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0화. 운명적 만남? (4)
- 문자로 먼저 연락드렸지만, 드라마 작가님이랑 미팅 날짜 잡혔는데 그날 괜찮으실까요?
“네. 그리고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 어… 나, 나중에 그렇게 할게요.
최근 도현의 고민은 그거였다.
매니저가 그를 어려워한다.
물론 그가 일을 못한다는 건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은 딱딱 잘했다. 오스카보다는 매독스에 가까운 타입 같았다. 다만… 어째서인지 도현을 어려워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할리우드 유명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케어를 받아온 도현이 혹시나 저의 매니징을 불만족스럽게 느낄까 봐 긴장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도현은 그저 매니저가 낯을 가리나 보다 생각했다.
도현은 낯을 가리는 그를 위해 적당한 인사말과 함께 통화를 마무리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도현은 거실로 나가 한 면을 가득 채운 창문을 통해 바깥을 응시했다.
어느새 한국에 온 지도 일주일이 넘었다. 몇 번 와서 살아본 덕분인지 적응이 어렵지는 않았다. 3일 차부터는 시차 적응도 끝냈다.
도현은 바깥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높여 푸른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은 거기나 여기나 비슷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제 친구들을 떠올렸다.
이별은 예견된 일이라고 해서 아쉬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감당 못 할 슬픔 같은 건 없었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고 일상의 연속 같았던 그날을 회상하다가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 * *
일주일 전.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
다섯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검은색 모자를 꾹 눌러써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희고 날렵한 턱선에 몇몇 이들의 시선이 모였다가 흩어졌다.
“콜리야, 아빠 친구한테 인사해.”
월월!
말을 알아들은 건지 뭔지, 웃는 얼굴의 브로콜리가 두어 번 짖었다. 도현은 찡해진 눈으로 브로콜리의 머리며 목덜미를 잔뜩 쓰다듬고 따뜻한 몸을 한번 껴안은 후에야 떨어졌다.
개도 무언갈 아는 것인지, 브로콜리가 끼잉대며 도현의 옷자락을 물었다. 할리가 엄한 낯으로 브로콜리를 떼어냈다.
“쓰읍! 그러면 안 돼!”
도현은 아쉬운 눈길로 브로콜리를 보다가 이내 시선을 떨어트렸다. 더 보다간 가기 싫어질지도 몰랐다. 진이 도현에게 한 발짝 다가와 손을 꼭 붙잡았다.
“자주 연락해야 해. 알았지?”
“그럴게.”
“뭐… 잘 가라. 잘 살고.”
진과 도현이 우정 어린 인사를 나누고 있자 다비드가 한마디를 얹었다. 도현은 진의 손을 잡은 채 다비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가도 게임은 같이 할 수 있지? 참여 안 하면 안 된다, 너?”
아무래도 브라운은 게임 클럽에서 도현을 빼줄 생각이 없는 거 같았다. 도현이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할 때였다.
“너… 딱 기다려.”
니콜라스가 장난스러운, 그러나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한국으로 놀러 갈 테니까.”
“진짜?”
“그럼 진짜지, 가짜냐?”
도현이 퍽 감동받은 눈으로 니콜라스를 쳐다보자 진이 자기도 가겠다며 끼어들었다. 할리가 자기도 한국에 여행 가보고 싶다고 말을 더하면서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도현은 온갖 목소리가 겹친 공항의 한가운데서, 문득 자신이 생각보다 미국에서 잘 지냈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위해 여기까지 와준 친구들이 이만큼이나 있었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이 자리에 없는 이들을 떠올렸다.
헤더는 아쉽게도 경시 대회 일정과 도현의 출국일이 겹쳐 오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현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내며 우정이 변치 않을 것임을 증명해 주었다.
헤레이즈는 소식을 듣고 쿨하게 ‘그래?’라고 한마디 했고 신시아는 도현의 집으로 프리지아를 보내주었다. 엄마의 꽃집에서 가장 예쁘고 싱싱한 것으로 골랐다는 엽서와 함께. 오히려 크게 반응해준 건 헤레이즈의 친구인 제이스 테일러였다. 그는 가기 전에 놀자고 징징대더니 기어이 니콜라스와 도현, 헤레이즈를 불러서 소원을 이뤘다.
단사와 발레 학원 친구들은 도현의 수업 마지막 날에 케이크를 가지고 와서 파티를 벌여주었다. 미하엘이 허락해 주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P/A반은 수가 적은 만큼 관계도 끈끈한 편이라 많은 아이가 도현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리암은 이렇다 할 감흥이 없어 보였다. 자주 만나는 사이가 아니기도 했고, 물어보니 ‘어차피 너는 할리우드에 오게 되어 있어’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말을 하는 리암은 한 치의 의심과 의문조차 없어 보였다.
