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22)화 (323/582)

제322화. 운명적 만남? (16)

“…깜짝 놀랐네요.”

“그러게….”

간신히 차에 올라탄 도현과 서혜나가 숨을 내쉬었다. 흘긋 차창 너머를 보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보였다.

도현은 시험을 치르고 나왔을 때를 떠올렸다.

- 이, 이도현…!

- 진짜 이도현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 이도현 배우님!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알려주세요!

- 오늘 부모님이랑 오셨나요?

- 가연 예중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도현 씨!

카메라와 마이크.

셔터가 그렇게 많이 눌리는 건 공식 석상을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도현은 잠시 얼이 나간 채로 서 있어야 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 도현아!! 나 너 보러 왔어!

- 도현아! 오늘 시험 잘 봤어!?

놀라운 건 기자뿐만 아니라 그의 팬으로 추정되는 이들도 있었다는 거였다. 입학시험을 치면 어느 정도 관심이 모일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중학교까지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

“저… 한국에서 인기 많아요?”

“너? 엄마가 말 안 했던가?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맨날 네 얘기 물어보더라.”

얼떨떨하다.

미국에서 지낼 땐 그를 알아본 몇몇 이들이 사인이나 사진을 요구하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은 없었다. 이건 에드워드가 등장할 때나 있었던 일이다.

게다가.

“한국에서 한 활동도 거의 없는데….”

도현이 말끝을 흐리자 서혜나도 그 심정에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리우드 영화 매출이 가장 잘 나오는 나라 중 한 곳이 한국이거든. 괴짜들이 저번 크리스마스 때 한국에서 많이 흥행했나 봐.”

“그래서구나.”

더 자세히 말하자면 같은 피가 흐르는 한국인 아이가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에 자랑스러움과 만족감을 느끼는 탓도 있었지만.

‘말해도 이해 못 하겠지.’

겉으로는 수긍하는 척하면서 물음표를 잔뜩 띄운 눈빛을 할 게 뻔했다. 제법 아들을 잘 파악하고 있는 서혜나였다.

“그건 그렇고. 시험도 끝났는데… 연기로 뭐 했는지는 여전히 비밀인 거니?”

“아.”

서혜나의 질문에 도현이 볼을 긁적였다.

“그냥 공포 연기였어요.”

“공포 연기?”

“네. <악령>이라는 영화인데. 아세요?”

“악령? 으음…, 미안! 잘 모르겠다.”

서혜나의 대답에 도현은 내심 안도했다.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말을 덧붙였다.

“악령 빙의를 소재로 한 영화예요. 거기 나오는 장면을 연기했어요.”

“그렇구나….”

운전대를 돌리면서 서혜나는 생각했다. 면접관들 엄청 놀랐겠네. 도현과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며 자연스레 도현의 연기를 자주 접해본 그녀였다.

그런 도현이 악령 빙의 연기라.

대충 듣기만 해도 평범치 않았다. 집에 가면 영화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서혜나는 신호등에 뜬 빨간불에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리고 말했다.

“근데 의외네. 도현이 너, 공포 영화 안 좋아하지 않았어?”

“안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저 세상에 귀신, 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단 걸 알아서 무서운 걸 봐도 무섭지 않을 뿐이었다. 누구든 도현처럼 세계를 더 자세히 볼 수 있다면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오히려 도현이 싫어하는 건 고어한 영화였다. 사실 <악령>도 조금 정도지만, 흠칫하게 되는 비주얼이 있어서 보기 힘들긴 했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고른 건.

“이런, 피곤했구나. 도착할 때 깨워줄게. 자.”

도현이 창문에 머리를 기대자 졸린 거라 여긴 서혜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도현은 웅얼거리듯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냥 보는 순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 * *

“야… 이든아. 내가 말했잖아. 너무 이르다고….”

텅텅 비다 못해 휑한 회의실에 매니저가 피곤한 낯으로 푸념했다. 강이든은 별말 없이 쓸데없이 긴 다리로 터벅터벅 걸어가 제 명패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았다. 매니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약속된 시간은 10시.

