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11)화 (312/582)

제311화. 운명적 만남? (5)

처음 대본을 받고 배역 이름을 확인했을 땐 너무 노골적이라서 놀랐다.

종족은 구미호.

이름은 여우야.

‘확실히 기억에 확 박히긴 하네.’

처음에는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름의 비화를 알게 된 후부터는 오히려 입에 착착 붙었다. 이름에 관한 비화는 작중 여자 주인공과의 대화에서 나왔다.

도현은 이미 몇 차례 읽었던 만화책을 익숙하게 휙휙 넘겨 원하는 페이지를 찾았다. 어린아이 모습을 한 채 침대를 뒹굴며 콘솔 게임 ‘식물의 숲’을 하는 여우야를 구경하던 한이련이 여우야에게 묻는다.

- 그런데 진짜 이름이 여우야인 거야?

- 그래.

- 거짓말 아니고? 진짜?

- 내 너한테 그런 것을 속여 뭐 하겠느냐.

- 판타지 소설 보면 그런 거 있잖아. 본명을 알면 큰일 난다든지….

한이련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자 여우야가 그녀에게 한심하단 눈길을 보낸다. 여우야의 어린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서 그런 표정과 말투가  모순적인 매력을 만들어냈다.

- 쯧쯧. 소설을 너무 많이 봤구나. 현실과 몽상은 구분할 줄 알아야지.

- 본인이 제일 판타지스러운데, 무슨….

그런 대화 뒤에 여우야가 무심하니 툭, 제 이야기를 꺼낸다.

- 내가 새끼 여우였을 때, 내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던 사냥꾼이 나를 그리 불렀다.

이후, 회상 장면이 등장한다.

여우야는 새끼 여우 중에서도 유난히 이상한 여우였다. 몸집은 다른 여우의 절반만 하고 털색은 눈처럼 하얬다. 그리고 무엇보다, 꼬리가 없었다.

어미 여우는 그런 여우야를 제 새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법칙에 따라 생존 가능성이 낮은 새끼를 버린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어미의 본능으로 무언갈 알아챈 걸지도 몰랐다. 버려진 여우야를 발견한 건 근처에서 사냥하던 한 사냥꾼이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한쪽 팔이 없는 외팔이 사내였다. 그로 인해 마을에 섞여 들어가지 못하고 외톨이 생활을 해야 했던 남자는 여우야의 처지가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에 여우야를 죽여 모피를 파는 대신 도축하고 남은 고깃덩이를 던져주었다.

- 옛다, 여우야. 너 무라.

이렇게 말하면서.

파는 것도 불가능한 부위인 짐승의 생간이었지만 그조차도 여우야에게는 소중한 먹이였다. 그런 날이 하루, 이틀 길어지고 쌓여갔다. 풀숲에 숨어 사냥꾼을 기다리는 것이, 숨어서 저를 기다리는 여우를 찾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과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불이 났다. 원인은 곳간에서 졸던 한 꼬마 아이였다. 아이는 퍼뜩 겁이 나, 달려온 어른들에게 사냥꾼이 못된 짓을 하고 도망쳤다고 거짓말했다.

여우야는 사냥꾼이 마을 사람들에게 끌려가 돌팔매질당한 끝에 숲에 버려진 것을 보았다. 사냥꾼은 눈앞에 어른거리는 흰 털 뭉치에 피를 흘리며 말했다.

- 여우야, 지금은 너한테 줄 간이 없다. 고놈 내가 없으면 굶어 죽을 턴디 우짜지….

얻어맞아 퉁퉁 부은 얼굴로 홀로 남을 여우를 안쓰러워하던 사냥꾼은 곧 식어 쓸모없어질 제 몸뚱어리를 생각해냈다.

-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숨이 멎거든 내 간은 네가 무라.

여우야는 해가 저물어갈 때까지 사냥꾼의 옆을 지켰다. 이내 해가 지고 보름달이 떠올랐을 때. 사냥꾼의 희미한 숨이 완전히 멎었다. 여우야는 사냥꾼이 말한 대로 사냥꾼의 간을 파먹었다.

그리고.

무언가 뭉쳐지며 민둥하던 여우의 몸에 꼬리가 자라났다. 첫 번째 꼬리였다. 꼬리가 생겨난 여우는 곧장 마을로 가서 사냥꾼을 때려죽인 마을 사람들의 목덜미를 물어 죽이고 간을 먹었다.

살아남은 이는 곳간에서 졸던 꼬마 아이뿐이었다. 도망치려는 아이의 발목을 물고, 넘어진 이의 간을 빼앗으려던 찰나였다. 요요한 빛을 내던 보름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여우는 달을 향해 길게 울었다. 꼬마 아이는 절뚝이며 도망쳤다.

