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28)화 (329/582)

제328화. 여우와 여우야 (2)

석남사에서도 마찬가지로 과거 편이 먼저 촬영되었다. 도현은 그 촬영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과거의 복식을 그대로 재연한 사람들이 무척이나 신기했던 것이다.

촬영지도 사찰이고 복식도 몇백 년 전의 것이니 마치 시간을 이동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여기저기 즐비한 촬영 장비를 흐린 눈으로 넘긴다면 말이다.

또 한 가지.

“이든 씨! 아까 휘두르는 거, 반 박자 정도 빠르게 해도 될 거 같은데.”

“네, 알겠습니다.”

과거 편의 후반부는 액션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액션을 강이든은 직접 소화했다. 그는 칼을 휘두르며 스턴트맨과 합을 맞췄고, 도현은 그 모습을 보며 연신 감탄했다.

“레디, 액션!”

촬영이 들어가자 붉은 장포 자락이 펄럭였다. 리허설 때 맞춘 동작이 그대로 재연된다. 다 합을 맞춰놓은 것임을 알고 있는데도 넋을 놓고 보게 되었다.

도현은 이에 관해서 강이든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저도 액션 장면을 직접 소화해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액션 스쿨 같은 데라도 다니는 게 좋을 거 같냐고. 그는 도현이 하는 운동 몇 가지를 듣더니 딱 한마디 했다.

- 과해.

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너 운동선수 할 거 아니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후로 말이 없길래 도현은 열심히 머리를 굴려 그 말뜻을 해석했다.

- 여기서 더 추가하면 주객전도라는 소리죠?

한참 뒤에 그렇게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배우는 연기가 우선.

맞는 말이었다.

아직 연기도 미흡했고 배우고 있는 운동도 덜 익혔다. 동시에 다 하겠다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이었다. 그러다 이도 저도 안 되게 다 놓칠 수 있었다. 드럼을 영화를 위한 준비 정도로만 익힌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도현은 계획을 조금 수정했다. 일단, 발레는 이제야 조금 무언가를 이해하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그만두기에는 아쉬웠다. 적어도 중학교 졸업 때까지는 배우고 싶었다. 그때까지라면 기본적인 신체 움직임뿐만 아니라 신체의 기틀도 잘 잡혀 있을 거 같았다.

양궁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양궁을 배우는 의도는 발레처럼 연기 그 자체를 위한 게 아닌 배역을 위한 것이었다.

‘욕심을 버리고 어느 정도 수준까지 올리면 빈도를 낮춰야겠네.’

드럼처럼 말이다.

하나씩 정리하고 나니 이후에 뭘 해야 할지 그림이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양궁이 몸에 익고 빈도와 비중을 낮추었을 때, 그때 액션 연기를 위한 무언가를 찾아보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컷! 오케이!”

그사이 별다른 NG 없이 촬영이 끝났다.

“도현아! 이리 와서 이것 좀 먹어!”

휴식 시간이 주어지자 서지민이 도현에게 손짓했다. 안산으로 촬영지를 옮긴 후 그녀도 촬영에 합류하게 된 상태였다. 해맑은 얼굴을 한 그녀는 색이 연한 한복을 입고 있었다.

도현은 그녀의 말대로 푸드 트럭을 향해 걸었다. 푸드 트럭 옆에는 큰 등신대가 세워져 있었는데, 상큼하게 웃는 서지민의 사진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떡볶이 좋아해?”

아까도 푸드 트럭 앞에서 사진을 백 장 정도는 찍는 거 같더라니. 그녀는 상당히 신이 난 상태 같았다.

도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안 먹어 봤어요.”

“뭐? 떡볶이를?”

“네.”

“…헐. 아니, 미국에서 컸다고 했지. 맞다.”

존재할 수 없는 무언가를 보는 눈으로 도현을 보던 서지민이 고개를 휙휙 내저었다. 그리고 비장한 눈으로 컵을 건넸다.

종이컵에는 등신대와 마찬가지로 서지민의 얼굴이 프린트되어 있었는데, ‘배우, 스탭 여러분 먹고 파이팅하세요!’라는 문구도 새겨져 있었다.

“혹시 매운 거 못 먹어? 이거 근데 별로 맵진 않아!”

“매운 거… 평범할 거예요.”

