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30)화 (331/582)

제330화. 여우와 여우야 (4)

어느덧 11월을 지나 12월에 접어들었다.

구미호뎐의 편성은 내년 1월.

멀게 느껴졌던 방영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

드라마 촬영은 순조로우면서 동시에 순조롭지 않았다. 촬영을 위해 오던 조연 배우 한 명이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해 촬영 일자가 며칠 늦어지기도 했고.

- 그래서 지금 촬영 중이라고?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다들 잘해주시고, 무엇보다 재밌어.”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보니 또 눅눅해져 있겠는데. 진짜 눈에 보이는 데 놔둬야지, 불안해서 안 되겠네!

세 살배기 어린애나 놔두면 사고 치는 강아지쯤으로 여기는 말투에 도현이 허허 웃었다. 어쩌다가 이런 취급을 받게 됐지.

생각해 보니 처음부터였던 거 같기도 하고….

- 니키! 코치님이 불러!

- 갈게! 아무튼 도리토스 너. 내가 지켜보고 있다. 어?

“알았으니까 얼른 가 봐.”

통화를 마무리한 도현이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의 통화였다. 일주일에 세 번은 연락해 오는 진과 달리 니콜라스는 연락에 인색한 편이었으니까. 정확히는 연락을 챙길 수 없을 만큼 하루하루가 바쁘다고 하는 게 맞았다.

그런 니콜라스가 일부러 전화해 왔다.

그러지 않기도 어려웠겠지. 그가 보기에 도현은 이맘때쯤만 되면 시름시름 앓는 걸로 보였을 테니까.

징-

[니콜라스 가비 : 지켜보고 있다]

“하!”

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니키한테 완전히 못 미더운 이미지로 찍힌 모양이었다. 어이없어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도현아, 일어났어?”

문을 두들겨 오는 사람은 경찬호였다. 도현이 문고리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네. 다 챙겼어요.”

“아침부터 먹자.”

“좋아요.”

촬영하며 붙어 다니는 시간은 두 사람의 거리감을 좁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몇 날 며칠을 하루 종일 붙어 다니다 보니 친해지지 않기도 어려웠다.

도현에게 극존칭을 쓰던 경찬호도 이제 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도현은 이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애초에 미국에서는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썼고.

아침 식사를 위해 내려가자 인사를 건네오는 사람들에 도현은 하나하나 답해주며 생각했다. 또다시 바쁜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좋아요! 거기서 그대로 이든 씨랑 도현이가 자리 교대로…. 이든 씨?”

정가현의 목소리에 의문이 담겼다. 자리를 비켜줘야 할 강이든이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도현을 보고 있었던 탓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강이든이 천천히 손을 올렸다. 저 멀리서 정경우가 ‘저 미친놈이 이젠 어린애를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하며 덜덜 떠는 사이, 강이든의 손이 도현의 이마에 닿았다.

“저… 이든 씨?”

침묵하던 강이든이 손을 내리고 정가현 감독을 쳐다보았다.

“감독님.”

“네?”

“얘, 열납니다.”

“네… 네에?!”

그렇게 촬영장이 뒤집어졌다.

“날이 추워서 감기에 걸렸나 보네요. 혹시 촬영 일정으로 무리했나요? 몸살 기운도 있는 거 같고….”

의사의 진단을 받은 도현은 곧장 링거액을 맞은 후 숙소로 이동되었다.

도현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정가현 감독이 도현의 어깨를 꽉 잡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 죄송,”

“내가 미안해, 도현아.”

두 사람의 말이 동시에 나왔다.

도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가현 감독은 마음의 양심이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원래 넉넉했던 촬영 일정이 조연 배우의 사고로 인해서 타이트해졌다. 초반에는 휴식도 자주 가지고 그랬다면, 최근에는 거의 쉴 틈 없이 달린 건 사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심했어야 하는데.’

사실 아픈 이가 도현이 아니었더라면 이처럼 죄책감이 들 리는 없을 터였다. 어쨌거나 그녀는 드라마를 이끌어가야 할 책임이 있는 감독이었으니까.

다만, 도현의 상황은 좀 특수했다.

