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7화. 여우와 여우야 (1)
막 쌀쌀해지는 계절.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 구미호뎐의 첫 촬영 장소는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한 포천 비둘기낭 폭포였다. 이곳에서 여우야가 봉인당하는 장면과 봉인에서 깨어나는 장면을 촬영한 후, 안산으로 이동해 촬영을 이어갈 예정이었다.
폭포에 도착한 도현은 감탄사를 흘렸다. 천연기념물 제537호라는 폭포는, 비둘기 둥지처럼 움푹 들어간 주머니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여 비둘기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겨울에 산비둘기가 폭포 주변 동굴 바위에서 살았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도현은 정가현 감독이 하는 말을 들으며 폭포를 더 자세하게 살폈다. 움푹 들어간 지형 덕분에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폭포에서 떨어져 고인 물은 맑은 에메랄드색이었다. 폭포를 에워싼 주상 절리와 푸른 이끼, 그리고 나무의 모습은 하나의 장관을 이루었다.
본래 이곳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입수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영화나 드라마 촬영을 할 때는 종종 허락받고 관리하에 진행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와….”
도현의 입에서 두 번째로 나온 감탄사였다. 이번에는 자연 경관이 아닌 특정 대상을 향한 것이었다.
강이든이 어색한지 제 머리카락을 들어 보였다. 구미호하면 떠오르는 긴 백발이 가슴께까지 내려와 있었다. 과거 편에서 여우야는 본래 구불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게 묶어 다니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전투 이후 풀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묶지 않고 늘어트린 채였다.
봉인되는 장면이라면 얼굴과 몸에 상처가 가득하겠지만, 먼저 촬영할 장면은 봉인에서 깨어나는 장면이었다. 특수 분장을 한번 하면 지우기도 어렵고 착색 우려도 있어서 순서를 바꿔서 촬영하게 된 것이다.
“이든아. 눈은 안 불편해?”
“응.”
강이든이 끼고 있는 렌즈는 오묘한 붉은색이었다. 저기에 CG가 추가되면 여우야의 붉은 눈이 완성된다. 메이크업을 한 것인지 평소보다 묘한 분위기가 나는 눈매에 붉은색의 렌즈는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스태프 몇 명이 홀린 것처럼 강이든을 쳐다보았다. 귀와 꼬리는 모두 CG 작업으로 추가할 거라서 지금은 붉은 눈과 하얀 머리카락만이 구미호의 특징을 나타내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강이든은 충분히 기묘한 느낌을 풍겼다. 명도가 낮은 적색의 장포가 분위기를 한층 무겁게 잡아주는 거 같았다.
‘저 장포가 그 장포구나.’
도현은 웹툰 장면을 떠올렸다. 어느 날, 밖에 나갔던 여우야는 붉은 장포를 걸치고 돌아온다. 제가 죽인 관군의 것이었다.
여우야는 붉은색을 선호하지 않았다. 제 눈이 붉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자기혐오를 가지고 있는 여우 요괴가 붉은색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런 여우야가 적색의 장포를 두르게 되는 건 과거 편의 후반부.
피가 묻어도 모르도록 짙고 어두운 색의 장포를 걸친 여우야는 가벼웠던 연애담에서 비극으로의 분위기 변화를 실감케 하는 요소였다. 본래 꺼리던 것에조차 무감해질 정도로 몰린 여우야를 나타내는 일종의 상징적인 요소기도 했고.
“불편하면 말해. 알았지? 이따가 물에 들어가서 추우면 그때도 말하고. 감기 걸리면 큰일 나!”
강이든 옆에 붙은 스태프 두 명이 옷자락을 정리해 주고 있었다. 도현은 거기서 시선을 떼고 폭포를 눈에 담았다. 촬영 준비가 거의 마쳐 가는 모양이었다.
비둘기낭 폭포에서는 도현의 촬영이 없었다. 이곳은 윤경 스님이 여우야를 봉인하기 위해 만든 족자 속 산수화. 즉, 현실 공간이 아니라 법력으로 만들어진 그림 속 세계였다.
그 속에서 여우야는 본신의 모습으로 봉인된다. 어린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성인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도현이 따라온 건, 도현의 의지이기도 했고 강이든과 감독님의 의지기도 했다.
‘같은 역할이니까.’