“얼른 먹어 봐봐!”

“응? 도현이 떡볶이 먹어?”

“네! 아, 감독님! 그거 아셨어요? 도현이가 떡볶이 처음 먹어 본대요!”

“뭐? 처음?”

“누가? 뭐가 처음인데?”

도현의 첫 떡볶이 시식 소식은 일파만파 퍼져나가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도현은 종이컵을 손에 쥔 채로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혼란에 빠졌다.

쓸데없는 긴장감 속에서 도현이 이쑤시개로 떡을 하나 집어 들자 서지민이 주먹을 꽉 쥐었다. 도현은 굉장한 부담과 압박을 느끼며 떡을 느릿하게 씹었다.

사람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어, 어때?”

“…음.”

맵다. 도현의 뺨이 좀 붉어졌다. 하지만… 매운맛 사이에서 피어나는 은근한 달짝지근함이 입맛을 자극했다.

“맛있어요.”

“그렇지! 역시 떡볶이가 최고라니까!”

다른 사람들도 뿌듯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도현이 그 훈훈함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서 있자, 경찬호가 은근슬쩍 말을 해주었다.

“한국인은 외국인이 자국 음식을 좋아하면 국뽕을 느끼거든요.”

“…아하.”

외국인이란 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도현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경찬호는 어느샌가 돌아가고 있던 카메라를 보았다.

대충 메이킹 필름에 ‘도현이의 첫 떡볶이 시식기?!’라는 제목 정도로 나가겠네. 거의 예지에 가까운 추리를 한 경찬호였다.

그 후로도 촬영은 순조로이 이어졌다. 도현의 첫 촬영이 다가온 건, 안산에 오고 나서 이 주일 정도 후였다.

“아! 세상에, 이든 선배님 미니미 버전이잖아!”

서지민이 메이크업을 마치고 나온 도현을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서지민의 말대로 지금 도현은 강이든을 축소해 놓은 모습이었다. 어린 모습이라 그런지 똑같은 백발이었지만, 이마를 덥수룩하게 덮은 앞머리와 목덜미 위로 오는 짧은 길이가 다른 부분이었다. 

하얀 가발과 붉은 렌즈는 어색함 없이 도현과 어우러졌는데 특히나 유달리 흰 피부와 긴 속눈썹이 신비로운 느낌을 강조했다.

“귀, 귀여워…!”

서지민이 지구를 부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내는 사이, 정가현은 도현의 모습을 보고 ‘역시 복덩이’라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서지민이 귀엽다고 하긴 했지만, 도현이 평소에 두르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 탓에 귀여움보다는 초연한 느낌이 강했다. 지금도 물끄러미 서지민을 응시하는 모습이 꼭, 한이련에게 한심한 눈길을 보내는 여우야 같았다.

“이제 촬영 시작합시다.”

정가현의 가벼운 한마디에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현은 정신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 잡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묘하게 긴장되는 느낌에 심호흡을 두어 번 한 도현이 씩씩하게 제 자리로 걸어갔다.

소품팀에서 준비해 온 커다란 산수화 족자 옆, 불상 뒤로 들어가자 작은 몸이 쏙 숨겨졌다. 스태프 몇 명이 귀엽다며 속닥거렸다.

“도현아, 시작해도 돼?”

“네!”

괜찮다는 듯 흰 손이 불쑥 튀어나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걸 보는 정가현의 눈도 흔들렸다. …이장혁, 이 복 받은 놈. 잠깐 치고 올라온 헛생각을 쳐낸 정가현이 표정을 다듬었다.

“그럼, 촬영 들어갑니다.”

불상 뒤에 몸을 숨기고 서 있던 도현이 긴 숨을 내뱉었다.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때는.

“레디, 액션!”

첫 촬영에 긴장한 소년이 아니라 오백 년 만에 깨어난 구미호의 붉은 눈이 떠졌다.

* * *

“뭐, 뭐야! 누구야!”

텅 빈 절에서 갑작스럽게 바람이 불지 않나, 이상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아닌 척 어깨에 힘을 줘 보아도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은 여전했다. 한이련이 주춤, 물러나며 제 팔을 감싸 안았다. 평범한 절간의 모습이 점차 으스스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누구야! 장난치지 말고 얼른 나와!”