‘이장혁 걔를 무슨 낯으로 보지.’

대학 동창.

그녀도 알고 있었다. 그 연줄 덕분에 도현의 섭외가 이리 쉬웠다는 것을. 그렇게 연줄로 아들내미를 데려와 놓고 아프게 했다…? 이건 그냥 쓰레기였다.

‘쓰레기 새끼.’

정가현이 스스로를 비난하는 사이 도현은 생각에 잠겼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물론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늘어지는 걸 느끼긴 했다. 그래도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라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저, 감독님. 촬영은….”

“일단 낫는 것만 신경 써. 솔직히 내가 욕심부린 거지, 지금까지 뽑은 분량으로도 문제는 없거든.”

“그래도….”

도현이 영 마음이 불편해 보이자 정가현이 웃었다.

“빨리 낫는 게 도와주는 거야. 네가 아니라 이든 씨가 아팠어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걱정하지 말고 쉬어, 도현아.”

물론 이도현이나 강이든이 아닌 다른 이였다면 적당히 쉬게 하고 촬영에 투입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지금 아픈 건 이도현이니까.

지금 당장 아픈 애를 쥐어 짜내 한 장면이라도 더 촬영하는 것과 미래의 대배우, 아니, 지금도 견줄 만한 다른 또래가 없는 배우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는 것.

어느 쪽이 이득인지는 굳이 재볼 필요도 없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도현의 부모님은 이쪽으로 오겠다며 곧장 차에 몸을 실었지만, 결과적으로 말해서 그건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도현아! 얼굴이 반쪽이… 반쪽이…?”

이장혁이 말끝을 애매하게 올렸다.

얼굴이 반쪽이어야 할 텐데.

“아… 하하.”

도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장혁은 생각했다.

‘왜… 촬영 전보다 더 건강해 보이지?’

얼굴에 혈색이 자르르 돌았다. 잠을 얼마나 잘 잔 건지, 피부는 광채가 나는 듯했다. 두 눈도 평소의 배로 총명했다.

“어… 자고 일어나니까 다 나았더라고요.”

도현이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틀린 말은.

‘자기 전에 덩어리 님이 다녀갔을 뿐.’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쯧쯧 찬 덩어리 님이 이마를 훑고 지나가자 무거웠던 몸이 단숨에 가벼워졌다.

“정말 다 나은 거니? 어디 아픈 곳 없고?”

“네. 저 괜찮아요.”

“하아… 다행이다.”

서혜나가 도현을 조심스레 껴안으며 등을 도닥여 주었다. 도현은 그 품에 안겨 덩어리 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내가 맞춘 건 영혼뿐이야. 정신적인 문제까지는 어쩔 수 없어. 그러니 몸 다 나았다고 빨빨대며 돌아다닐 생각 말고 더 쉬어라, 작은 인간아!

“그래도 며칠은 더 쉬어야지. 촬영 일정 때문에 힘드려나….”

“아, 다 나았다고 했는데 감독님이 오늘까지는 쉬라고 하셨어요.”

“가현이가? 고맙다고 해야겠네.”

그렇게 도현은 오랜만에 가족과 하루를 보냈다. 최근에는 내내 촬영장에서 살다시피 했던 터라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 있는 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차라리 뭔가 생산성 있는 일을 하고 싶은데 문제는 무언가 하려고만 하면.

“도, 도현아….”

이장혁이 촉촉한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은 움찔하다가 이내 손을 내려놓았다.

어째설까.

갈수록 부모님을 당해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도현에게 아무것도 바라고 요구하지 않는데도 그랬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그런가.

결국 도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를 푹 쉬었다. 그리고 도현이 멍하니 뒹굴거리는 동안, 부모님은 그 곁을 지켜주었다.

* * *

다음 날.

촬영장에 복귀한 도현은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그들은 처음에 도현을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보았으나, 딱 보아도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곧 안심한 거 같았다.

정경우는 아닌 척 도현을 흘깃거리더니 다가가는 강이든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했나 보네.’

제일 먼저 알아챈 것도 이든이 아닌가.

그래도 우리 이든이가 약간 맛이 갔을 뿐, 인성은 참….

“이거. 이전에 말한 대로.”

