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운명적 만남? (19)
실망스럽다.
그 단어가 이토록이나 당혹스럽게 다가올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는 건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주체는 언제나 도현이었다.
쿵, 쿵.
도현은 거칠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은데 그게 긴장인지,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당혹인지, 혹은 그 외의 무언가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심장이 거칠게 뛸수록 머리는 차갑게 식어갔다. 기묘한 기분이었다. 도현은 천천히 제 감정을 짚어 나갔다.
한 번도 자신의 연기가 완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언제나 부족하다고 느꼈다. 갈증이 일었다. 더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도현은 힘겹게, 아주 힘겹게 한 가지 사실을 인정했다. 귀가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실은….
그래, 자만했다.
도현은 정말이지, 주변의 박수 소리에 신이 나 어깨를 들썩이며 춤을 춘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한번 인정하고 나니 덮어두었던 본심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었다.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자신이 가진 재능이 얼마나 드문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무려 덩어리 님이 증언한, 형의 음악적 재능과 같은 수준의 재능이었으니까.
그 재능은 연기적인 부분에 있어서 도현을 앞서나가게 해주었다. 자신에게는 부족해 보이는 연기도 다른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칭찬을 쏟아냈다.
베니스 최연소 수상, MTV 씬 스틸러 상, 르옌 역까지… 사실 그 모든 게 도현을 너무 높은 곳으로 띄워주고 있었다. 도현조차도 제가 얼마나 높이 떠올랐는지 잊어버릴 만큼.
언제부터였을까.
사람들의 칭찬이. 제게 향하는 찬사가 당연해진 게. 고작 변한 게 없다는 말을 듣고 이 정도로 충격에 빠질 만큼이나.
부끄럽다. 주차장에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저를 향하는 강이든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제 미숙하고 어린 본성이 낱낱이 파헤쳐지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러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현은 팔을 움직였다. 제게 시선을 떼고 차에 올라타려는 강이든을 막아섰다. 그가 다시 열지 못하도록 문을 누른 손에 힘을 주었다.
강박적 성격 특성.
컨트롤 프릭.
메리가 그렇게 말하고 덩어리 님이 혀를 찼을 때는 조금 억울했다. 소년은 스스로를 보편적 범주에 속한다고 여겼으니까.
그러나 이제 그렇게 우기지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한테 기대하고 실망한 건… 괜찮아요.”
그다지 괜찮진 않았다.
“근데.”
그래도 그건 참을 수 있었다.
귀가 달아오를 만큼 부끄럽지만, 그건 내 자만심이었으니까. 차근히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된다. 그런 실패와 실수는 도현을 자극하는 것이지 주저앉히는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참기 힘든 것은.
“그렇게 멋대로 가버리는 건 안 돼요.”
- 내가 보기엔 넌 너무 통제가 심해. 그것도 너한테만.
덩어리 님의 말은 틀렸다. 도현의 강박은 비단 스스로의 통제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실망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망조차도 예상 범위 안의 일이어야 했다. 초반의 루카 하퍼가 그랬던 것처럼.
도현은 시트콤을 찍던 날, 제게 음식을 던지던 루카에게 격하게 반응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예상 범위 안의 일이 아니었다. 니콜라스가 도망 사건을 벌여 그 충격에 갑작스레 힘을 펼치게 되었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깨달았다. 그는 제가 의도한 거나 예상한 것 외의 일이 발생하는 게….
싫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맞아, 싫어. 한번 깨달으니 답답한 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불안정한 것도. 갑작스러운 일도. 준비하지 못한 채 맞이하게 되는 모든 것들이 싫었다.
그게 상대의 일방적인 감정과 결정이라면 더욱.
정경우는 진심으로 놀랐다. 오늘 여기서 더 놀라운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그가 지루하기라도 할까 봐 걱정해 주는 걸까. 세상은 또다시 새로운 놀라움을 선사해 주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봐온 게 있으니, 이도현이 다른 아이들처럼 울거나 움츠러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강하게 나올 걸 예상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저한테 무슨 기대를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실망하고 가는 건 안 돼요.”