경계심을 바짝 끌어올린 한이련이 용감하게 외쳤다.

그러나.

조용-.

열린 문 사이로 부는 서늘한 바람만이 전부였다. 한동안 바짝 긴장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한이련이 점점 어깨의 힘을 풀었다.

“잘못 들었나….”

아까 선배가 권하는 술을 거절하지 못하고 몇 잔 마시긴 했다. 그 취기가 지금 올라온 모양이었다. 한이련이 한숨을 내쉬며 이 이상한 절을 나가려고 한 발짝 떼는 순간이었다.

“내 은인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계집인지는 몰랐는데.”

“!”

화들짝 놀란 한이련이 황급히 뒤를 돌았다. 놀람과 공포로 크게 떠진 한이련의 눈에 흰 소매 자락이 비치었다.

부채를 설렁이며 흔드는 흰 손을 따라 소매가 흘러내렸다. 드러나는 팔은 영락없이 어린 소년의 것이었다. 한이련은 얼떨떨한 눈으로 기묘한 소년을 눈에 담았다.

부채가 펄럭일 때마다 이질적인 하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 아래로 보이는 눈은….

“혼혈?”

뭐 러시아 혼혈, 이런 건가?

아니면 알비노?

도저히 렌즈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빛의 붉은색이었다. 무언가 홀리는 기분에 한이련이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그건 곤란하지.”

“무, 뭐야!”

“흠? 홀린 게 아니었나?”

갑작스레 눈에 분 바람에 한이련이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에 소년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바로 했다. 

본래 구미호란 사람을 홀리는 여우 요괴.

그건 통상적으로 알려진 구미호 속설대로, 여우에서 시작된 요괴라서가 아니었다. 어린 여우를 요괴로 만든, 그로 인해 생긴 요력의 근원이 죽음이기 때문이었다.

본디 가장 공포스러운 것이 가장 매혹적인 법이니까.

그러나 종종 죽음에 홀리지 않는 이들이 존재했다. 오래 수련한 스님이나 타고 나길 정신력이 강한 이들, 혹은. 

신기를 타고난 귀한 이.

소년, 여우야는 바람이 어디서 불었는지 찾기 위해 주변을 휙휙 둘러보는 한이련을 보았다. 그리고 몸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기운의 일부를 발견했다.

요기?

아니지, 인간이 요기를 품을 리가.

그렇다면.

“호오.”

저 계집. 정신이 온전치 않은 계집이 아니라….

“귀인이었군.”

붉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과연, 구미호라 부를 만한 요사스러운, 꿍꿍이가 있는 찝찝한 미소였다.

* * *

‘이게 이도현….’

한쪽에서 촬영을 지켜보고 있던 경찬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자신이 맡은 배우가 대단한 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나이를 넘어서 존경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도현이 촬영하는 건 처음 보았다.

언뜻, 연습할 때나 스터디 할 때 본 것만으로도 ‘잘하겠지’ 생각하기는 했다. 그가 보기에도 이도현은 좀 남다른 구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저기 서 있는 소년은 경찬호가 아는 사람 같지 않았다. 아니, 그냥 사람 같지 않았다.

경찬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집중하고 있는 강이든을 흘깃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연기에서 엎치락뒤치락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건 그도 알았다.

그래서 강이든의 첫 촬영을 보았을 때, ‘역시 경력은 간과할 수 없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 마음속에서 은근히 도현의 연기가 밀릴 거라고 여긴 것이다.

매니저가 하면 안 되는 생각이긴 했지만, 상대가 강이든이었다. 도현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일단 경력부터 너무 차이 났다.

경찬호는 제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분명 능숙함은 강이든이 우세했다. 그의 연기는 모든 것이 흐르듯 유려했다. 그 장면을 그보다 더 완벽히 연기할 수는 없겠다, 하는 감상이 들게끔 만드는 연기였다.

그러나 도현의 연기는.

“진짜 요괴 같다….”

누군가 작게 중얼거렸다. 경찬호는 그 의견에 공감했다.

도현은 진짜 구미호 같아 보였다. 그를 감싸는 분위기와 공기까지 모두 다.

현실과 괴리된 신비로운 공간처럼 보이게 하는 장악력.

그게 도현의 최대 강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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