아이가 지나간 길엔 핏자국이 점점이 남아 있었지만, 여우야는 도망친 아이를 잡지 않았다.

마을이 침묵에 잠긴 날.

여우야의 꼬리는 두 개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구미호뎐 : 인과 연>에서 구미호의 시초이자 여우야의 과거이며, ‘여우야’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계기였다.

민간 속신에서 여우는 무덤을 파 송장을 먹는다고 하여 죽음을 상징한다. 여우의 울음이 나타내는 바도 죽음이었다. <구미호뎐 : 인과 연>에서 구미호의 탄생 비화는 이런 속신을 떠올리게끔 했다.

무엇보다 도현은 구미호에 대한 접근이 마음에 들었다.

보통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여우가 500년을 수행할 때마다 꼬리가 둘로 갈라지며 아홉 개가 되면 불사의 존재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호 : 인과 연>에서는 여우의 꼬리가 늘어나는 건 깊은 인연, 혹은 업보가 쌓일 때였다.

업보는 인간이 지은 것이기도 하고 여우가 지은 것이기도 해서 이 작품 내에서 구미호의 존재는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가 모호했다. 신령스럽다고 보기엔 사악하고, 악물이라고 보기엔 정이 많았다.

그래서 도현은 여우야가 마음에 들었다. 르옌에서도 그랬듯이, 도현은 대체로 정확히 정의 내려지는 것들보다는 모호하고 모순된 것들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내 취향도 일관적이구나.’

새삼스럽게 자신의 선호를 깨달은 도현이었다.

며칠 뒤.

드라마 미팅 날이 다가왔다.

* * *

미팅 장소는 분위기 좋은 한식집이었다.

“뭘 이런 데를 다 잡았어.”

“우리 배우님 모시는 거니까 신경 써야지.”

이장혁이 안에 들어오며 하는 말에 정가현이 웃으며 일어나 말했다.

“안녕, 도현아. 아니지, 도현 배우님.”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럴 순 없지. 오늘은 배우 대 피디로 만난 자리니까. 다들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정가현의 말에 매니저가 명함과 함께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도현 배우 매니저, 경찬호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감독 정가현입니다. 여기, 그리고 우리 드라마 작가님이요.”

아까부터 긴장해 있던 서승아가 도현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말했다.

“반갑습니다. <구미호뎐> 작가 서, 승아예요.”

잘 말하다가 혀를 한번 씹었다. 다행히도 매너 좋은 일행들은 그녀의 실수를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도현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다.

“배우 이도현입니다. 대본이 들어왔을 때부터 만나 뵙고 싶었는데, 드디어 이렇게 보네요.”

어째 초등학교 갓 졸업한 애가 나보다 더 말을 잘한다. 서승아는 도현을 처음 만난 새솔 사람들이 했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하며 도현을 보았다.

“자, 일단 자리에 앉읍시다. 시장하시죠? 밥부터 먹어요. 여기 이 지역에서 되게 유명한 한정식집이라 괜찮을 거예요.”

도현은 자리에 앉으며 이번 드라마의 총감독을 맡은 정가현 피디를 보았다.

정가현 피디와는 나름 인연이 깊었다. <불량경찰> 때 도현을 캐스팅한 장본인이자, <불량경찰>의 AD였으며, 과거 이장혁과 동창이었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AD였는데.’

확실히 시간이 흐르기는 했나 보다. 그녀는 어느새 PD라는 직함을 달고 있었다.

밥을 먹으면서는 일상적인 대화가 오갔다. 한국에서 적응은 어떤지, 중학교는 어떻게 할 예정인지, <패스파인더> 촬영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등등…. 미팅은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식사를 마쳤을 때.

본격적인 미팅이 시작되었다. 이야기가 오가던 중 경찬호가 질문했다.

“드라마 사전 진행은 어디까지 되었습니까?”

그 질문에 정가현은 잠시 할 말을 골랐다. 말하자면, 거의 아무것도 없다, 가 정답이었다.

“사전 답사는 마쳤고 이도현 배우님을 섭외하고 나면 주연 배우 캐스팅을 비롯해서 본격적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거의 안 되어 있다는 뜻이군.’

경찬호는 대충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도현이 한국으로 온다는 소리에 허겁지겁 대본부터 보내놓은 모양이었다. 방송국 측에서도 이도현의 출연 확답만 받아 오면 자리를 내어 주겠다고 했겠지.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정가현은 물로 타는 목을 축였다. <구미호뎐 : 인과 연>의 제작은 조금 과장해서 도현의 손에 달려 있다고 봐도 좋았다.

