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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323)화 (324/582)

제323화. 운명적 만남? (17)

이렇다 할 친분이 없는 사이라 어색할 법했지만, 분위기는 의외로 편안하고 화기애애했다. 강이든의 매니저, 정경우가 조카들을 놀아주는 데 도가 튼 선수라는 점과 배우의 부족한 사회성을 메꿀 만큼 사교성이 뛰어나단 점이 크게 작용했다. 

그리고.

‘둘이 뭔가… 결이 비슷하네?’

그랬다.

강이든은 드라마에서 재벌가의 후계자를 맡을 거 같은 외양과 달리 독특한 성격 탓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며 어려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어린애들은 더했다.

그런데.

정경우가 도현의 안색을 흘긋 살폈다. 웃으며 말을 거는 얼굴은 편안해 보였다.

‘역시 천사였네.’

정경우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이든 때문에 사리가 쌓이는 저를 안타까이 여겨 내려준 천사인 게 틀림없었다. 그리 생각하고 나니 강이든의 슬럼프를 단숨에 해결해 준 것도, 저 무성의한 단답에 웃어주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양파 싫어하나 보네.’

도현은 샌드위치에서 양파를 쏙쏙 빼내는 강이든을 구경하고 있었다. 기술 좋게 양파만 건져내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니키도 야채 싫어하는데.’

피크닉에 가져갈 샌드위치를 만들 때 채소류만 은근슬쩍 빼던 니콜라스가 떠오른 도현이 키득키득 웃었다. 

소중한 친구가 연상된 덕분일까. 그가 좀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실 도현은 회의실에서 그를 보고 꽤 놀랐다. 그 시간에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 예상하지 못해서이기도 했고, 눈이 마주친 강이든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도현은 손에 든 샌드위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시선을 올렸다. 양파를 골라낸 사람치고 우아하게 샌드위치를 베어 물던 강이든이 한쪽 눈썹을 까딱했다.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대답 없이 쳐다보는 시선에 도현이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도현을 강이든이 차분히 기다려 주었다. 

“캐스팅 받으셨을 때 조건으로 제 합류를 얘기하셨다고 들었는데… 음. 그거 진짜인가요?”

“응.”

“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조심스레 꺼낸 말에 시원하리만치 빠른 긍정이 돌아왔다. 당황한 도현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강이든이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용기가 생긴 도현이 다시금 물었다.

“왜인지 이유를 물어봐도 돼요?”

“네 연기, 다시 보고 싶어서.”

“제 연기요?”

“응.”

“제 연기가 마음에 드셨어요?”

“응.”

“불량경찰 때 송하 역 연기요?”

“다른 것도.”

강이든은 한 영화를 떠올렸다. 눈앞의 소년과 영화의 주인공이 오버랩되었다. 생기 도는 어린 낯 위로 핏자국이 보이는 거 같았다. 아직도 가끔씩, 강이든은 유의 연기를 찾아보곤 했다.

정경우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게 대화가 되네? 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강이든의 입꼬리가 미약한 곡선을 그렸다.

쟤가 드디어 미쳤나? 정경우가 경악 어린 눈을 할 때였다. 강이든이 조금 즐거운 낯으로 말했다.

“이번 것도 기대하고 있어.”

도현이 어깨를 움찔하며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 그의 연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건 레비와 같은데 이토록 낯부끄럽게 느껴지는 건, 아마.

‘눈이 너무 초롱초롱해….’

브로콜리도 저런 눈으로 도현을 보지는 않았다. 기대 가득한 시선에 도현은 괜히 다 먹은 샌드위치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다가 생각했다. 

열심히 해야겠네.

* * *

“어, 이든 씨? 헉, 이도현 배우님도 계셨네요?”

“안녕하세요, 여우야 아역을 맡은 이도현입니다.”

“어우- 인사 딱딱하게 하지 않아도 돼요. 배우님이 저보다 더 선배신데요!”

회의실에 도착하자 그들을 반겨준 건, <구미호뎐 : 인과 연>에서 여자 주인공 역할을 맡은 서지민이었다. 그녀는 강이든과 구면인 듯 반갑게 인사하다가 도현을 보고 눈을 빛냈다.

“선배요…?”

“네. 저보다 2년 선배세요! 저 선배님 너무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캐스팅 확정되고 배우님이 참여한다는 이야기 전해 들었는데… 와. 드라마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단 생각이 든 거 있죠?”

이건 또 다른 부담스러움이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씀은 편하게 해주세요. 호칭도 그냥 이름이면 충분해요.”

