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29)화 (330/582)

제329화. 여우와 여우야 (3)

구미호뎐, 이 드라마에 이름을 올린 배우들은 하나같이 한가닥 하는, 쟁쟁한 이들이었다. 애초에 강이든에 서지민을 섭외했다는 건 이를 제대로 갈았다는 소리였다.

거기다 신휘민으로 든든한 팬덤까지 확보했다. 다른 배우들도 탄탄한 경력자들이거나 나름 인기를 얻어가는 이들뿐이었다.

이미 이 정도만으로도 누구 한 명에게 집중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내년 초 안방극장은 KBN이 꽉 잡았다는 건 거의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쉬이 볼 수 없는 날고 기는 그 쟁쟁한 이들 가운데에서 유독 독보적으로 시선과 관심을 집중시키는 이가 있었다.

여우처럼 눈을 가늘게 뜨던 도현이 순식간에 낯을 순하게 바꾸었다.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뒤에서 꼬리가 아홉 개는 살랑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여기에 날 두고 가면 난 며칠 안 가 죽고 말 거야. 그래도 두고 갈 테야?”

“그,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저 소년이 나타나기 전에 일어났던 기이한 현상이나, 홍치 17년으로부터 얼마나 지났냐느니 하는 질문, 그리고… 소년에게서 풍기는 기묘한 느낌까지.

온통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한이련이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 발뒤꿈치에 힘을 주었다. 금방이라도 도망가고 싶다는 듯이.

“그대가 나의 봉인을 풀었잖아.”

그런 한이련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간 도현이 말했다. 그 모습이 마치 도망치는 사냥감을 가지고 놀듯이 접근하는 포식자 같았다.

“봉인이 풀리면서 내 멈춘 시간도 풀려버렸어. 이대로 간다면 저 족자가 내 남은 요력마저 빨아들일 거야. 난 지금 저것과 연결된 주술을 풀 힘이 없거든. 그러니 내가 죽는다면 그대의 탓이지.”

대본 리딩 때 보았던 장면이 펼쳐졌다.

그러나.

‘달라.’

그걸 가장 절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서지민이었다.

대본 리딩 때도 속으로 은근히 놀랐다. 분위기를 자유자재로 쥐락펴락하는 연기력은 놀랄 만한 것이었으니까.

“…얘, 네가 왜 혼자 이곳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경찰서라면 같이 가 줄 수 있어.”

목소리가 조금 떨리며 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상황이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은 것처럼. 도현의 시선을 받으며 서지민은 덫에 걸린 시궁쥐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래. 거기 가면 네 보호자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자, 누나랑 같이 가자.”

횡설수설하듯이 말이 나왔다. 더없이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왜냐하면 서지민은 지금, 한이련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으니까!

이전에 봤을 때는 한이련이 대단하다 생각했다. 저런 파괴적인 귀여움을 앞에 두고 말랑해지지 않다니,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순간 서지민은 깨달았다.

말랑해지지 않은 게 아니다.

“경찰서?”

“관아 알지? 관아 같은 거 말이야.”

“관아…라고?”

그러지 못한 거다.

문명인으로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야생의 본능이 경종을 울리는 기분이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완전히 휘말렸다.’

믿을 수 없게도 그랬다.

그녀가, 저 소년의 연기에 완전히 주도권을 빼앗기고 휘말렸다는 소리였다. 그녀의 연기마저도 목줄 잡혀 질질 끌려갈 정도로!

‘스터디를 했다더니 대체 뭘 하고 온 거야?’

숫제 황당할 지경이다.

다시 주도권을 잡아보려고 해도 도저히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대본 리딩 때랑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에 당혹스러웠다.

방송국에서 본 도현의 연기가 모자랐다는 게 아니다. 그때도 분명 뛰어난 연기력을 보였다.

하지만 그때의 연기는 비유하자면 넓은 들판이었다. 서지민이 어느 방향으로 뛰어가도, 심지어 바닥에 드러누워 뒹굴거려도 괜찮은 들판.

그렇다면 지금은.

‘틈이 없는 길 같아.’

서지민에게 도현은 딱 한 가지의 길만 보여주고 있었다. 그 길로 가라고 종용하는 듯이. 어쩔 수 없이 그 길만 걷도록.

그리고 서지민은 이런 성향의 연기를 하는 사람을 잘 알았다.

아주 잘.

그건, 선강대학교 연극영화과에서 악명 높았던 강이든의 연기 방법이었으니까!

‘아니, 배워도 이런 걸….’

지금이 촬영 도중이 아니었다면 서지민은 눈을 질끈 감았을 것이다. 마치 천사가 사탄에게 물들어 타락 천사가 된 걸 목도한 심정이었다. 그만큼 참담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도현은 서지민이 그런 생각에 신경을 빼앗기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다면야.”

사특하다.

그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요요한 빛이 붉은 눈동자에 감돌았다.

그리고.

탕!

그건 시작이었다.

탕, 탕, 탕!

연달아 장지문들이 거세게 닫혔다.

“무, 무슨….”

