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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 (324)화 (325/582)

제324화. 운명적 만남? (18)

한이련과 여우야의 첫 만남은 어린 모습이었다. 방치된 절에서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놀란 한이련은 상대가 어린 소년이란 걸 깨닫고 경계심을 푼다.

물론 그조차도 여우야의 계획이었다. 괜히 꼬리가 아홉 개나 달린 여우가 아니었다. 원작 <구미호뎐 : 인과 연>의 독자들이 좋아하는 여우야의 매력도 이런 부분이었다.

“여기에 날 두고 가면 난 며칠 안 가 죽고 말 거야.”

속에는 몇백 년 묵은 여우 요괴가 들어 있으면서 가증스럽게 어린 낯짝을 하고 울상을 짓는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위로 올라가며 서지민을 응시했다.

“그래도 두고 갈 테야?”

“……!”

서지민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흰 볼, 아래로 늘어트린 눈매, 글썽이는 눈동자. 무엇 하나 쉽사리 넘어갈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이련… 역시 여자 주인공이구나.’

나라면 홀랑 넘어가 간이며 쓸개며 다 넘기려고 했을 텐데! 그러나 서지민과 달리 한이련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역시 구미호와 연애까지 한 인간은 달라도 뭐가 다른 모양이었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내가 잘못했다!’라고 외치고 싶은 걸 참으며 다음 대사를 이어갔다.

“그,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대가 나의 봉인을 풀었잖아.”

조금은 느긋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봉인이 풀리면서 내 멈춘 시간도 풀려버렸어. 이대로 간다면 저 족자가 내 남은 요력마저 빨아들일 거야. 난 지금 저것과 연결된 주술을 풀 힘이 없거든. 그러니 내가 죽는다면 그대의 탓이지.”

어린아이 흉내를 낼 때는 한없이 가엾고 앳되어 보이다가도 이렇게 말할 때면 묘하게 초연한 분위기가 풍겼다. 말 그대로 자유자재였다.

그 연기를 집중해서 보던 정가현 감독은 생각했다.

‘진짜 구미호를 보는 기분이다.’

상대가 휘둘릴 수밖에 없도록 분위기를 제 손에서 쥐락펴락하는 모습도 그렇고. 죽음을 입에 담으면서도 덤덤한 검은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이련은 상황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연했다. 평생을 평범하게 살던 사람이 봉인이며, 구미호며, 신기라니. 그런 걸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얘, 네가 왜 혼자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찰서라면 같이 가 줄 수 있어. 그래. 거기 가면 네 보호자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자, 누나랑 같이 가자.”

“경찰서?”

아까도 무슨 드라마를 본 건지 홍치 17년이라고 했던 소년이었다. 한이련은 수능 때 한국사 공부를 열심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소년의 장단에 맞춰 주었다.

“관아 알지? 관아 같은 거 말이야.”

그리고 그건 솔직히 말하자면.

“관아…라고?”

가장 최악의 선택이었다.

내내 느긋하던 구미호의 입가가 작게 떨렸다. 차가운 웃음이 떠오른 입술 사이에서 송곳니가 보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어지는 연기에 정가현은 떨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 된다. 이건 된다. 옆에서 서승아 작가가 감격 어린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찾아다녔던 구미호가 눈앞에 있으니 감격스럽지 않을 리가.

두 사람의 눈이 맞닿았다.

될 거 같죠?

네, 완전.

눈빛으로 통하는 순간이었다.

* * *

대본 리딩은 점심시간을 조금 넘어서까지 이어졌다. 1화, 2화 전체 리딩에 이어서 뒷부분의 짤막한 장면을 연기할 때는.

“되게 맛있게 잘 드시네요.”

과팅에서 처음 만난 신휘민이, 아까워서 자주 못 사 먹던 음식들에 눈이 돌아가 이것저것 먹던 한이련을 빤히 쳐다보다가 웃으며 건넨 말이었다. 내심 불안한 눈으로 신휘민을 보던 사람들이 의외란 눈빛을 했다.

그가 배우 연습생이었다는 사실이나 아이돌 데뷔 후에도 연기 수업을 꾸준히 받았다는 사실, 작가와 피디가 그의 연기를 보고 오케이 했다는 사실. 그 모든 사실을 알든 모르든 일단 ‘인기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은 어떠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화제성을 위해서 들어온 낙하산.

그런 편견 말이다.

그런 일들을 아니꼽게 보는 배우들도 적지 않았지만, 정동연은 그것이 상부상조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배우 열 명을 데려다 놓아도 아이돌 한 명의 화제성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걸 겪어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신휘민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그냥 연기력이 너무 최악만은 아니길. 답이 없는 정도면 화제성에서 플러스된 게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신휘민의 연기는.

