업식을 마치고 운동장에서 낯익은 차량을 발견했다. 차에서 내리는 반가운 남매를 본 도현은 잠깐 멈춰 섰다가, 그쪽으로 달려갔다.

모두가 모인 즐거운 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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