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운명적 만남? (9)
지금 당장 작품에 들어갈 수는 없더라도 괜찮은 작품은 눈여겨보는 편이 좋아서 매주 월요일마다 회사에 들러서 대본을 확인했다. 많아 보이지만, 이것도 한 차례 매니저의 손을 거친 대본들이었다.
그 외에도 화보나 광고 제의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도현이 드라마 촬영에 집중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여 대부분 거절했지만.
“아, 서승아 작가님이 메일로 보내신 대본은 확인하셨어요?”
“네. 어제 확인했어요.”
간단한 대화를 나누며 대본을 차분히 읽었다. 그러다 시간이 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사에 온 지 세 시간 만에 자리를 뜨는 도현의 뒤를 감독과 스태프들이 바삐 따라갔다. 그들이 도현을 따라간 끝에 도착한 곳은.
“원, 투, 쓰리···.”
발레 학원이었다.
아까 해놓고 또 운동한다고?
스태프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이도현이 발레를 한다는 건 알고 있긴 했지만… 일상이라고 해놓고선 아침 뉴스 볼 때를 제외하고는 잠시도 가만히 있을 때가 없었다.
도정수 감독이 경찬호를 보며 그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Q. 만난 지 두 달 정도 되셨다고 했는데, 첫인상은 어땠나요?
‘제가 배우님을 본 게 두 달 전인데… 놀라운 만남이었죠. 대표님이 부르셔서 갔는데 제가 들어오자마자 조용히 일어나서 손을 내미시더라고요. ‘만나서 반가워요, 이도현이에요.’라고 인사하시는데… 잠깐 나이를 잘못 알고 있었나 고민할 정도로 어른스럽다? 성숙하다? 네. 그런 인상을 받았어요.’
Q. 같이 지내보니 실제로 그렇던가요?
‘네. 일단 말투나 눈빛 같은 것도 그렇고 정말 차분한 편이시라서… 그리고 약간, 그런 면이 있어요. 보통 완벽주의자…라고들 하시죠?’
경찬호 매니저는 할 말이 없다고 한 것치고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꺼냈다. 그리고 이제 이 부분에는 도정수도 공감할 수 있었다. 고작 아침부터 오후까지 따라다녔을 뿐이지만 성격을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솔직히 아무리 유명한 배우라고 해도, 어린 나이니 촬영이 부산스러워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전적으로 그의 착각이었지만.
그렇다고 분량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도현이라는 인물 자체가 방송을 탄 적이 거의 없어서 그냥 일상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소재일뿐더러, 양궁이나 발레같이 의외의 취미 활동들은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요소였다.
무엇보다.
Q. 배우님에 관해서 제보하실 게 있다고 하던데…?
‘네, 저는 배우님의….’
이어졌던 인터뷰를 떠올린 도정수가 웃음을 베어 물었다. 그사이, 발레복으로 환복한 도현이 레슨실에 들어가 몸을 풀었다.
아침에 했던 스트레칭보다는 좀 더 본격적인 느낌이었다. 하나둘씩 같은 클래스를 듣는 아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남자아이도 찾는 학원인지 도현을 제외하고도 두엇 정도 보였다. 아이들은 저마다 카메라를 보고 쭈뼛대거나 호기심을 보였다.
“자, 수업 시작하자!”
발레 선생님이 들어오자 질서 정연하게 서는 아이들에 스태프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곧 감탄으로 바뀌었다.
마누엘의 스파르타 같은 수업을 따라간 게 헛된 일은 아니었는지, 한국으로 돌아오자 일반 취미 반에서 도현의 수준의 맞는 반은 없었다. 도현은 결국 전공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예중 진학을 목표로 하거나, 예중에 진학한 아이들이 속한 클래스였다.
전공 반 아이들은 깃털 같은 몸을 쭉쭉 잘도 움직였다. 그 속에 도현이 있었다. 도현은 그 아이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었다.
‘취미라며?’
도정수 감독은 잠깐 어이가 없어졌다. 이게 취미 수준인가. 발레라길래 귀엽거나 재밌는 장면이 연출될 줄 알았는데…. 물론 귀엽긴 했다. 그보다 대단함과 멋있음이 더 크게 느껴졌을 뿐.