정동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근히 정동연의 눈치를 보고 있던 정가현의 안색이 조금 편안해졌다.

‘쓸 만하네.’

후한 평가가 아니라 진짜 그랬다. 물론 이 자리에 앉은 다른 베테랑 배우들에 비하면 부족함이 두드러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른 신인 배우와 비교한다면….

‘나쁘지 않아.’

연기가 본연의 성격과 잘 맞는 걸 수도 있었다. 능숙하지만 담백하게 구는 윤채준이라는 캐릭터가 말이다. 원체 잘난 인기 아이돌이라 그런지 그런 연기를 잘 해냈다.

신휘민과 강이든 투 숏이 나왔을 때 홍보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군 아이돌 인기 멤버와 강이든이라니. 게다가 두 사람이 남주 후보라니.

심지어 한쪽은 요즘 애들이 열광하는 트렌디한 미남이고 한쪽은 미인에 두 발짝 정도 걸친 차가운 미남이었다.

‘이건 반응이 올 수밖에 없다.’

대본 리딩 영상이 나가자마자 실시간 검색어를 차지하는 미래가 벌써부터 보이는 듯했다. 게다가 두 사람만으로도 이미 초호화인데.

반짝반짝.

흥미를 가득 담은 눈으로 두 사람의 연기를 구경하는 도현이 화면에 잡혔다. 홍보팀 스태프는 아까 보았던 도현의 연기를 떠올렸다.

이도현이 뛰어난 배우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접했던 건 어디까지나 모든 편집이 끝난 완성본이었다. 이렇게 가벼운 연기 장면을 본 적은 없었다.

‘조금만 내보내야겠네.’

그만큼만 내보내도 사람들은 안달이 나 첫 방영을 기다릴 것이다. 그런 확신이 든 연기였다.

* * *

“수고하셨습니다!”

리딩이 끝나고도 아쉬웠던 부분을 몇 번 더 맞춰본 후에야 정말 끝이 났다. 도현이 대본을 들고 경찬호에게 다가가자 그가 잘했다며 말했다.

“괜찮았어요?”

“아니요. 최고였습니다.”

“어, 고마워요.”

경찬호는 딱딱해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칭찬이 후했다. 특히 진지하게 말해서 더 쑥스러워지는 편이었다.

“도현아! 가기 전에 누나랑 사진 한 장만 찍어 주라!”

“네!”

도현이 매니저에게 대본을 건네주고는 서지민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서지민의 매니저가 사진을 찍었다.

서지민이 행동하자 뒤이어 사진을 부탁하는 사람들이 몇몇 있었다. 그리고 다가온 한 명에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도 한 장 찍어도 돼요?”

“네, 괜찮아요.”

웃으며 다가온 이는 신휘민이었다. 그가 갑자기 도현을 들어 올리자 도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처음 보는 사이에 하기엔 지나치게 친밀한 접촉이었다.

찰칵. 이어지는 셔터 소리에 계속 놀란 표정을 지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도현은 카메라를 보며 웃었다. 사진이 몇 장 찍히고 나자 서휘민이 도현을 내려주었다.

“연기 잘하시던데요.”

“감사합니다….”

“뭘요. 아, 제 연기는 어땠어요? 아무래도 처음 작품 들어가는 거라서 되게 떨렸는데.”

“좋았어요.”

“정말로요?”

“네.”

“표정은 그게 아닌 거 같은데, 하하.”

신휘민의 말에 눈을 깜빡이던 도현은 곧 장난이라는 듯이 웃는 그에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아, 서지민 선배님을 누나라고 부르던데. 저도 형이라고 부를래요?”

“네. 형도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이돌이랑 배우는 분위기가 다른 건지. 도현이 만난 배우들은 거의 다 도현을 보자마자 반말을 썼는데-서지민은 예외였다- 엑스텐 멤버들도 그렇고 신휘민도 그렇고. 유독 조심스럽게 굴었다.

원하는 반응이 나와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인 신휘민이 말했다.

“그래, 난 다음 스케줄 있어서 먼저 가 봐야겠다. 다음에 보자.”

“네, 휘민 형.”

그가 가고 나서 도현도 슬슬 돌아가려고 경찬호를 쳐다보았다. 이미 많은 인원이 빠진 채였다. 도현은 회의실 내부를 쭉 둘러보았다.

없다. 도현이 아차 한 표정을 짓자 경찬호가 물어왔다.

“찾는 사람 있습니까?”

“네, 강이든 선배님 보셨어요?”

“아까 나가시던데요.”

“음. 지금이면 출발 안 했겠죠?”

“아마도요?”

