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0화. 운명적 만남? (14)
“…쟤 걔 아니야? 그, 영화에 나왔던.”
“어, 맞는 거 같은데?”
하나둘씩 알아보는 아이들이 생기자 금방 분위기는 소란스러워졌다. 저마다 숙덕대는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평가는 엇갈렸다. 되게 잘생겼다, 혹은 의외로 평범하네.
그러던 중 한 아이가 말을 걸었다.
“저… 안녕.”
쭈뼛거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인사해오는 아이에 진지한 낯으로 흰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곱슬기가 있는 다갈색 머리카락이 실내등 아래에서 부드러운 빛을 반사했다.
그보다 좀 더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눈앞의 소년을 담으며 곱게 휘었다.
“응! 안녕!”
“…어, 너, 너도 가연예중 오는 거야?”
그 해사한 미소에 당황해 한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버린 아이가 더듬으며 말했다가 후회했다. 그럼 그러려고 시험 보지, 뭐 하겠어! 세상 바보 같은 질문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달아오를 때였다.
“응. 합격하고 싶어. 너도 그래?”
“어? 아…, 응. 나도!”
“그럼 둘 다 합격해서 학교에서 보면 좋겠다!”
그걸 아닌 척 엿듣던 같은 대기실의 아이들은 생각했다. 쟤 성격 엄청 좋구나. 그 후로 대기실 안이 좀 더 시끄러워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나 보던 아역 배우다 보니 차갑거나 대하기 어려울 거라 여겼는데, 그 편견이 깨진 탓이었다.
“저, 있지. 너 촬영하면서 본 연예인 중에서 누가 제일 잘생겼어?”
“응…? 다들 잘생기셔서….”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진짜야! 정말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다들 잘생기셨어!”
무슨 질문을 해도 부드럽게 받아주거나 재밌게 대답하니 여기저기서 말을 걸어왔다. 친절하게 대답해 주던 소년의 눈에 점차 곤란함이 매달렸다. 소년은 티 안 나게 벽에 걸린 시계를 흘긋했다.
…곧 내 차롄데.
시험에 대한 긴장으로 심장은 초조하게 뛰었다. 대본을 보거나, 하다못해 조용히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싶은데…. 그래.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소년이 결심하며 입을 열었다가.
“너는 그럼 무조건 합격이겠다! 이미 배우잖아.”
“으응, 아니야. 나도 같은 수험생인걸.”
“그래도 다르지~.”
…응, 포기하자.
소년은 그냥 신이 나 조잘대는 아이들을 상대하며 방긋방긋 웃었다. 이럴 땐 예쁘게 웃으면 그를 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한 눈매나 외양이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그때였다.
“근데 너 걔도 본 적 있어?”
“누구 말이야?”
“이도현!”
반사적으로 대답했던 소년이 멈칫했다. 모두가 머릿속으로 신경 쓰고 있던 이름이 나오자 단숨에 여러 얘기가 쏟아져 나왔다. 걔가 여기 온다는 말 있던데 진짜일까? 에이, 더 좋은 데 가겠지! 가연예중도 손꼽히는 곳이잖아!
“…어, 난 본 적 없어.”
“진짜? 하긴. 걘 한국에 잘 없었으니까.”
소년은 ‘맞아’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아이들은 제각각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소년은 아이들의 수다 소리를 들으며 애써 실망스러움을 감추었다.
‘오늘 만날 줄 알았는데.’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니 약속을 한 건 아니다. 다만 소년은 최근 몇 달간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원래 지원하려던 중학교는 가연예중이 아니었다. 여기는 소년의 집에서 좀 거리가 있는 편이었으니까.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교로 진학을 희망했으나 막상 지원서를 쓸 때 소년은 홀린 듯이 가연예중을 체크했다.
엄마는 소년의 선택에 의문 어린 눈을 하긴 했으나 별다른 말 없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소년이 원래 응시하려던 학교보다 가연예중이 명문으로 유명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냥 상관없는 걸 수도 있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은 시험 날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목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끝이 아렸다. 속이 좀 울렁이는 거 같기도 했다.
그리고 이도현이,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존재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과 가연예중에 지원했다는 소식이 연달아 나왔다.
비이성적인 생각이지만, 마치 운명 같았다.
그래서 소년은 내심 기대했다. 오늘 만나기 때문일 거야. 그리고 너와 난 무언가 인연이 있을지도 몰라. 내가 텔레비전에 나온 널 보고 동경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닌 거야.
대기실 문턱을 밟을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모든 대기 인원이 들어서고 문이 닫힐 때까지도 기다리던 이는 오지 않았다.