결국 지금 촬영하는 것도 도현이 겪은 일이었다. 도현도 여우야니까. 도현은 강이든의 촬영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사이.
촬영 준비가 모두 끝나고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었다.
웹툰에서 여우야가 봉인되는 장면은 이러했다. 천천히 허공에서 떨어져 내린 여우야가 도중에 눈을 뜬다. 완전히 바닥에 내려앉은 후 이곳이 현실이 아님을 깨닫고 나가려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염주와 부적이 움직임을 봉쇄한다.
그 부분은 모두 CG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허공에서 내려오는 부분은 따로 세트장에서 촬영한 후 합성이 들어갈 예정이었다.
아무튼 그 소리는.
“이거 심의 걸리는 거 아니야?”
누군가 심각하게 말했다. 물웅덩이에 떠오른 적색 장포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 흰색의 저고리가 보였다. 그리고 그런 강이든의 몸을 염주와 부적이 칭칭 휘감고 있었다.
물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팔과 다리, 몸통과 목, 그리고 구미호의 신체 중에서 가장 강력한 요기를 품고 있는 눈까지. 강하게 묶인 것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흘러내리게 되어 있었다.
이 장면이 웹툰에서 여우야가 등장하는 첫 장면이자 등장하는 순간부터 독자들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낸 장면이었다. 첫 등장인 만큼 확실히 강렬하긴 했다.
“이든 씨 춥진 않아요?”
“괜찮습니다.”
몇 가지 물어보던 정가현 감독은 곧이어 고개를 끄덕이고는 촬영 시작을 알렸다.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고요하게 물에 반쯤 잠겨 있던 강이든의 손끝이 미약하게 떨렸다. 잠잠하던 웅덩이가 파동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스륵. 물에 잠겨 있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흰 손을 타고 흐른 물과 염주가 아래로 떨어졌다. 조급함 없이 느릿하게 움직인 강이든이 그대로 시야를 막은 부적을 잡아당겼다. 저항 없이 흘러내린 부적이 물속에 가라앉았다. 카메라도 얼굴을 피해 아래로 내려갔다.
차르르!
그가 몸을 일으키자 다른 것들도 힘을 잃고 떨어져 내렸다. 한 발짝 뭍으로 내딛자 어깨에 아슬하게 걸쳐 있던 붉은 장포가 흘러 내렸다. 강이든은 귀찮다는 듯이 그것을 벗어내어 아무렇게나 떨어트렸다. 장포가 그를 구속했던 법구와 함께 가라앉았다. 그 뒷모습을 카메라가 담고 있었다.
그것에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손톱을 날카롭게 세운 강이든이 허공을 갈랐다. 결국에는 먹과 종이로 이루어진 산수화. 요력을 담아내어 그어 내리자 종이가 찢겨 나가며 틈이 생겼다.
요요한 곡선이 떠오른 입매를 카메라가 담았다.
“…깨워준 이에게 감사는 표해야겠지.”
그 말과 함께 강이든은 허공에 생긴 균열을 향해 발을 뻗었다. 그렇게 첫 번째 촬영이 끝이 났다.
영상을 확인한 정가현은 입을 틀어막고 싶은 걸 참았다. 원작에서도 미묘하게 얼굴만은 피해서 장면이 나온 탓에 독자들의 궁금증을 극대화했던 부분이었다. 덕분에 성인 모습의 여우야가 처음 등장할 때 엄청난 이슈가 되기도 했고.
그걸 잘 담아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걱정은 무슨. 강이든이 최고였다.
그 후로도 몇 번 촬영이 다시 진행되었다. 부분부분 잘라 클로즈업을 해가며 필요한 장면을 모두 찍은 후, 장면을 넘어가기 전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이른 휴식 시간이긴 하지만, 날씨가 날씨인 만큼 배우가 감기에 걸리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스태프들은 분주히 염주와 부적을 치웠고 강이든은 분장을 새로 하기 전, 두꺼운 담요와 따뜻한 차로 몸을 녹였다.
“안 추워? 담요 더 덮을래? 아니다, 패딩을 가져왔을 텐데….”
정경우가 호들갑을 떨고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인지 덩어리인지 모를 이가 간이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었다. 더운지 땀까지 흘리면서. 그런 주제에 맹한 얼굴로 가만히 있길래 도현이 한마디를 했다.