“아무리 그래도 선배님이신데….”

“정말 괜찮습니다.”

목소리가 단호하게 나갔다.

촬영 내내 저보다 훌쩍 큰 성인 여성에게 ‘선배님’ 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아찔했다. 그 상황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음, 그래요. 그럼… 도현아? 헉, 이러니까 되게 친해진 거 같고 막 두근거리네요!”

“하하, 네….”

“아차. 말 편하게 하라고 했지. 그럼 나는 누나라고 불러! 어… 아니, 누나가 아니라 이모인가? 이모라고 부를래요?”

서지민은 누가 봐도 이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니었다. 프로필에는 스물넷이라고 나와 있던데 실제로 본 서지민은 그보다 좀 더 어려 보였다. 통통 튀는 발랄한 인상과 턱 아래서 살랑이는 오렌지 브라운 컬러의 머리카락 덕분인 거 같았다.

“그럴게요. 그런데 지민 누나도 일찍 오셨네요.”

미국에선 사용할 일 없는 호칭이었다 보니 낯설긴 했다. 도현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말하니 서지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랑스러운 인상이 도드라졌다.

“…와. 저 방금 살면서 처음으로 동생이 없는 게 아쉬워졌어요.”

나오는 건 주접이었지만. 한참을 호들갑을 떤 서지민이 그제야 도현의 질문에 답했다.

“네. 아니, 응! 일찍 와 있는 게 좋을 거 같아서… 그나저나 두 사람은 오는 길에 만난 거야?”

“강이든 선배님이랑 제가 너무 일찍 와서 아침 식사하고 오는 길이에요.”

“둘이서?”

“네.”

“아… 아깝다! 나도 조금만 더 일찍 올걸!”

진심으로 아쉽다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미련이 일렁이는 촉촉한 눈으로 물었다.

“다음엔 저랑도 같이 밥 먹으러 가요.”

그리고 그 옆을 보더니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이든 씨도 뭐… 같이 가시든가요.”

“…….”

“또, 또! 또 대답 안 하죠!”

그 반응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강이든의 매니저가 도현에게 속삭여 주었다. 대학 선후배 사이거든. 친근한 듯 아닌 듯 애매한 분위기의 원인을 깨달은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배우들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정동연이라는 배우가 등장했을 땐 여기저기서 아는 척을 해 왔다. 연예계의 잔뼈가 굵은 배우 같았다.

적정 거리를 유지하고 공적인 대화만 나눴던 다른 배우들과 달리 강이든과도 친분이 있어 보였다. 그의 성격을 익히 아는 듯, 그를 대하는 정동연의 태도는 무척이나 능숙했다.

도현도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아이를 좋아하는지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게, 이번 촬영을 함께하는 사람들은 다 좋은 분인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의자가 너무 높은 거 아니야?”

“헉. 발 받침대 가져올까요?”

“에이, 물밖에 없나? 음료수는 없어? 우리 도현이는 무슨 음료수 좋아하니?”

“…….”

도현은 혹시 그들이 자신의 나이를 13살이 아니라 3살로 착각한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 껄껄 웃는 얼굴에 떠오른 건 장난기라 웃기긴 했지만.

시각이 열 시에 가까워지자 드라마의 피디와 작가도 등장했다. 정가현은 들어오자마자 눈으로 도현부터 찾았다. 그리고 성인 배우들에게 귀여움을 받는-본인은 그렇게 느끼는지 모를 일이었다- 도현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다들 일찍 오셨네요.”

“아, 피디님. 작가님도 안녕하세요.”

도현은 둘의 등장에 살았단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이 나타나자 도현을 둘러싸고 있던 배우들이 각자 명패가 적힌 자리로 향했기 때문이었다.

피디와 작가는 배우들에게 모두 인사를 건넸다. 역시 가장 관록이 높은 것인지,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넨 건 정동연이었다. 한 명씩 인사를 나누고 나서 정가현 피디는 회의실을 쭉 둘러보았다.

“음… 아직 안 오신 분이 계시네요.”

시간은 어느새 10시를 넘어 5분경을 가르키고 있었다. 정가현은 웃는 낯으로 스케줄이 밀리신 거 같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늦어서 죄송합니다! 도로가 막혀서요!”

마지막 배우가 등장했다.

“어서 와요.”

정가현이 웃으며 반겨주자 배우가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며 피디를 비롯한 다른 이들에게 사과했다.

“거, 도로가 막히면 어쩔 수 없지. 와서 앉아요.”