연기과의 시험은 일정 맨 마지막에 있었다. 그러니 오늘이 분명하다고 확신했던 소년은 원하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깊이 실망했다.
‘아냐. 다른 대기실에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래로 처지려는 어깨에 부러 힘을 주어 씩씩하게 허리를 폈다. 벌써 기운이 빠질 수는 없었다. 곧 있으면 시험이었으니까!
그리고.
“3번, 3번 학생?”
“네!”
“실기 시험실로 이동할 차례야. 정희운 맞지?”
“네, 맞아요.”
소년, 정희운이 대답하며 씩씩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정희운! 잘 해!”
“응! 고마워!”
아까까지 떠들던 아이 중 한 명이 응원해 주자 희운이 화사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탁. 희운이 나간 대기실에는 잠깐 정적이 찾아왔다. 몇몇은 다시금 수런수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몇몇은 긴장이 되기 시작한 건지 자리에 앉아 각자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아까 걔 되게 착한 거 같지 않아?”
“맞아. 유세 같은 것도 없고.”
“배우가 뭐, 대수인가. 엄마가 다 우리랑 같은 사람이랬어.”
“그렇지? 그런 거 같더라.”
그때였다.
“어!”
그런 그들의 신경을 빼앗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까 희운을 응원해 주었던 소녀 한 명이 제 핸드폰을 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뭐야, 왜 그래?”
“…대박.”
“뭔데!”
그 심상치 않은 기세에 주변에 앉은 친구들이 관심을 보였다. 소녀는 떨떠름하게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소리 내어 말했다.
“다른 대기실에… 있대.”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누, 누가?”
무언갈 짐작한 아이가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잠시 대기실에 긴장이 감돌았다. 이내, 소녀가 입을 열었다.
“이도현, 이도현 말이야!”
그리고 난리가 났다.
“뭐야, 여기 왜 이렇게 시끄러워. 너네들 시험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 소란에 밖에서 감독하고 있던 선생님이 안으로 들어와 물었다. 엄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잠깐 움츠러들긴 했지만, 어디서나 용기 있는 아이는 존재하는 법이었다.
“저, 선생님….”
“왜?”
“지, 진짜 이도현이 시험 보러 왔나요?”
“…아이고.”
상황을 깨달은 가연예중의 교사가 애매한 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이렇게 시끄러웠구만. 시험 대기실에서 소란은 안 될 말이었지만, 영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원 서류가 들어오고 나서 한동안 교무실 교직원실 구분 없이 시끄러웠으니까 말이다. 교사들은 모였다, 하면 주변을 살핀 후 은근한 목소리로 이도현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른들이 그런 정도였으니 애들은 얼마나 더 할까. 아이들을 혼내려던 교사는 노선을 살짝 수정했다.
“조용!”
“…합!”
“그래. 우리 학교에 지원했어.”
잠깐 숨길까 고민도 되었지만, 그러면 또 ‘진짜일까, 아닐까’로 떠들어대느라 시간을 쓸 거 같아 시원하게 밝혀버렸다. 아이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졌다.
다시 소란이 일기 전에 교사는 손바닥을 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니까 이도현이랑 같은 학교 다니고 싶으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시험을 잘 봐야 해요!”
“그렇지! 나 같으면 지금 마지막으로 준비 점검이라도 하겠다. 그래야 이도현이랑 같은 학교 다닐 수 있잖아. 너희도 그럴 거지?”
“네!”
아이들의 눈이 화륵 타올랐다. 아무래도 의욕은 충분할 정도로 충전된 모양이었다. 아까와 달리 조용해진 대기실에 교사가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그쪽은 어떻게 되고 있으려나.’
실은 소란스럽게 굴고 싶은 건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도 지금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도현의 실기 시험.
거기서 그 애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 * *
그리고.
“…자기소개부터 해주십, 아니, 해볼까요?”
제2 시험장을 맡은 가연예중 교사들은 의자에 반듯이 앉은 아이를 보았다. 방금까지 다른 아이들도 앉았던 그 의자인데 왜인지 공간이 바뀐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 평가 망했다.’
이도현이 들어온 순간 면접관들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심사를 하는 게 기계가 아닌 사람이다 보니 자연히 이전의 아이와 이후의 아이를 비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랜 교사 생활을 하면서 단연코, 저렇게 온몸으로 ‘나는 연예인이 되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를 발산하는 애는 처음이었다. 연예인을 안 해도 결국엔 연예인을 할 상이었다. 본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가만히 안 둬서.
“안녕하세요, 가연 예술 중학교 연기과에 지원한 이도현입니다.”