“더우면 몇 개는 벗어요.”
“아.”
짧은 탄식을 뱉은 강이든이 주섬주섬 패딩을 벗었다. …이 사람이 방금 그 사람 맞나. 아까는 무슨 천 년 묵은 구미호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이어, 강이든은 다시 분장하러 사라졌다. 도현과 경찬호는 한쪽 구석에 마련된 자리에 돌아가서 다음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강이든은 아까와 다른 행색이었다. 아까는 여러모로 신비로움이 강조되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똑같은 착장인데도 상처와 피, 그리고 초췌한 메이크업이 추가되어 위태롭고 피폐한 분위기가 도드라졌다. 특히 적색 장포 안에 입은 흰옷에 피가 배어나 부상의 정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레디, 액션!”
두 번째 장면이 시작되었다. 좀 전에 봉인에서 풀리는 장면을 찍었다면, 지금은 시간 순으로 따지자면 그보다 이전의 장면.
봉인 당시의 장면이었다.
“…잘하네요.”
도현이 중얼거린 말에 경찬호가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일 인물, 동일한 분장인데 아까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아까는 매혹적이고 신비로웠다면 지금은….
요괴가 되며 인간의 형상을 띄게 되었지만, 본질은 여우.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과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가 사람보다는 정말 짐승의 것과 닮아 있었다. 첨벙이며 움직이는 몸짓과 일그러진 얼굴은 이성을 잃은 여우야, 그 자체였다.
도현은 발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소름을 느꼈다. 마구잡이로 날뛰는 짐승의 연기가 시작부터 끝까지 그의 계산 아래서 이루어졌단 걸 알기 때문에 더욱 오싹했다.
웹툰 속 여우야처럼 그를 휘감는 염주도 부적도 없다. 그러나 강이든은 그게 있는 것처럼 연기하고 있었다.
염주가 몸을 휘감을수록 날뛰던 요력이 잦아든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짐승 소리를 내었던 강이든의 눈에도 조금이나마 이성이 돌아왔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본능이 아닌 의식이 깨어난 여우야는 보일 리 없는 현실 세계를 내다보기 위해 고개를 든다.
반항하던 몸짓이 힘을 잃고 늘어진 게 기운이 다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여우야 본인만이 알 것이다.
그렇게 여우야는 산수화 속에 봉인된다.
아무도 없는 그림 속 세계에 잠들어 있다가 다시 눈을 뜨는 건 오백 년이라는 길고 긴 시간 후. 길을 잃고 절에 들어온 한이련이 그 산수화를 건드릴 때가 되어서일 것이다.
“컷!”
그 말을 외친 정가현 감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이든 씨… 진짜 괜히 강이든, 강이든 하는 게 아닌가 봐요. 최고라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입에 발린 멘트가 아니라 진심이 절절히 묻어나는 어투였다. 점잖게 대답한 강이든이 도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스터디 하면서 자주 본 표정이었다.
싱긋. 도현이 웃음으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일종의, 기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누가 여우야의 주도권을 잡는지 하는. 해석이 완전히 같을 수 없다 보니 자연히 갈리는 부분이나 부딪히는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더 좋은 걸 고르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했지만, 가끔은 자신의 해석이 맞다며 도전장을 내밀기도 했다.
방금 건 먼저 고삐를 쥔 이의 도발이었다. 그래서 도현은 웃어주었다.
‘나도 쉽지는 않을 거야.’
그런 의미를 담아서.
이후로도 촬영은 몇 번 더 반복되었다. 쌀쌀한 날씨라 추울 텐데 강이든은 잔떨림조차 없이 연기했다. 연기로 체온까지 조절할 수는 없으니 참고 있다는 소리였다. 도현은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경각심을 느꼈다.
이상한 것에 꽂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자 옆에서 두 매니저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폭포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하루 뒤. 도현은 계곡 옆에 난 구불구불한 도로 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창문을 내리니 울창한 소나무와 침엽수에서 숲 특유의 향이 났다.
좀 더 올라가니 두 번째 촬영지가 보였다.
한이련이 길을 잃고 도착한 절이자 여우야가 봉인된, 모두에게 잊히고 역사에서 지워진 절. 그리고 도현의 첫 촬영이 있을 곳.
석남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