그리고 지금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본 매니저가 눈을 파르르 떨었다. 9시도, 하물며 8시도 아니고… 7시 반이었다. 7시 반!

‘저 미친놈.’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에 대뜸 전화를 걸더니 ‘왜 안 와?’라고 딱 한마디 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에 매니저는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요즘 피곤하다 했더니 기어이 내가 사고를 쳤구나…! 그런 생각에 덜덜 떨며 시간을 확인하자.

[A.M 5 : 00]

매니저는 눈을 비볐다. 깜빡이는 불빛이 그를 놀리듯이 00에서 01로 변했다. 그는 이내 깊은 심호흡을 하였다. 그러지 않으면 살인을 낼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 이든아. 자라.

빡침을 억누르고 내뱉은 말에 몇 초 후 돌아온 대답은 그가 뒷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 30분. 빨리 와.

뚝.

세상은 제게 왜 이리 가혹한 시련을 내리는 걸까? 매니저는 임시 저장함에 들어간 뒤 [제목 : 잘 먹고 잘 살아라 본문 : 너랑 더러워서 더는 일을 못 하겠…]의 전송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하염없이 배회했다.

그러나 십 년 가까이 그랬듯, 포기하고 핸드폰을 덮었다. 추적추적 일어나 옷을 벗는 모양새가 좀비와 닮아 있었다.

그래. 저 미친놈 내가 건사하지 누가 건사하겠냐. 지금도 관련 업종에서 또라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지만, 저놈은 어렸을 때도 저 모양이었다.

연기할 땐 청산유수면서 평소엔 나사가 하나 빠진 데다가 말도 짧아서 여기저기서 오해를 자주 샀다. 가만히 놔두자니 중학교 때 온몸에 상처를 달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갑자기 선배들이 불러서 때렸다나. 왜 그런지 아냐고 묻자 멀뚱한 얼굴로 ‘몰라’라고 대답했다.

그날 그는 결국 제 팔자를 인정했다. 저놈 뒤꽁무니 따라다니며 수습할 팔잔가 보다. 그것도 이만큼이나 함께하다 보니 감흥조차 없어졌다.

‘미운 정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더니.’

그 말을 누구보다 절절히 느끼는 매니저였다.

5시부터 10분 만에 챙겨서 나오고, 숍에 전화해서 굽신거리며 예약 시간을 변경하고, 강이든을 태워 숍에 갔다가 KBN 방송국에 도착했다. 그 과정을 떠올리자니 눈물이 흐를 거 같았다.

“날 이렇게 달달 볶아서 일찍 오니까 좋냐? 좋아?”

“응.”

“그래, 너 좋다니 됐다….”

말로는 구박하면서 결국엔 온갖 어리광을 다 들어주는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단 걸 조금도 인식하지 못한 매니저였다.

결국 끼리끼리였다.

매니저는 의자에 몸을 늘어트리고 앉아 대본을 휘적휘적 넘기는 강이든을 보았다. 대본 리딩이라고 오랜만에 때 빼고 광내니 보기엔 참 멀쩡하고 괜찮아 보였다.

‘그래도 기운 차리니 좋네.’

새벽 5시에 깨우는 극악무도한 짓을 하긴 했지만, 오후 5시에 일어나는 해파리 같은 생활보단 이쪽이 훨씬 나았다. …나은 게 맞나? 매니저는 어째선지 회의감이 들었다. 그는 결국 몸을 늘어트리고 힘없이 말했다.

“나 잠깐 잔다. 누가 오기 전에 깨워. 아니다. 9시 되면 깨워야 해.”

“응.”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하는 게 제대로 듣긴 한 건가 의심스러울 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매니저는 별다른 말 없이 책상에 엎드렸다.

강이든은 의외로 시킨 건 성실하게 했다. 어렸을 땐 선생님들이, 커서는 감독들이 강이든을 아끼는 게 괜히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번 알겠다고 한 건 진짜 알았다는 뜻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배고프면 깨우고….”