당황해 고개를 휙휙 돌리던 한이련이 본능적인 직감에 따라 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문을 당기고, 밀고, 치고, 별짓을 다 해 봐도 닫힌 문은 굳건했다.

“이럴, 이럴 리가….”

그 옆, 그 옆의 옆, 그 옆의 옆의 옆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여기요! 누구 없어요! 사람 있어요!”

쓸데없는 짓을 벌이는 한이련을 여우야는 가만히 구경했다. 부채를 펄럭이는 손이 한없이 느긋했다.

급할 거 뭐 있을까.

어차피 손아귀 안인데.

그리고 이쯤 되자 범인을 깨달았는지, 문을 두들겨대던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너, 너! 네가 한 짓이지! 얼른 열어! 너 이거 감금이야! 범죄라고!”

“한낱 미물도 은원은 알거늘. 나라고 은인을 이리 대접하고 싶을 리가.”

도현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 모습에 서지민의 눈에 희망이 떠올랐다.

“그럼…!”

“허나.”

도현이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은인께서 불쌍한 아이를 두고 가겠다니 어쩔 도리가 있나.”

“……!”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대가 내게 신기만 충분히 나눠준다면 내보내 줄 테니까.”

“나는 평범한…! 아니, 후우….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그럼 그거. 신기 주는 거. 그거 얼마나 걸리는데?”

“대략….”

무언가를 가늠하듯 붉은 눈을 좁히던 도현이 입을 열었다.

“십 년 정도? 아, 은인께서는 신기가 이상하게 넘치시니 그보단 적게 걸릴 수 있겠군.”

“그, 그러면?”

“칠 년이면 되려나.”

“…….”

그렇게 희망이 산산조각 났다. 서지민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얼굴로 물었다.

“나보고 여기서… 칠 년이나 있으라고?”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좋아. 내 먹을 것은 잘 챙겨줄 터이니. 설마하니 은인을 굶기겠어?”

“은인이라며! 은인을 무슨 우리에 가둬 키우는 돼지처럼 취급해?”

바락 성을 내던 서지민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내내 약이 오르는 얄미운 얼굴을 하던 도현이 무표정한 낯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왜 잊었을까? 아까 느꼈던 그 소름 끼치던 압박감을.

머리에 찬물을 쏟아부은 듯 정신이 확 들었다.

“오백 년이라….”

도현이 되짚듯이 중얼거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구나. 그대가 거짓을 입에 담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

털썩!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은 서지민이 벽에 바짝 등을 붙였다. 그런 서지민에게 도현이 천천히 다가왔다. 서지민은 도망가지도,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 부릅뜬 눈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요괴가 왜 요괴인지 아느냐?”

다시없을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희고 매끄러운 낯과 결함을 찾아보기 힘든 이목구비는 그 자체만으로 비현실적이었다. 창호지를 통해 은은히 들어오는 달빛이 소년의 뒤로 내려앉았다.

“그 태생이 저주이기 때문이지.”

달빛을 등지고 선 이의 뒤로 아홉 개의 꼬리가 보였다. 부드럽게 살랑이는 그것에 서지민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구미호….”

“칠 년.”

손톱이 길게 자라난 손이 서지민의 목을 쥐었다.

“그 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도 네 신기쯤은 가져갈 수 있다. 어려울 게 무어 있더냐. 그저 네 간을 취하면 될 것을. 계집, 네가 봉인만 풀지 않았더라면….”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은 채였지만, 서지민은 숨을 멈추었다. 반항하는 순간 그 손이 목을 꺾어버릴 거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선택하거라.”

처음부터 묘하다고 여겼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선연히 빛났다.

아름답다고?

내가 미쳤었구나.

그녀는 그리 생각했던 과거의 자신을 후려치고 싶었다. 저건 덫이었다. 나락으로 이끄는 덫.

“나와 이곳에서 칠 년을 보낼지, 함께 갈지. 그도 아니라면….”

뒷말을 의도적으로 흐린 도현이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눈을 떼기 어려운 홍안에 어울리는 황홀한 미소였다. 그 미소를 가까이서 마주하며 서지민은, 아니 한이련은 그제야 온전히 깨달았다.

제 앞에 있는 건 어린아이 따위가 아니라….

그 거죽을 뒤집어쓴 구미호였다.

 * * *

“와, 와….”

아까부터 계속 저 상태였다.

정신을 못 차리고 있던 정경우가 이내 큼, 큼 헛기침을 하더니 강이든의 옆구리를 은근히 찔렀다. 뭐 하냐는 듯이 쳐다보는 시선에 정경우가 얄밉게 말했다.

“이든아. 네겐 미안하지만, 매니저 된 도리로서 솔직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딱 그 표정으로 쳐다보자 정경우가 안타까운 투로 말했다.

“이건… 네가 지겠는데?”

“…….”

“물론 나도 우리 이든이 응원하고 싶지. 하지만, 어? 객관성이란 게 중요한 거 아니겠어? 근데 객관적으로!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 아무리 봐도 이든이 네가 발린 거 같…. 으붑!”