“싫어요. 이 부분은 좀 더 격한 게 낫다고요.”

“몇백 년 묵은 구미호야.”

“나이가 많다고 다 성숙한 건 아니더라고요. 그리고 여우야는 관계에 실패를 여러 번 겪어서 감정적으로 불안정해요.”

“…더 능숙하게 숨기는 편이 낫다니까?”

“아니라니까요?”

그래, 배우라면 저렇게….

아니, 아니지.

“에라! 이든아! 몸은 괜찮냐고 물어보기부터 해야지! 우리 상식선에서 행동하자!”

저 둘한테 하마터면 물들 뻔했다.

“…아.”

강이든이 깨달은 눈으로 도현을 쳐다보았다.

“몸은?”

“좋아요.”

“그래. 그래서 이 부분은….”

“아니, 거기서는….”

“하. 봐봐. 이렇게….”

“너무 애매하잖아요. 제가 보여 드릴게요. 차라리 이렇게….”

텁.

어깨에 얹히는 무게감에 정경우가 옆을 돌아보았다. 경찬호가 무거운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답이 없구나.

그래….

 * * *

“왜… 저 빼고 다…?”

도현이 배신감 어린 눈으로 배우진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큼, 큼 헛기침하며 도현의 시선을 피했다. 틀어진 뺨이 파들거리는 게 보였다.

“우리 도현이가 오늘 스타겠네. 인기 스타.”

“……”

정동연이 꺼낸 말에 도현이 침묵했다.

방송국 측에서는 한 가지를 요구해 왔다. 바로 제작발표회 때 개량 한복을 입어달라는 요구였다. 덕분에 도현은 발표회하면 생각나는 정장 대신 한복을 걸친 채였다.

저고리와 바지는 기본적인 흰색이었고, 그 위에 은은한 연보라색의 답호를 입었다. 언뜻 아주 연한 분홍색처럼도 보이는 답호는 종아리 부근까지 내려왔고, 허리에는 흰색의 술띠가 둘러져 있었다.

작중에서 저고리를 풀어 헤치고 다니던 여우야가 이런 선비님 같은 옷을 입을 리는 없으니, 이벤트성이라는 얘기였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여기까지는.

근데….

도현은 저만 빼고 완벽한 현대식 의복을 입을 이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누군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 아니. 원래 이런 건 어린애가 입어줘야 귀여운 거고….”

그래야 더 돋보일 테고.

도현의 시선을 받은 정가현이 애써 변명했다. 차가운 시선이 변하질 않자 궁색한 말이 나왔다.

“그으… 그래도 잘 어울리니까 괜찮지 않니?”

“…매니저 형.”

“자.”

그가 턱 건넨 것에 사람들이 의아한 눈을 했다.

그리고.

“이든 선배님. 이거요.”

“?”

“이거 해야 한대요.”

한쪽에서 멍 때리고 있던 강이든이 맹한 얼굴로 허리 밴드를 받아 제 허리에 둘렀다. 정경우가 기겁하며 달려들었다.

“이든아! 옷 구겨져! 옷! 으악, 벌써 둘렀어! 도, 도현이 너….”

정경우가 경악하고 있자 서지민이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지금도 잘 어울리는데요?”

그녀의 말에 정경우가 진정하고 강이든을 보았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진짜네요?”

조금 힙하다는 점을 빼면 정장 위에 두른 띠는 꽤 잘 어울렸다. 재킷이 너무 오버핏이 아니라 늘씬하게 잘 떨어졌다. 약간 개량 한복 같기도 했다.

정경우가 도현을 쳐다보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거 같았어요.”

저 허리띠는 도현이 술띠와 허리띠 중에 무얼 맬까 고민하다가 탈락한 후보였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챙겨왔는데… 강이든이 눈에 들어왔다.

도현이 아무리 패션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부모님이 두 분 다 그쪽 업계였다. 보고 듣는 것이 많으니 감각도 늘 수밖에 없었다. 어울릴 거 같으니까 준 거였다.

“혼자 한복인 게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도현이 정경우의 시선을 피했다.

정경우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걸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그놈이 그놈이란 걸 깨달아버린 그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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