“그럼 빨리 가요!”

“네? 저, 배우님?”

경찬호가 어리둥절하게 도현을 따라 나왔다. 차마 방송국 안에서 뛰지는 못하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걷던 도현은 주차장에서 막 차에 올라타려는 이를 발견하고 걸음을 박차며 외쳤다.

“잠깐만요!”

소년의 목소리에 차 문을 잡아당기던 손이 멈추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바로 앞까지 달려간 도현이 숨을 고르고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역시.

도현의 낯빛이 조금 굳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제가 뭐 잘못했어요?”

“예?”

도현의 말에 놀란 건 경찬호였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딱 그런 얼굴이었다. 그 놀란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은 도현이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아까. 대본 리딩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시더라고요. 맞죠?”

“…….”

“이든아, 왜 안 타고… 어, 도현이?”

“말씀해 주세요. 저한테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그냥 피곤했나 보다, 하고 넘길 수 있었다. 아까까지 나름 화기애애하게 샌드위치를 나눠 먹던 사람이 갑자기 변할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눈빛.

대본을 읽다가 스치듯이 본 그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정경우가 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이고오. 문제는 무슨! 우리 이든이가 원래 눈이 좀… 생기가 없어. 나도 가끔 보면 생선인지 사람인지 헷갈리고 막 그래. 하하하!”

넘어가라. 넘어가라. 강이든의 매니저는 속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그가 어색하게 웃는 소리만이 주차장 내에 울려 퍼졌다.

“우리 이든이가 피곤했나 보다. 얘가 며칠 동안 잠을 잘 못 잤거든. 자, 이든아 가서 쉬자. 도현이 너도 오늘 수고했어!”

그 눈물 나는 노력이 가상해 들어줄 법도 했지만, 강이든이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그동안 그토록 고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도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강이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도현이 손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나아진 게 없어.”

“…네?”

“실망스러워.”

“네?”

이어진 말은 소년을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잠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문하는 도현을 가만히 응시하던 강이든이 다시금 말했다.

“네 연기. 이전이랑 변한 게 없다고.”

“…….”

“발전했을 줄 알았는데….”

화룡점정으로 진심으로 실망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강이든이었다. 어느 정도는 배신감도 묻어났다. 그 작은 중얼거림에 죽음 같은 침묵이 깔렸다.

동공 지진이 일어난 경찬호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의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아니. 아침까지만 해도 사이좋았는데…? 어?

충격에 빠진 경찬호와 달리 일단 겉으로는 태연하게 눈을 깜빡인 도현이 생각했다.

그러니까 신경 쓰였던 그 눈빛이.

“실망, 스럽다고요….”

실망이었구나.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말끝이 흔들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닌 척해도 도현은 강이든과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도현에게 충격을 준 상대 배우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직까지도 도현이 그만큼 긴장감 있는 연기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본 리딩 내내 강이든을 의식했다. 반은 무의식적으로. 반은 의식적으로. 상대를 의식한 건 비단 도현뿐만이 아니었다. 도현은 강이든의 시선이 제게 강렬하게 와닿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도현이 대사를 뱉었을 때.

별 가루를 뿌린 것처럼 빛나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이내 어둡게 물들었다. 도현은 이제야 그게 배반당한 기대감이었단 걸 깨달았다.

“이, 이게 그런 게 아니라… 어….”

이어지는 정적에 당황한 정경우가 수습해 보려고 나섰다. 그러나 강이든도, 도현도 조용하기만 했다.

“미치겠네. 아니, 이게 아니라… 그, 도현아. 미안해.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사실… 하. 사실 이든이가 지금 슬럼프라서 그래.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닐 거야.”

정경우의 말에 놀란 건 경찬호였다. 강이든이 슬럼프라는 루머는 그도 들어본 적 있었다. 그러나 작품에 참여한 걸 보고 역시 찌라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니.

“그래도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 되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경찬호는 아티스트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 보호는 신체적인 것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었다.

경찬호가 낯빛을 굳히자 정경우가 눈썹을 늘어트렸다.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상대 배우가 성인이기만 했어도 이 정도로 미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이든의 혹평이 향한 상대는 아직 어린 배우였다.

강이든이 할 말 있으면 해보란 듯이 도현을 보다가, 나오는 말이 없자 차 문을 잡아당겼다. 돌아갈 심산이었다. 폭탄을 터트리고 본인은 쏙 빠지려는 행태에 정경우가 파르르 떨 때였다.

탁.

열리려던 문이 도로 닫혔다. 정경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강이든이 열던 차 문을 도로 닫은 사람은.

“기다려요.”

차분히 가라앉은, 아니, 파랗게 이글거리는 눈을 한 도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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