강이든의 손이 날아들어 정경우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정경우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빡친 거다.

“으부붑! 아니, 사실을 말, 픕!”

빡치다니. 강이든이 빡치다니!

이 천금 같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정경우가 입이 틀어막히면서도 재주 좋게 입을 놀렸다. 갈수록 썩어가는 강이든의 눈빛에 제 마음이 다 풍족해졌다.

‘내가 드디어 엿을 먹여 보는구나!’

감격에 눈물이 차오를 지경이었다. 그간의 고생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게 다 이렇게 보상받으려 했던 건가 보다.

지금이라면 도현을 업고 서울까지 돌아갈 자신도 있었다. 강이든이 신나서 어깨를 들썩이는 그를 향해 세상에 다시없을 한심하단 시선을 보냈지만, 상관없었다.

잔뜩 신이 나 강이든의 이마에 핏줄이 몇 개는 돋을 정도로 놀려대던 정경우는 속이 좀 풀리자 실실대며 입을 닫았다. 더 놀리다간 한 달은 삐져 있을 거 같아서였다.

“…….”

이미 그런 거 같긴 하다만.

‘킁… 놀릴 땐 좋았는데.’

어떻게 달랜담.

머리 아픈 일은 일단 미뤄둔 정경우가 카메라에 둘러싸여 있는 도현을 보았다.

그나저나 쟤는 진짜.

‘괴물이네, 괴물이야.’

강이든을 놀리듯 말하긴 했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강이든도 그걸 알기 때문에 저렇게 투지로 타오르는 눈을 하는 걸 테고.

고작 몇 주.

몇 주 스터디 했을 뿐이었다.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 턱없이 부족한 시간 동안 도현은 눈이 부실 만큼 변화를 이루어냈다. 강이든의 장점을 쪽쪽 뽑아 핵심만 취한 사람처럼.

‘무슨 스펀지도 아니고.’

그만큼 저기서 연기하는 소년은 강이든과 무척이나 비슷해 보였다. 아직은. 그래, 아직은 강이든보다 어설펐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이든이의 방식을 모두 익히고 원래 방식과 어우르게 되면?’

강이든은 정석적인 타입이다.

신체적 훈련을 통한 연기법에 가장 충실한, 어떻게 보면 고지식한 타입. 강이든이 타고난 연기자인 건 맞다. 그러나 그의 옆에서 봐온 정경우는 알았다. 그 ‘타고난’ 것조차 그의 지독한 노력 앞에선 빛을 잃었다. 그를 지금의 강이든으로 만들어낸 건 스스로를 깎아온 시간이었다.

반면, 이도현은 전형적인 천재다.

하늘이 내렸다는 표현을 보통 저런 애들에게 쓰던가. 아마 이도현의 세상은 범인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노력하지 않는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만 그, 자유자재로 분위기를 다루는 것만큼은 재능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누군가는 한 달을 고민하고 노력해서 한 명의 인정을 받는다면, 저 아이는 한순간의 영감으로 열 명을 사로잡을 것이다. 정경우는 강이든 옆에서 수많은 연기자를 봐오면서 깨달았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타고난 것이다.

그런 이도현에게 강이든의 능숙한 통제력과 엄격함이 더해진다라.

도대체 무슨 결과가 나올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제대로 불붙었네.’

정경우가 어쩔 수 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이도현이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한 번에 열 걸음을 나아간다고 한들 무슨 상관인가.

그 강이든이 저라고 가만히 멈춰 있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정경우는 이제야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한동안 슬럼프로 고생했던 제 배우가 이제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으니까.

돌아왔을 뿐일까. 이전보다 더욱 열정으로 타오르는 거 같았다. 너무 어릴 때부터 연기에 몸을 담아온 이든의 열정이 식어버린 건 아닐까 무서웠던 정경우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소식이었다.

정경우의 흐뭇한 시선이 이번에는 도현에게로 향했다. 휴식 시간을 맞은 도현이 강이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원래도 예뻤는데 이제는 아주 휘황찬란한 빛을 두른 거 같았다.

저 둘의 만남은 서로에게 행운이나 다름없다. 이제 저 둘이 지지고 볶으며 성장하면….

“이거 어쩌죠. 사람들이 성인 모습에 임팩트를 못 느끼면 안 되는데.”

“겨우 그 정도로?”

행운….

“올챙이는 뒷다리가 생겨도 올챙이.”

“개구리는 뭐. 처음부터 개구리였나요?”

행운… 맞겠지?

분명히 처음 만났을 땐 낯설 정도로 예의 바르던 애가 어쩌다….

아니, 애는 애니까 그렇다 쳐.

‘근데 이든이 넌 왜 네 반절만 한 애한테 진심으로 도발하고 있니?’

맹랑한 눈빛을 한 도현에게 조소 짓는 강이든을 보던 정경우가 외면하듯 시선을 돌렸다.

모든 일은 대가가 있다더니. 연기력이 성장하는 대신 정신 연령을 제물로 바친 모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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