“이, 일단. 어… 도현아. 진정하고. 우리 어디 들어가자.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닌 거 같다.”
정경우는 이 일이 쉬이 흘러가는 걸 포기한 상태였다. 최소한 파파라치한테 찍혀서 기사가 나가는 것만 막자. 그러한 생각에 달래듯이 말을 꺼냈지만, 두 사람 모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경우가 경찬호와 시선을 교환했다. 상황을 파악한 경찬호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표시였다.
“저… 배우님. 일단 인근에 카페라도 들어가서….”
“좋아요. 아무래도 할 말이 많아질 거 같았거든요.”
“헉.”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낸 정경우가 방정맞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이도현이 이렇게 감정적인 인물이었나?
정경우의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물론 이든이가 무례하긴 했는데…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든이가 연예계 선배니까 그 정도 평가는 할 수 있지. 근데 이도현은 할리우드 스타인데… 아냐, 우리 이든이도 아시아 스타야.
온갖 주장과 반박이 엉켜들었다. 소년의 낯이 너무나 차분해서 더더욱 저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워졌다.
다시금 열리는 입술이 정경우에게는 사형 선고를 내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슬럼프가 끝났다고 기뻐했더니… 드라마가 망할 위기구나. 정경우가 차마 못 보겠어서 눈을 질끈 감을 때였다.
“제가 나아진 게 없다고 하셨죠.”
도현의 까만 눈동자가 강이든을 직시했다. 조금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이든의 눈이 미약하게 커진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그럼 선배님이 나아지도록 도와주세요. 저에게 걸었던 기대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면요.”
당돌한 발언에 놀란 건 강이든뿐만이 아니었다. 정경우는 눈을 번쩍 뜨고 얼떨떨한 낯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생각했던 최악의 말은 아니었다. 동시에 도현의 입에서 나오리라곤 추호도 생각지 못했던 말이었다.
드물게 놀란 낯의 강이든이 되물었다.
“도와?”
“네. 그게 책임감 있는 행동이잖아요. 저에 대해서도. 드라마에 대해서도.”
“허….”
도현의 말에 정경우는 완전히 탄식하고 말았다. 저거, 책임감 없이 가서 드라마 망칠 셈이냐고 돌려 깐 거지. 그것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기가 뭐 저리 세.’
정경우는 숫제 존경심마저 들 지경이었다. 제가 도현이었다면, 연예계 대선배가 실망스럽다고 하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꺼낼 수 있을 거 같지 않았다.
배짱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강이든에게로 향했다. 다른 이라면 건방지다고 여길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정경우가 아는 강이든이라면.
“…하하!”
도전적인 눈빛을 하던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강이든이 웃고 있었다. 그것도 소리 내어서!
큭큭, 어깨를 들썩이며 웃은 강이든이 차에 비스듬히 기대었던 몸을 바르게 폈다. 그리고 웃느라 촉촉해진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자 떨리던 어깨가 잦아들었다.
“가자.”
“…네?”
‘좋아’, ‘싫어’.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 말에 도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가? 어디를?
“도와달라며. 시간 있지?”
강이든은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흰 피부에 옅게 올라온 홍조가 재밌는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이기도 했다. 그가 그처럼 즐거워하는 걸 오랜만에 본 정경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일단 마음 가는 대로 저지르기는 했지만, 진짜로 받아들여질 줄은 몰랐던 도현이 상황을 파악하듯이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리고.
“…네. 샌드위치 집 옆에 조용한 카페 있던데. 거기로 갈까요?”
호승심에 불타는 건지, 즐거운 건지 모를 눈을 휘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강이든이 긴 다리를 휘적이며 앞서 걸어갔다. 그 뒤를 종종 따라가던 도현이 문득 멈춰 서더니 몸을 틀었다.