평범하다 못해 진부한 시작 말인데 이도현이 하니 뭔가 달라 보였다. 그들은 교사였지만, 연기를 사랑하는 이들이었고, 몇몇은 현직 배우였다. 연기자들 앞에서 ‘이도현’이라는 자기소개만큼 인상적인 게 어디 있을까.
과연 방송 좀 해본 배우라는 걸까.
‘애티튜드가 다르다.’
이도현은 떨거나 초조함 없이 어떻게 보면 느긋해 보일 정도로 차분하게 자기소개를 이어나갔다. 어떻게 해야 시선을 잡아끌고 사람들이 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지 잘 아는 사람 같았다.
상황, 내용, 모두 다 빼고 태도만 보자면 어디 기업의 프레젠테이션 현장을 보는 거 같기도 했다.
‘방송에 나온 성격이 진짜였네.’
한 면접관이 생각했다. 그도 전지적 참견쟁이들- 이도현 편을 챙겨본 이였다. 그래서일까. 거기서 매니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완벽주의자라고 했지.’
확실히 상체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거나 무의식적으로 손, 발을 움직이는 것 없이 차분히 고정된 몸과 시선은 그런 인상을 주었다. 면접에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복장과 깔끔한 인상이 그걸 더 강조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가연 예술 중학교에서 저의 이러한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그사이 자기소개가 끝이 났다. 박수 쳐야 할 거 같은 기분을 간신히 참아낸 면접관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간단한 문답이 오갈 차례였다. 그때.
“이건 진짜 개인적인 호기심에 묻는 건데요.”
누군가 말문을 떼었다.
“우리 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아니라 한국에 온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도현 수험생이 있었던 할리우드가 연기자들의 꿈의 무대잖아요.”
면접이라고 해서 꼭 공적인 질문만 오가는 건 아니었다. 어리다 보니 분위기를 풀어주려고 잡담도 했고, 아이들의 성격이나 진심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물론 이 경우는 질문 앞에 던지는 서두처럼 개인적인 호기심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다른 면접관도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그들 역시 궁금했던 것이다. 그 관심 속에서 몇 초간 침묵하던 이도현이 입을 열었다.
“저도 고민을 많이 했던 문제예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 어디서든 내가 성장할 수 있다면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는 거였어요. 저는 한국에서 제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 명의 배우로서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고, 그래서 오게 되었습니다.”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듯 마주쳐오는 시선이 또렷했다. 점수를 매길 수 있다면 백 점 만점에 백 점인 대답이었다. 면접관들은 저마다 어째서 저 아이가 어린 나이부터 그런 유명세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한 면접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들었어요. 그럼 이제 연기를 볼 수 있을까요?”
이도현의 연기!
면접관들이 다시금 눈을 반짝였다. 그 이도현의 연기라니. 궁금하지 않은가! 부담스러울 법도 한 시선 속에서 면접 내내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던 이도현이 부드러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시작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 웃음이 천천히 자취를 감추었다. 웃고 있을 땐 몰랐는데 무표정하니 서늘한 인상이었다. 한 면접관이 긴장과 설렘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뭐지? 약간 으스스한 느낌이….'
바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한 면접관이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왜….”
기우뚱. 목이 부자연스럽게 옆으로 꺾였다. 무구한 표정은 묵직하고 어둑한 분위기와 더해져 기이한 인상을 주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까득, 까득. 어느새 손톱은 의자의 옆면을 긁고 있었다. 얼핏 순수해 보이는 목소리지만 빛이 꺼진 눈동자에 피어오르는 혼란과 금방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것을 참는 듯 들썩이는 어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이도현이 고른 자유연기는 이 년 전에 나온 영화이자, 가연예중에 지원한 또 다른 아역 배우, 정희운을 세상에 알렸던 배역이었다.
영화 자체는 B급 수준을 못 벗어났다며 혹평받았으나 거기서 보인, 귀신이 들린 어린아이의 연기가 대단했다는 평가가 대다수였다.
끼익.
어느 순간부터 다리를 떨기 시작한 소년에 의자가 바닥과 마찰되며 불쾌한 소리를 내었다. 단단하던 눈빛과 차분한 낯은 완전히 사라지고 제가 뭘 말하는 건지도 몰라 하는 소름 끼치는 소년만이 거기에 있었다.
소년이 천천히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투정 부리는 아이 같은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러니까, 짜, 짜증나잖아.”
그러나 손바닥 아래로 드러난 입매는 말과는 다르게 찢어질 듯 둥근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웃음을 간신히 참아내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
그보다 한층 오싹한 연기가 펼쳐지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