음. 도정수가 침음을 삼켰다. 이거, 방송 나가면 발레를 배우는 남자아이들이 많아질 거 같지. 이도현은 단연코 대한민국에서 어린 아들을 둔 부모의 워너비였다. 그냥 나와서 발레 하는 모습만 보여도 따라 할 부모가 가득한 마당에 이런 장면이라니. 아무래도 대한민국은 때아닌 발레 열풍이 불 모양이었다.
도정수 그조차도 놀라고 있으니까. 발레라고 하기에 남자애가 웬 발레냐고 독특하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흐트러짐 없이 움직이는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그런 동작들을 취하니 바른 자세나 몸의 곧은 정렬이 더욱 돋보였다.
희고 날렵한 턱선이나 팔랑일 때마다 음영이 지는 속눈썹, 이도현 하면 생각나는 새카만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더해지니 분위기가 사는 것도 있었다. 역시 얼굴이 최고인 것인지, 동양에 왕자가 있다면 꼭 저런 모습일 거 같았다.
도정수는 발레 레슨을 화보로 만드는 소년에 속으로 감탄했다. 그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발레 학원 등록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발레 수업까지 끝이 나자 경찬호는 도현을 집에 데려다주었다. 일정이 끝난 모양이라고 생각할 때였다.
도현이 열심히 무언가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카메라의 존재를 깨달았는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 들어갈 드라마 대본이 도착해서 보고 있어요. 부모님이 퇴근하실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연습하려고요. …아, 이건 찍으시면 안 돼요. 아직 방영 전이라.”
그렇게 연습실에 들어간 도현은 잠깐 선심 쓰듯이 카메라를 들였다가 내보낸 후 나오지 않았다….
“…….”
“…어떡하죠?”
거실에 남겨진 도정수와 카메라 팀은 망연한 얼굴로 도현이 내어준 차와 간식을 보았다. 아침엔 분명 촬영이라고 신경 썼으면서…?
결국 도정수는 똑똑 노크하고 들어간 후 연습실에 설치해둔 카메라만 켜달라고 부탁했다. 곤란한 표정을 하는 것에 음소거 기능을 켜둘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설명-이라고 쓰고 사정이라고 부른다-하자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나온 건 현관 도어 록을 여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딸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도정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도현은 들어갔을 때와 한 치의 다름이 없는 얼굴로 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건 식사 준비였다.
도현은 작은 몸으로 뽈뽈대며 주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주방은 확연히 분업화된 모습이었다. 이장혁은 재료 손질을, 서혜나는 요리를, 도현은 상차림을.
보기만 해도 흐뭇한 미소가 나오다 못해 ‘화목한 가정’이라는 교육 영상으로 나와도 될 법한 모습이었다. 도정수 감독은 문득 경찬호의 ‘완벽주의자’ 발언을 이해했다.
도현의 생활은 대부분이 그린 듯이 완벽했다. 세상에 정말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고? 라는 생각이 들리만치. 촬영을 의식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경찬호의 인터뷰나 이 가족의 일상적인 태도를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큼, 의식했다기엔 너무 편해 보이던데.’
연습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던 도현을 떠올린 도정수 감독의 표정이 조금 아연해졌다. 할리우드 배우는 적응력도 남다른 건지 아니면 카메라 정도는 일상인 건지 오후를 지나간 때부터 저를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도현은 어디론가 향하다가 멈칫했다. 습관적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할 뻔했다. 다행히 완전히 실수하기 전 발걸음을 멈춘 도현은 일시 정지 상태에 빠졌다.
바이올린을 켜지 않으면… 뭘 해야 하지?
항상 이 시간에 하던 것을 못 하게 되자 일시적인 혼란에 접어들었다. 제이 로빈어로 하면 스턴 상태였다. 보통 정신 수련을 할 때 움직임을 무의식의 단계로 끌어 올린다고 한다던가. 도현에게는 일상 자체가 바로 그 단계였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던 규칙이 깨지니 당황스러웠다.
내일은 뭘 해야 하더라.
“아.”
도현은 할 일을 생각해냈다. 곧장 서재로 가서 한 책장 앞에 섰다. 책장에 꽂힌 책들은 온통 패션 잡지였다. 적당히 몇 권을 빼 들어 거실로 향했다.
“화보 때문에?”
“네.”
“엄마도 같이 보자.”
서혜나가 옆에 와서 앉았다. 두 사람은 잡지를 넘겨 가며 이 자세는 괜찮고, 저 자세는 어려울 것 같고, 이건 참고하기 좋은 거 같고 등등, 이런저런 의견을 나누며 몇 권을 독파했다.
