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4화. 운명적 만남? (8)
검은 옷을 입은 스태프들이 집으로 줄줄이 들어왔다. 미리 안내받긴 했지만, 당황스러운 심정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스태프들은 감각적으로 꾸며진 넓은 실내에 놀랐으나 금방 적응했다. 여러 스타의 집을 방문해 본 짬밥이었다.
“침실에 세 개, 욕실에 두 개, 거실에 네 개, 주방에 두 개, 서재에 두 개, 그리고….”
한 스태프가 와서 카메라 설치 위치와 개수를 알려주었다. 설명을 듣던 이장혁과 서혜나가 어질어질한 표정이 되었다.
“아, 네, 네… 침실에 셋, 욕실에 넷 아니 둘….”
아빠는 혼이 나간 기색이었다.
“카메라는 언제든지 끌 수 있으니까 여기, 이 부분으로 온오프 하시면 돼요. 혹시 실수로 가리고 싶은 사생활이 찍히셨다면 말씀해 주시면 저희 쪽에서 지워드릴 거고요. 그런 부분에서는 철저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태프는 기합이 확 들어가 있었다. 도현은 흘끔흘끔 와닿는 그들의 시선을 느꼈다. 아무래도 도현의 존재가 좀 신기한 모양이었다.
“리얼리티 촬영은 처음이시죠?”
“아, 네….”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시면 돼요. 그리고 미리 알려주신 일정에 맞춰서 내일 감독님을 비롯해서 스태프들이 촬영하러 올 예정입니다. 더 궁금하신 점 있으실까요?”
“진짜 평소처럼 생활하면 될까요?”
“네! 그걸로 충분해요!”
다시 생각해 봐도 어느 부분에서 사람들이 흥미로워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다는 이들이 잘 알 테니까.
“카메라 위치 헷갈리시면 여기 종이 보시고 확인해 주시고….”
스태프의 설명을 듣던 도현이 물었다.
“제가 따로 주의할 부분이 있을까요?”
“어… 혹시 평소에 혼잣말 자주 하시나요?”
“…그렇진, 않은데.”
물론 하긴 한다. 도현에게는 상대에게 건네는 말이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혼잣말처럼 보일 터였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덩어리님한테 말을 거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
“아무래도 사운드가 있는 편이 좋아서… 자연스럽게 혼잣말 몇 마디 정도 해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한번 해볼게요.”
그냥 평소에 덩어리님에게 하는 말을 혼잣말처럼 바꾸면 되겠지. 별로 어려운 느낌은 아니라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모든 카메라 설치가 끝나고 스태프들이 사라졌다.
“무슨… 폭풍이 왔다 간 기분이네.”
북적거리던 인원이 빠지자 어쩐지 휑해진 집을 보며 이장혁이 중얼거렸다. 도현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부터 촬영 시작이랬지?”
“네.”
“난 그럼 카메라 위치 좀 익혀놔야겠다. 너무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가 터덜터덜 걸어 다니는 것을 본 도현은 집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리얼리티 예능.
진짜 하는구나….
괜히 어색한 기분에 도현도 이장혁 뒤를 따라다니며 카메라 위치를 확인했다. 온오프 하는 걸 연습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일단 꺼두었다가 자기 직전에 켜놓기로 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저녁 시간이 다가왔다. 도현은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카메라가 저를 쳐다보는 느낌에 기분이 미묘해졌다. 카메라가 나를 찍을 땐 항상 연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카메라에 연기하는 내가 아닌 그대로의 내가 나온다니까 마음이 복잡했다. 왠지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느낌. 마음은 복잡했지만,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진 몸은 금방 꿈속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밤이 저물었다.
* * *
깜빡, 깜빡.
아침 여섯 시.
도현은 눈을 떴다. 여느 때처럼 잠깐 누운 자세 그대로 잠기운을 떨쳐내고선 부스스하게 몸을 일으켰다. 침대 맡에 놓인 실내화를 신고 걸어가 커튼을 젖혔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어두운 하늘이 그를 반겼다.
뒤를 돈 도현은 반짝이는 카메라 렌즈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맞다. 촬영 중이었지. 아침이라 조금 멍했던 정신이 확 맑아졌다.
평소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도현은 애써 카메라의 존재감을 잊으려 노력하며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놓인 카펫은 카펫 겸 매트로 사용 중이었다. 푹신해서 스트레칭을 하기 딱 좋았다.
쭉쭉 몸을 늘리고 나니 밤사이 굳었던 몸이 부드럽게 풀리는 게 느껴졌다. 한결 산뜻해진 기분으로 욕실로 향했다. 가볍게 세수한 후, 방으로 돌아와 전날 읽던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정원으로 나갔다.
앞마당에는 책을 읽는 걸 좋아하는 도현을 위해 흔들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에 앉아 소설을 이어서 읽고 있자니 거실 불이 켜지는 게 보였다. 부모님이 기상한 모양이었다.
책을 덮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촬영을 위해 온 방송국 사람들이었다.