에드워드는 한국에서 작품을 찍게 되면 소식 전해달라고 말했다. 챙겨 볼 의지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오스카는 결혼할 때 청첩장을 보내 주겠다고 말했다. 도현은 벌써부터 그날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여기까진 모두 예상했던 반응이라서 딱히 놀라울 건 없었다.
그러나.
딱 한 명.
정말, 정말로 의외의 인물이… 도현을 혼란 속에 빠트렸다.
“아, 지니 걔가 네 얘기 하더라. 보고 싶을 거라던데….”
“…….”
때마침 진이 꺼낸 말에 도현이 침묵했다.
그래. 지니.
지니 레이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지니 레이시와 자매처럼 자란, 옆집에 사는 지니를 말한 거였다.
그, 세인트 마리 여학교에 다니며, 뛰는 것을 싫어하고, 머리카락은 절대 묶지 않는다는 그 지니 말이다.
도현도 지니를 몇 번 마주친 적 있었다. 아무래도 옆집이고 자주 교류하는 사이이다 보니, 진의 집에 갈 때면 거의 70%의 확률로 마주쳤다. 그녀는 처음 몇 번은 당황해서 집으로 돌아가더니 나중엔 태연히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같이 놀았다.
지니와 도현의 사이는 말하자면 ‘지인의 지인’ 정도가 적당했다. 그가 진의 집에서 놀 때 그녀가 찾아오면 같이 어울려 대화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 외의 교류는 하지 않는 사이 말이다. 딱 한 번 길거리에서 마주친 걸 제외하고 진의 집이 아닌 곳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일을 예상하지 못한 건 당연했다.
- 너 떠난다며?
진, 다비드, 헤더와 함께 진의 집에 모여 놀 때였다. 여느 때처럼 놀러 왔다가 자연스럽게 끼어든 지니가 툭 물었다. 그에 도현은 그렇다고 대답했고-
- 아쉽다. 나 너 좋아했거든.
- …….
- 오, 지저스….
놀라운 발언을 했다. 헤더의 감탄 어린 목소리만이 방 안에 맴돌았다. 한참의 정적 이후 진이 떨떠름히 말했다.
- 너는 무슨… 그런 이야기를 홍차 마시다가 해?
그녀의 반응으로 보건대 이미 알고 있던 것 같았다. 크게 놀란 건 오히려 다비드였다. 다비드는 경악한 눈초리로 지니와 도현을 번갈아 보았다.
- 와… 너 진짜 멋지다.
헤더는 지니의 고백보다는 일상적인 대화처럼 고백한 지니에게 더 흥미를 느끼는 모양이었고 말이다.
- 왜 그런 눈으로 봐?
고백받은 대상은 당혹스러운 반면 고백한 당사자는 마냥 태연했다. 지니는 평소 모습 그대로, 허리를 반듯이 편 자세로 느릿하게 홍차를 마시고는 찻잔을 내렸다.
- 이상한 일도 아니잖아? 유치하지도 않고, 키도 크고, 잘생겼고 허세도 없고, 착한 데다가… 머리도 좋잖아. 솔직히 난 진이 너를 옆에 두고 왜 저런 모자란 애한테 반했는지 잘 모르겠는걸.
- 갑자기 왜 시비야, 넌.
다비드가 얼척없는 얼굴로 말하든 말든, 지니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회상하건대, 그 테이블에 있던 모두가 지니의 남다른 기백에 기가 눌려 있었다.
도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나오는 칭찬 앞에서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간신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 좋게 봐줘서 고마워.
- 그냥 네가 좋은 애인 거야.
최선을 다해 머리를 쥐어짜 내놓은 답변에 지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고선 말을 덧붙였다.
- 난 장거리 연애에는 관심 없어. 국경을 넘는 거리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대답은 안 줘도 돼.
고백을 받은 건지 차인 건지 모를 기분이었다. 도현은 당혹감에 입술만 달싹였다. 요즘 애들은 원래 이렇게 조숙한가….
같은 요즘 애들인데 좀 거리감이 느껴졌다.
- 몰랐다는 얼굴이네. 그럴 줄 알았어. 네가 올 때마다 항상 일부러 왔는데, 너는 관심 없더라.
그것도 몰랐다. 진이랑 친해서 놀러 온 줄 알았는데…. 진을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했다.