시야가 가물가물 흐려지다가 깜깜해졌다. 얼핏 ‘응’이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ㅎ.”

“오랜ㅁ….”

“일찍….”

몽롱한 정신 위로 말소리가 들렸다. 누가 왔나…. 시끄럽게. 다시 잠이나 자야….

“……!”

번쩍.

화들짝 놀란 매니저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덤덤한 시선이 이쪽을 향한다.

“깼어?”

찰싹. 뺨을 쳐 졸음기를 몰아낸 매니저가 상황을 파악했다. 그러니까… 지금 강이든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건 이도현과 그의 매니저였다. 매니저는 소리 없이 경악하며 입가를 문질렀다. 다행히 침은 흘리지 않은 거 같았다.

“너, 내가 누구 오면 깨우라고!”

“9시 안 됐어.”

매니저는 단숨에 그 의미를 이해했다.

- 아니다. 9시 되면 깨워야 해.

그 말을 또 곧이곧대로 들은 모양이었다. 정말 곧대로 들은 건지 아니면 엿을 먹이고 싶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매니저는 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인사를 건넸다.

“피곤해서 잠깐 눈을 감고 있는다는 게… 하하. 강이든 배우님 매니저 정경웁니다. 아, 혹시 저 기억나세요? 예전에 한 번 봤는데….”

“당연히 기억나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 그래도 되나?”

물론 <불량경찰>을 찍을 당시에도 편하게 말하긴 했다. 그러나 매니저는 왠지 망설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고, 눈앞의 배우는 그때와 달리 막 연예계에 입문한 단역 배우가 아니고 할리우드의 떠오르는 별이었으니까.

조심스러운 물음에 도현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천사인가?

악마 같은 강이든만 보다가 도현을 보니 안구가 정화됨과 동시에 마음의 불순물들이 깨끗하게 씻겨져 내려가는 거 같았다. 심지어 방송국 회의실에서 쿨쿨 자던 게 웃길 법도 한데 티도 안 내고 있었다.

이든이었으면, 경멸과 한심함이 완벽한 비율로 섞인 눈빛을 보내왔을 텐데…!

“그, 그래. 그런데 굉장히 일찍 왔네.”

“네. 드라마는 단역을 해봤던 경험 말고는 없어서 설레더라고요. 빠르게 챙기다 보니까 조금 일찍 도착했네요. 아, 매니저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서두르게 됐네요.”

“아닙니다. 일찍 와 있는 게 좋죠.”

아무래도 천사가 맞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훈훈한 장면을 설명할 수 없었다. 찌릿, 째려보는 눈빛에 강이든이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근데 무슨 이야기 하고 있었어?”

“아, 강이든 선배님이 아직 아침을 안 드셨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저희가 너무 일찍 도착한 거 같아서 주변에 있는 샌드위치 집에 가려고 했거든요. 같이 가실 생각이 있으신지 여쭤보고 있었어요.”

“말 꺼내준 건 고맙지만 이든이는….”

“갈래.”

“갈래라고… 엥?”

매니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다시 물었다.

“진짜 간다고?”

“응. 배고파.”

“어… 배고플 시간이긴 한데.”

매니저가 이상한 눈으로 강이든을 보았다. 저놈이 저럴 놈이 아닌데. 필요한 상황이 아니라면 사람 대하는 걸 귀찮아하는 놈이었다. 말 짧은 것도 말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에너지 낭비가 싫어서였으니까 말 다 했다.

매니저는 아침부터 피곤하지도 않은지 똘망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도현을 보았다. 역시 특별 취급인 건가. 그리 생각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든이가 배고프다니 우리야 같이 가면 좋은데, 괜찮겠어? 혹시 불편하면 같이 안 가도 괜찮아. 이든이는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같이 촬영할 사이잖아요. 먼저 밥 한 끼 같이 먹으면 좋죠.”

이 어린 배우는 그때보다 더욱 성장한 모양이었다. 말에 여유와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래, 그럼 가자. 아, 매니저분도 괜찮으세요?”

“예, 저도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갑작스러운 아침 식사 멤버가 정해지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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