“<전지적 참견쟁이들> 감독 도정수입니다. 오늘 함께하실 스태프분들이고요.”
도현이 곧바로 문을 열어줄 줄은 몰랐는지 놀라던 그가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사복을 차려입은 그들과 잠옷 차림인 저를 번갈아 보다가 조금 멋쩍은 기분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래도 어쩔 수 없으니까.
도현은 그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눈 후 집으로 들어왔다. <전지적 참견쟁이들>은 아침 기상 장면은 미리 설치해 둔 카메라로 찍고, 나머지는 감독이 직접 촬영하는 예능 프로였다.
‘그렇게 많은 카메라가 필요했나.’
잠깐 의아했지만, 그럴 수도 있지하며 넘겼다.
“어… 도현아 왔, 어?”
이장혁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고 굳었다. 이내 얼굴 근육을 풀고 친절한 낯으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들은 신경쓰지 마시고 평소처럼 생활하시면 됩니다.”
“예, 예. 그럼요.”
뻣뻣하게 대답하는 이장혁은 썩 믿음이 가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서혜나가 그의 어깨를 툭 치고는 누가 보면 자기를 촬영하는 줄 알겠다며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그는 조금 긴장이 풀린 듯 픽 웃었다.
“아까 정원에 나와 계시던데….”
“아, 아침에 부모님이 기상하시기 전에 산책하거나 책을 읽어서요.”
“그럼 그 장면부터 다시 찍을 수 있을까요?”
“어… 네. 당연히요.”
왠지 설정 샷을 찍는 느낌에 모호한 표정을 짓던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곤 정원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아직 정원에서 산책하거나 책을 읽을 시간이기는 했으니까.
“항상 이 시간에 일어나세요?”
“원래 기상 시간이 여섯 시예요. 그리고 일곱 시 정도에 부모님이 일어나시면 그때 같이 아침 식사를 하고요.”
그렇게 대답하며 아까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옆에서 촬영 중이니 신경 쓰일 줄 알았는데 책을 읽기 시작하니 금방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도현아, 밥 먹자!”
서혜나의 부름이 있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도현이 약간 당황해서 도정수 감독을 쳐다보았다.
“제가 너무… 말이 없었죠?”
“하하. 집중력이 뛰어나신 것 같던데요. 그리고 아까처럼 저는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네….”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떨떠름히 고개를 끄덕인 후 안으로 들어갔다. 막 지은 아침 식사가 도현을 반기고 있었다.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끝내고 출근하는 부모님을 배웅했다.
배웅을 끝낸 도현이 샤워를 마친 후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돌아와 선반을 열었다. 키가 조금, 아주 조금 부족한 도현을 위해 바닥에는 작은 계단이 놓여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 선반에서 코코아 통을 꺼낸 도현이 유리컵에 가루를 탈탈 털어 넣었다.
초콜릿, 초콜릿이 어디 있지. 주방을 기웃거리며 초콜릿 통을 찾아다닌 도현이 한구석에 놓인 통을 발견하고 꺼내 들었다. 촬영 때문에 정리하다가 이곳까지 온 모양이었다.
초콜릿을 접시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30초 돌린 뒤 코코아에 넣었다. 그 뒤 얼음까지 동동 띄운 도현이 만족스러운 눈으로 유리컵을 응시했다. 그때 도정수 감독이 갑자기 잔을 확대해서 찍었다. 도현은 멀뚱히 쳐다보다가 카메라가 멀어진 후에야 잔을 들고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은 도현이 코코아를 한 입 마시고 감탄했다. 역시 초콜릿을 넣어야 맛있어. 혼잣말을 해 달랬으니 부러 소리 내어서 말해보았다.
이 정도면 자연스러웠겠지. 뿌듯해진 도현이 TV를 틀었다. 이 시간대에 챙겨 보는 뉴스였다. …뉴스를 본다고? 도정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꾸몄다고 보기엔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한참 보고 있으려니 테이블에 올려둔 핸드폰이 울렸다.
[진 레이시]
- 도리! 뭐 하고 있었어?
“진? 학교 끝났어?”
- 응. 지금 밴드부실 가는 중.
반가운 전화에 도현이 미소를 띠고 대화를 나눴다. 갑작스럽게 나오는 유창한 영어에 스태프들이 다소 놀란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진. 이제 끊어야 할 거 같아. 매니저님이 올 때가 돼서.”
- 아, 나도 부실 도착했어!
“어쩐지 드럼 소리가 들리더라.”
- 다들 미리 와 있어서 그래. 그럼 문자 해! 아! 잠깐! 혹시 내 목소리 들려?
도현이 도정수 감독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들려. 말하자마자 진이 밝게 말했다.
- 우리 도리토스 잘 부탁드려요! 생긴 것만큼 순한 애라 제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 다비드! 너도 인사해!
- 난 싫어!
영어를 이해한 몇몇이 소리 죽여 웃었다. 투닥거리는 소리가 잠시 들리더니 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다비드는 싫다네. 하여간. 아무튼 나 이제 진짜 가봐야 해. 문자 잊지 말고!