정동연이 웃으며 한 말에 배우의 안색이 조금 펴졌다. 그는 다시금 죄송하다고 말한 후 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윤채준 역, 신휘민 님]

그는 자리에 앉은 후 숨을 돌리다 뒤늦게 도현을 발견한 듯 시선을 마주쳐왔다. 도현도 그를 쳐다보았다.

도현은 몇 주 전의 일을 떠올렸다.

도현의 합류 이후.

캐스팅은 순차적으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강이든, 서지민, 이도현이라는 캐스팅 라인업에 이어서 다시금 커뮤니티를 타오르게 한 건 사람들이 예상치 못했던 이름이었다.

신휘민.

남자 아이돌 1군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그룹, <온탑(ON.T)>의 멤버였다.

해당 소식이 나가고 나서.

- 응? 신휘민 선배님?

<전지적 참견쟁이들> 촬영 이후 영찬과 가끔 안부 연락을 나누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와의 문자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도 아이돌이니 한 번쯤 보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만난 적 있는지 물어본 것이다.

- 인사드리러 간 적 있어! 나한테는 너무 별 같은 분이시라 따로 말은 못 걸어봤지만 ^0^!!

해맑은 대답이었다.

대신 도현은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아이돌로 데뷔하기 전 그가 배우 연습생이었다는 거나, 이번이 카메오 출연을 제외한 첫 배우 활동이라는 것 정도를.

싱긋. 두 눈이 마주친 신휘민이 도현을 보고 웃었다. 도현은 작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신휘민까지 도착하자 회의실에는 모든 인원이 다 모였다. 테이블에는 주연과 조연 배우가 자리했고 그 외의 공간은 스태프와 촬영팀, 홍보팀, 매니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자리에 앉은 면면들을 쭉 둘러본 정가현이 긴장을 속으로 삼켰다. 촬영팀 감독과 눈을 한 번 마주친 후, 조금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부터 <구미호뎐 : 인과 연> 대본 리딩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대본 리딩을 할 분량은 2화까지. 보통 대본 리딩 때 대본이 다 안 나온 상태면 1화만 하기도 하고, 혹은 5화, 6화까지 쭉쭉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의 경우, 2화까지는 모든 대사를 읽고 이후 장면부터는 건너뛰어 몇몇 장면만 해볼 예정이었다.

“…또 그 꿈 꿨네.”

첫 시작을 끊은 건, 드라마의 여주인공, 서지민이었다.

모두가 집중하는 상황. 그것도 첫 타자라 긴장한 건지 처음에는 연기가 조금 불안정하더니 몇 마디 길어지자 점차 안정되어 갔다. 곧이어 본래의 페이스를 찾았는지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정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빠르게 흘러가 대학교 첫 엠티에 간 서지민이 질척이는 복학생 선배에 어색하게 웃는 장면이 나온다. 도현은 1화에서 등장하는 장면이 없기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 연기에 집중했다.

아닌 척 도현에게 신경을 쓰고 있던 배우들이 진지하게 임하는 도현의 모습에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훈훈한 대본 리딩 현장이었다.

상황은 계속 흘러가. 엠티 날 저녁이 되었다. 달라붙는 선배를 피해 무작정 밖으로 나온 서지민은 산에서 길을 잃고 만다. 서지민이 버려진 절을 발견하고, 거기서 본의 아니게 구미호의 봉인을 푸는 것까지가 1화였다.

강이든의 임팩트 있는 등장에 다들 속으로 ‘역시’라고 생각했다. 현시대 최고의 남자 주인공감은 어디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다들 기대하던 도현의 차례가 되었다. 첫 대사가 나오자 정동연은 감탄사를 내뱉을 뻔한 걸 참아냈다.

‘아역 같지 않다.’

정동연. 그가 이 연예계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아역을 봐 왔겠는가. 심지어 강이든의 아역 시절도 봐 온 게 그였다. 강이든 때도 싹수가 남다름을 느꼈지만….

‘이거. 앞으로가 기대되는걸.’

그에게서 이러한 감상을 이끌어낸 건 강이든을 제외하고 도현이 처음이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크게 성공해서 성격이 비틀어지거나 자만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고.

오랜만에 지켜볼 재미가 있는 배우가 등장했다는 생각에 정동연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강이든의 매니저, 정경우는 한쪽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쟤는 또 뭐가 문제인 거야!’

정경우의 초조한 시선이 향한 곳에는, 미간 사이를 좁힌 채 딱딱하게 굳은 낯으로 도현을 응시하는 강이든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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