그러고 나니 저녁 시간이었다.
‘이제 노는 건가?’
방으로 향하는 도현에 도정수는 기대를 담아 카메라를 추켜올렸다.
그리고.
‘저게 뭐…, 과학책?’
책상 앞에 앉은 도현이 두꺼운 책을 꺼내 들었다. 카메라를 가까이 가져가자 소설도 아니고 대본도 아니고 잡지도 아니고 무려 과학서였다. 책을 읽는 눈동자가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을 보듯이 빛났다.
도정수 감독은 한때 기사로 접했던 것을 떠올렸다. AMC 시험 만점자라던가. 그 정도 하려면 이렇게 살아야 되는 것인가. 그가 보아왔던 스타의 일상 중에 제일 인간미가 없었다. 제일 어린데도 말이다. 이제는 존경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도정수 감독은 카메라를 내렸다.
“이게 마지막 일정이니?”
어느새 자연스럽게 말을 편하게 놓기 시작한 도정수였다. 그의 물음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정수는 스태프들에게 철수를 지시했다.
도현이 어리둥절하게 보고 있으려니 한 스태프가 와서 설명을 해주었다.
“기상할 때처럼 나머지는 방에 설치된 카메라로 찍을 거예요. 카메라만 켜놓고 갈 테니까 오늘 하셨던 것처럼 평소처럼 지내시면 됩니다.”
잠깐 촬영이 멈추고 감독을 비롯한 촬영 팀 배웅이 이어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졌던 촬영이 드디어 끝이 났다. 도현은 촬영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가기 전.
“저… 괜찮을까요? 제가 너무 평범하게 지내서….”
슬그머니 물어오는 도현에 도정수는 잠시 ‘진심인가’ 하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물론 도현이 스펙터클하고 드라마틱한 하루를 보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평범하다’라는 표현을 붙이기엔 무리가 있었다.
“충분히 괜찮아. 그리고 내일 화보 촬영도 있으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아. 다행이네요.”
그제야 도현의 얼굴이 조금 펴졌다. 순식간에 생기와 함께 앳된 미소가 번지는 얼굴에 스태프 몇 명이 급습을 받은 것처럼 ‘헉!’ 하는 소리를 내었다. 도정수는 깨달았다. 인간미 없는 할리우드 스타는 미모마저도 인간 같지 않았다.
그가 돌아가고.
도현은 방으로 돌아와 읽던 페이지를 펼쳤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는 6학년까지 있지만, 도현이 다닌 델마 아카데미는 5학년까지가 끝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입학까지 반년이라는 시간이 붕 떴다.
비록 학교는 나가지 않고 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손에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도현은 이 반년이라는 시간을 오히려 기회 삼아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도현에게는 이편이 더 익숙했다. 병원에 있을 당시 도현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궁금한 것들을 곧잘 찾아보고는 했으니.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즐기고 싶은 것을 즐기고 공부하고 싶은 것을 공부하는 생활이었다. 가끔 친구들이 그리워질 때면 한참을 멍하니 있곤 하지만… 그래도 그의 상냥한 친구들은 도현이 외롭지 않도록 곧잘 연락해오곤 했다.
정말로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시침이 10시에 가까워지자 도현은 책을 덮었다. 조금 피곤한 눈을 문지르며 침대로 향했다. 꾸물거리며 이불 속에 들어가려니, 몇 분 지나지 않아 방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자니?”
“아직요.”
“엄마도 일찍 자려고. 잘 자, 도현아.”
“엄마도요.”
가벼운 굿나잇 인사가 끝나자 문이 열렸던 때처럼 조용히 닫혔다. 도현은 평온한 적막에 감싸여 천천히 눈을 감았다.
리얼리티 예능은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그냥 일상에 카메라 몇 대가 추가된 정도. 물론 그렇다고 다른 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규칙적인 일상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나 제법 한국에 잘 적응하고 있었네. 불현듯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리얼리티 예능만큼이나 별거 아니었다. 그렇게 두려워했던 지난 과거가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도현은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생각을 구름처럼 흘려보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을 지나 내일을 바라보았다.
내일은 화보 촬영이구나.
오랜만의 촬영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설레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도현은 긴 하루를 끝내고 잠에 빠졌다. 카메라의 미약한 불빛만이 방 안에서 조용히 깜빡거리는 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