쟤 말이 맞아. 어차피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자주 같이 해서 낮엔 자주 안 만나. 빼도 박도 못하게 진의 증언까지 더해졌다.
- 그냥 말해주고 싶었어. 가서 잘 지내. 너를 금방 잊진 못할 거야.
내내 찻잔을 응시하다가 그제야 고개를 돌린 지니가 도현을 보고 웃었다. 평소에 무표정한 얼굴만 주로 봐왔는데, 웃는 얼굴은 그 나이 또래같이 어린 면이 있었다.
- …응, 고마워. 너도 잘 지내.
그날은 그렇게 흐지부지한 분위기로 헤어졌다. 그게 지니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상하다. 도현은 모르던 곳에서 그를 소중하게 여기던 사람이 있었다는 게. 인연은 항상 그가 온 신경을 기울여 아등바등 잇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아무런 예고도 전조도 없이 시작되는 인연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시작과 동시에 마무리된 거 같긴 하지만….
“…그래. 잘 지내라고 전해줘.”
그것 말곤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여전히 그날의 일은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웠다. 상대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내가 그런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설이나 영화로만 접하던 것이 현실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낯설단 소리였다.
헤더와 대화를 나누던 중 저런 이야길 꺼내자.
- 그게 처음 고백받은 거였다고?
그녀는 도현의 대답에 놀라서 소리쳤다. 그 뒤로 이어진 말은 도현을 놀라게 했다.
- 내가 아는 애들만 해도 너한테 관심 있는 애가 다섯 손가락을 넘는데….
졸업할 때가 되니 별별 일이 다 생긴다 싶었다. 그래서 설레거나 기쁘냐고 묻는다면, 도현은 단호히 고개를 저을 자신이 있었다. 이건 마치… 유치원 아이들이 커서 선생님과 결혼할 거라고 하는 걸 보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같은 학교 애들은 너무 어린 시절부터 봐오기도 했을뿐더러 도현의 정신적 성숙도가 너무 높았다. 도현의 떨떠름한 반응에 헤더가 넌 그럴 줄 알았다며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런 일은 나한텐 너무 멀다. 그리 생각하는데 도현의 눈에 한 소년이 들어왔다. 소년기에서 막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모습의 그는.
“맥?”
맥 버클러였다.
도현의 눈이 커졌다.
뉴질랜드에서 만난 이후.
맥은 도현의 연락을 무시하진 않았지만, 전처럼 친근하게 굴지도 않았다. 도현이 싫어서는 아니고 본인의 과거 행동 탓에 쉽사리 편하게 대하지 못하는 거 같았다.
전처럼 만나서 논 적은 없었다. 아무리 한쪽에서 붙잡고 있어도 다른 한쪽이 움직이질 않으니 사이는 가까운 듯 먼 거리를 유지했다.
그래서 그가 올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배웅은 해줘야지 싶어서. 잘 가.”
맥이 어색한 듯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하게 여문 턱선이 도드라졌다.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진과 니콜라스를 발견하고 망했다는 표정을 짓던 그가 한숨을 내쉬다가, 도현을 보고 한 마디 더 툭 던졌다.
“다음에는 베니스에서 보자.”
움츠러들어서 도현을 피해 다니던 맥은 거기 없었다. 도현에게도 의미 있었던 일 년이 맥에게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좋아요.”
그게 그의 선택이라면.
도현은 맥을 마주 보고 웃었다.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현은 이 순간이 의미 없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연락을 그만둘 때라는 걸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그와 자신이 조금 더 크고, 그의 말처럼 베니스에서 재회할 때. 우리는 전처럼 아무런 불안과 미움 없이 서로를 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충분히 기다릴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먼 미래는 아니겠지?
* * *
…그랬었지.
하늘을 보던 도현이 발걸음을 돌려 서재로 향했다. 제 친구들은 다들 저보다도 더 대단한 존재들뿐이니, 잘 지내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나도 열심히 해야지.
미국에서도 여기 소식이 들릴 만큼은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는가. 도현은 그리 생각하며 서점에서 구매한 만화책을 꺼냈다.
구미호뎐 (부제 : 인과 연)
원작이 인기 있는 웹툰이라 그런지 종이책으로 나와서 시중에 판매되고 있길래 곧장 구매했다. 도현의 시선이 앞 페이지, 등장인물을 간단히 소개한 부분에 닿았다.
여 우야.
이 독특한 이름의 주인은, 아마도 도현이 새로이 들어가게 될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이자 도현이 맡게 될 캐릭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