“알았어.”
전화를 끊자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자 평소처럼 캐주얼한 차림의 경찬호 매니저가 보였다. 도현이 문을 더 활짝 열며 말했다.
“잠깐만 안에서 기다려 주시겠어요? 양치만 하고 나갈게요.”
“천천히 하세요.”
진의 전화를 받느라 미리 못 했다. 다행히 매니저는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문을 열자마자 드리워진 카메라는 신경 쓰이는 것 같았지만.
도현은 양치를 끝내고 방 한구석에 두었던 가방을 어깨에 멨다.
“가요.”
<전지적 참견쟁이들>의 본격적인 촬영은 이틀.
하루는 별다른 스케줄이랄 게 없는 오늘의 일상적인 장면을 찍는 거였고, 하루는 내일 있을 화보 촬영을 중심으로 찍는 거였다.
아무튼, 오늘은 그야말로 도현의 일상 그 자체였다. 매니저의 차에 타서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실내 양궁장이었다.
의외의 장소에 몇몇 스태프들이 어리둥절해졌다. 할리우드 스타와 양궁? 물론 취미로 배울 순 있지만 조금 뜬금없는 건 사실이었다.
“아! 도현이 왔어?”
그의 양궁 선생님이 알은체를 해왔다. 이미 이야기를 해둔 덕분인지 카메라와 그 외의 인원들에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아니면 아시안 게임 우승자 출신이라 카메라에 익숙한 건지도 몰랐다.
도현이 보호 장비를 착용하는 사이 코치님의 가벼운 인터뷰가 끝났다.
“어디 보자… 이제 장비 착용은 완전 능숙하네. 잘했어. 일단 밴드로 몸부터 풀자.”
이어서 밴드를 활용한 준비 운동이 시작되었다. 적당히 이곳저곳을 푼 후에는 밴드로 활쏘기 자세 연습을 들어갔다.
다리는 나란히. 양발은 가지런히. 척추는 곧게. 골반은 틀어지지 않게 고개만 돌려서 스탠스.
제법 폼이 나오는 모양새에 도정수 감독이 열과 성을 다해서 도현을 찍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코치가 흐뭇한 투로 말했다.
“언제 봐도 자세는 참 곧단 말이야.”
선생님의 칭찬에 도현은 작게 웃었다. 아무래도 바닥부터 정수리까지 꼿꼿함을 유지하는 게 발레랑 비슷한 면이 있어서 그런 거 같았다.
이어 본격적인 레슨이 시작되었다. 양궁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마자 부모님이 끌고 가서 맞춰주신 활을 들고 잡아당겼다. 처음은 늘 그렇듯 5m였다.
“활 잘 잡고 노킹. 좋아. 그대로 셋업. 드로잉….”
아직은 손에 익지 않았지만, 세상에 과녁만 남은 것 같은 감각은 꽤 즐거웠다. 도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과녁을 조준했다.
이젠 제법 탄착군이 아름답게 형성되었다. 9점 아래로 박힌 화살이 없었다. 사실 도현은 양궁에 꽤, 솔직히 말하자면 꽤 많이 재능이 있는 편이었다. 집중력이 뛰어난 것도 강점이었지만… 무엇보다 도현이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어느 각도로 어떻게 조준해야 어디에 닿을지 눈에 보이니까. 나머지는 그냥 몸이 얼마나 말을 잘 듣냐의 정도였다. 도현은 제 꿈이 양궁선수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좀… 반칙 같아서.
“오늘은 10m도 해볼까?”
가르치는 대로 쑥쑥 성장하는 제자에 신이 난 코치가 과녁판을 뒤로 밀었다. 10m라고 하면 쉬워 보였지만, 실제로 그 앞에 서면 상당히 멀게 느껴졌다. 자세를 잡는 도현을 카메라가 담아냈다. 도현은 어쩐지 자막이 눈앞에 보이는 기분이었다.
[과연 화살의 운명은…?]
대충 이런 식으로 나가겠지.
조용한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 도현이 시위를 놓았다. 곧게 뻗어나간 화살이 과녁에 박혔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 9점!”
역시 끝이 조금 흔들렸나. 도현은 아쉬운 눈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호들갑을 떨었다. 특히 코치가 그랬다.
몇 번 더 해보자며 코치가 욕심을 부렸지만, 도현의 팔 근육이 받쳐주지 않아서 적당히 레슨이 마무리되었다.
“오늘도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레슨이 끝나자 팔이 살짝 떨렸다. 나름대로 발레로 단련을 해온 몸인데도 여전히 근력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매니저와 함께 근처 식당에 들려서 점심을 먹은 후 곧장 새솔 엔터테인먼트로 향했다.
“어! 배우님!”
도현이 오자 새솔 직원들이 그를 반겼다. 익숙하게 과자랑 마실 것을 내어주는 사이 경찬호가 프린트된 종이 뭉텅이를 가져왔다.
도현의 앞으로 온 대본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