국장님은 이도현의 출연 확답을 받아 오면 내년 초에 드라마 편성을 해주겠다고 말했다.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그러려면 예정되어 있던 드라마의 일정을 변경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구미호뎐>은 남자 주인공 아역을 맡아줄 배우가 없어서 몇 년간 붕 떴던 드라마예요. 하지만, 알고 계시겠지만 워낙에 원작이 탄탄한 작품이라서 대본은 금방 나올 거예요. 지금도 2화까지는 나왔고요.”

정가현이 침착하게 말했다.

“원래라면 이렇게 갑자기 편성받기 어려운데 이도현 배우님의 출연 의사 덕분에 내년 초에 자리를 제안받았어요. 아직 논의 중이긴 하지만, 캐스팅이 확정되면 느려도 2월에는 편성받을 수 있을 거예요. 드라마 촬영 같은 경우는 최대한 빠르게 준비를 마치면 빠르면 10월 초, 느리면 11월 중순 정도에 촬영이 가능할 거예요. 목표는 방영 전에 5화까지는 나오는 건데… 이건 솔직히 말해서 희망적인 관측이고, 딜레이까지 고려해서 최소 3화를 생각하고 있어요. 또….”

갑자기 정가현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저희가 캐스팅 중인 배우님이 이도현 배우님 출연이 확정되면 출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셨거든요.”

도현이 아직 미국에 있었을 당시.

긍정적인 답신을 돌려받은 후 정가현이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도현의 합류가 확정되면 나머지를 빠르게 진행할 수 있도록 발 빠르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중 한 가지는 캐스팅이었다.

“네?”

도현은 그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어 나온 말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이도현 배우님도 아실 거예요. 기억나시죠? 강이든 배우님이요.”

“…강이든 배우님이요?”

오랜만에 들은 이름이다. 도현이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있자 정가현이 웃었다.

“네. 꽤 인연이 깊죠. 캐스팅이 잘 끝나면 <불량경찰>의 인연들이 모이게 되겠네요.”

그것도 신기했지만, 가장 의외인 건 강이든이 내건 조건이었다. 자신의 출연 여부가 조건이라니. 얼떨떨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레비 올란도가 도현의 연기를 보기 위해 촬영지에 남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여기, 시놉시스랑 트리트먼트는 먼저 전달드렸죠? 이건 대본이에요.”

상황을 살피던 서승아가 도현에게 대본을 건넸다. 도현이 받아 들자 그녀가 말했다.

“추후에 수정이 들어갈 수는 있지만, 큰 변화는 없을 거예요. 대본은 나오는 대로 메일로 보내드릴 예정이고요.”

도현이 대본을 응시하고 있자 서승아가 조금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한 명이지만, 배우로 치면 두 명이에요. 아역이라고 해서 비중이 절대로 적거나 그러지 않아요. 거의 매 화마다 등장할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역 배우가 아니라 또 다른 주연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랑 피디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고, 또 그렇기 때문에 배우님을 만나기 전까지 드라마화가 어려웠던 거고요.”

도현은 그녀의 진지한 눈빛을 천천히 살피다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어떤 배우가, 작가가 네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는데 싫다고 할까. 원래부터 이 작품에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더욱 확신이 들었다.

“…유념할게요.”

그 후로 몇몇 이야기들이 더 오갔다.

“제작사는 생각해 두셨습니까?”

매니저의 질문에는.

“후보는 여럿 있지만, 아직 이야기만 오가는 단계예요. 옛날에 <불량경찰> 외주 맡겼던 곳도 있고… 하루랑 늘품이랑 이야기가 오가고 있어요. 아직까진 미정이라 혹시 원하시는 제작사가 있다면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도현은 한국의 제작사에 관해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경찬호에게 위임했다. 그는 열의에 차서 후에 소속사 측에서 다시 연락드리겠다며 말했다.

그다음에는 계약 이야기가 오갔다.

그렇게 두 시간 후.

다섯 사람은 서로를 만족스러운 얼굴로 응시했다.

“드라마 합류 소식은 언제 발표할 예정이십니까?”

“강이든 배우님 측이랑 연락하고, 그쪽도 확정 나면 차례로 언론에 공표하려고요.”

경찬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난리 나겠군.’

강이든-이도현 라인업이라.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자 배우와 무려 할리우드 스타라는 이명을 달고 있는 어린 배우의 만남이었다.

그것도 강이든은 <불량경찰> 이후 영화만 찍다가 일 년의 휴식기를 거친 오랜만의 드라마 복귀이고, 이도현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찍는 첫 작품이나 다름없었다.

어마어마하게 쏟아질 스포트라이트가 기대되는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