“아, 매니저님. 시간 괜찮으실까요?”
“예에… 전 괜찮습니다.”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경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다행이라고 말한 후 다시 강이든을 따라가자 자리에 남은 두 매니저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경찬호의 눈에 측은한 빛이 떠올랐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예… 그쪽도요.”
하루 만에 진한 동지애를 느끼게 된 두 사람이었다.
* * *
[강이든이랑 이도현 스터디 함?]
(사진)
주작이라고 할까 봐 사진부터 인증한다.
여기 조용하고 손님도 적어서 내가 자주 가는 카페거든. 암튼 평소처럼 카페에 있었는데 문이 딸랑이며 열리는 것임. 반사적으로 쳐다봤는데 일단 역광 때문에 얼굴은 잘 안 보였지만 실루엣만 봐도 백 미터 밖에 있어도 연예인이었음; ㄹㅇ 일반인일 수가 없음.
근처에 KBN 방송국 있어서 종종 연예인들 거리에서 보고 그러거든. 그래서 누군가 하고 유심히 봤는데 얼굴이 ㅈㄴ 익숙한 거임. 콧대와 턱선이 자기 강이든이라고 자기주장이 좀 심했음. 카페 사장님도 바로 알아봤는지 놀라서 어버버하고 있고 ㅇㅇ
속으로 ㅁㅊ 계 탔다 하고 있는데 그 뒤로 누가 더 들어오는 거.
근데 그게… 이도현이었음.
합성이라고 게거품 물 거 같아서 사진 몇 장 더 박고 간다.
(사진) (사진)
아니 강이든이 백 미터 밖에서 봐도 연예인이면 이도현은 백 미터 밖에서 봐도 탈 인간임. 진심. 살면서 그렇게 생긴? 존재감 뿜뿜? 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 듯;; 얜 화면이 실물을 못 담아내는 거 같음. 진짜 화면이랑 다른데 그게 생긴 게 다른 게 아니라 뭔가 분위기? 아우라? 가 다름… 아, 말로 설명을 못 하겠네. 이건 그냥 봐야 앎. 참고로 나는 지금도 보는 중 ㅅㄱ
강이든 아메리카노 주문하는데 카페 사장님 목소리 진짜 덜덜 떨렸음. 나라면 기절했을 듯. 암튼 두 사람이 주문해서 구석진 자리에 가서 앉는데, 뭐 하나 지켜봤더니 뭔가 대본 같은 걸 꺼내는 거임. 그리고 침묵이었음. 보다가 내가 다 어색해서 숨 막혀 죽을 뻔.
얘넨 대체 뭐 하러 왔나 싶을 때였음 ㅇㅇ 이도현이 먼저 뭔가 말을 걸더니 강이든이 고개를 끄덕임. 그 뒤로 막 말 주고받더니 뭔가 끄적이고. 둘 다 표정 엄청 진지한데 즐거워 보였음.
드라마 같이 들어간다더니 둘이서 스터디라도 하는 듯? 근데 두 사람 나이 차가 좀 있으니까 의외였음 ㅇㅇ 둘은 신경 안 쓰는지 분위기 되게 좋더라
(사진)
마지막으로 강이든이랑 이도현이 같이 찍어 준 사진 올리고 감 ㅎㅎㅎ 가운데 오징어 스티커로 가린 사람이 나임 ㅋㅋ 강이든 키 진짜 커서 옆에 서니까 내가 어깨에서 끝나더라. 설레 죽을 뻔…
드라마 꼭 보겠다고 하니까 이도현이 고맙다고 하는데 목소리가 진짜 듣기 좋았음. 아이 특유의 목소리가 아니라 차분한? 그런 미성임. 아직 어리니까 아이돌이나 가수로 노선 틀어도 될 듯 일단 난 찬성 ㅎ
그래서 자랑하려고 올린 글이냐고?
ㅇㅇ 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