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1화. 여우와 여우야 (5)
- 제작 발표회 시작한다!!
- 이도현 나옴?
- 휘민아 ㅠㅠㅠㅠ
- 빨리빨리ㅣㅣㅣ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방송에 댓글이 빠르게 달렸다. 어찌나 많이 달리는지, 댓글을 읽지 못할 지경이었다.
MC의 간단한 인사말이 지나가고.
“지금부터 구미호뎐의 감독님과 작가님, 배우님들을 모시겠습니다!”
- 왓다!!!!
- 강이든 얼굴에서 빛이 난다
- 이든아!!!
- 저거 허리에 두른 거 뭐임?
- 개량 한복인가?
- 코디 누구냐 ㅠㅠㅠ 절 받아라
- 서지민 대존예 ;;
- 서지민은 왜 한복 안 입음?
- !!!!
- !!!!!!
- 이도현 나왔네 ㅁㅊ
제작발표회 현장.
차차차차차차찰칵!
도현이 등장하자마자 플래시 세례가 미친 듯이 터졌다. 강이든과 서지민 때도 충분히 격렬했는데, 기자들은 제 손가락이 일 초에 몇 번이나 움직일 수 있는지 증명하겠다는 듯이 열심히 손가락을 놀렸다.
어찌나 격렬한지. 잠깐 플래시 탓에 도현이 하얗게 날아간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 플래시 보소;;
- 오 한복 아님?
- 선비님이야?
- 뭔데 잘생겼냐
- 아니 한복 왜 이렇게 잘 어울림?
- 이미 완성형 미모 ㄷㄷㄷ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기사가 속속들이 올라왔다.
[(포토) 제작 발표회 현장, 이도현 한복… 시선 집중]
[강이든, 이도현. 한복 컨셉 제작 발표회]
[<구미호뎐> 제작 발표회 현장!]
그 사진들은 그대로 네티즌들을 타고 나가 여러 커뮤니티에 올라왔다. ‘이도현 한복’ ‘구미호뎐 제작 발표회’ 같은 키워드가 실시간 트렌드를 장악한 건 얼마 안 가 일어난 일이었다.
이어 신휘민까지 등장하자 현장은 완전히 과열되었다. 작년에 이토록 시선 집중을 받은 드라마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였다.
‘없었겠지.’
정가현이 긴장을 내리누르며 속으로 웃었다.
강이든, 서지민, 이도현, 신휘민.
이 캐스팅보다 더 핫한 캐스팅은 몇 년 사이 없었다. 그리 생각하며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감독 인사가 제일 첫 순서였다.
“저는 <구미호뎐 : 인과 연>을 맡은 감독, 정가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고 옆자리에 있던 서승아가 말을 이어받았다. 이런 자리는 처음인지 많이 떠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차분하게 할 말은 끝까지 마쳤다.
이어, 배우 소개가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구미호뎐 : 인과 연>의 남자 주인공, 여우야를 맡은 강이든….”
“이도현입니다.”
미리 말을 맞춰 놓은 부분이었다. 둘이 같은 배역을 맡았으니 말이다. 다만 연차도 있고 나이도 있으니 소개는 강이든이 맡기로 했다.
“여우야는 구미호를 모티브로 탄생한 캐릭터지만, 기존의 속설로 내려오는 구미호와는 조금 다릅니다. 여우야는….”
간단한 배경 설명이 이어지고.
“오백 년 만에 다시 눈을 뜬 구미호는 봉인을 푼 여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는 드라마를 봐야겠죠?”
도현이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애썼다. 도현이 알기로 설명은 저게 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귀찮았구나.’
진실을 아는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모르는 이들은 능글맞은 태도에 재밌다며 웃음을 터트렸다. 모르는 게 약이었다.
대신 도현이 마이크를 들었다.
“여우야는 많은 것이 변해버린 세상에 뻔뻔할 정도로 잘 적응하지만, 실은 남몰래 속으로 우는 캐릭터입니다. 겉보기엔 여우지만 속은 여린 여우야니까, 많이 예뻐해 주세요.”
도현이 마이크를 내려놓자 강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는 듯이.
…혹시, 일부러?
도현이 이내 생각을 치웠다. 강이든이 그렇게 고차원적인 생각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후로 서지민과 신휘민, 정동연 등 배우들의 소개가 이어졌다. 배우들의 소개가 모두 끝난 후 정가현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구미호뎐 : 인과 연>은 한번 이어진 인연의 실은 그 어떤 운명의 흐름 앞에서도 이어진다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한 드라마입니다. 사랑, 원망, 죽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요.”
이 말은 서승아 작가의 말을 대변한 것이었다.
“인연이라는 끈에 묶인 어린 여우가 성장해서 구미호가 되고, 그리고 이내 인연의 실을 매듭짓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돌고 돌아 결국에는 다시 제 운명을 마주하게 된 어린 여우의 이야기가 여러분들의 삶에 새로운 인연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짝짝짝짝!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옆에서 서승아가 그녀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정가현도 그제야 조금 편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잠시 후.
기자들과의 문답 시간이 다가왔다.
서지민은 애매하게 웃었다.
‘내가 참… 찬밥 신세 될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평소라면 플래시도 마이크도. 그녀를 향해 몰렸을 텐데 지금은 예의상 온 두어 번의 질문이 다였다.
그래서 기분 나쁘냐고?
아니.
그 어떤 여배우를 데리고 와도 이 라인업에서는 주목받기 힘들 것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있자고 마음먹으며 서지민이 기자들을 둘러보았다.
난장판이었다.
기자들조차 어디에 집중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눈치였다.
한시도 쉬지 않고 작품을 찍다가 첫 휴식기를 끝내고 돌아온 강이든이냐.
남자 아이돌 1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온탑의 인기 멤버이자, 처음으로 배우의 길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딘 신휘민이냐.
온갖 화제를 휩쓸고 다니다가 몇 년 만에 한국에 자리 잡고 작품에 참여한 이도현이냐.
저울이 끊임없이 휘청거렸다. 어디 하나 무게를 더 주기도 힘들고 빼기도 힘들었다. 뭘 건져도 화제성이 넘쳐났다.
“강이든 배우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시고, 처음으로 휴식기를 맞이하셨는데요. 그 휴식기를 끝내고 구미호뎐에 합류한 이유가 있을까요?”
기자가 건넨 질문에 강이든이 마이크를 집었다.
“구미호뎐은 무척 매력적인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선과 악으로 나뉘지 않는 캐릭터나 서사가요. 무척 재밌게 보았기 때문에 섭외가 들어왔을 때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이야기에 기자가 실망할 때였다.
“거기다, 같이 작품을 찍어보고 싶던 배우님이 참여한다는 소식을 들어서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그 배우가 어느 분이시죠?”
“제 옆에 앉은 분이요.”
그 옆에 앉은 분이 어색하게 웃었다.
단숨에 스포트라이트를 건네받은 도현이 터지는 플래시에 눈을 찡그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도현 배우님이랑 같이 작품을 찍고 싶었다는 이야긴가요?”
“드라마 촬영 전에 두 분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스터디를 한다는 이야기가….”
질문이 쏟아졌다.
그때.
“그럼, 이도현 배우님이 강이든 배우님의 슬럼프를 깨주었다는 소립니까?”
날아들어 온 질문에 발표회 현장이 조용해졌다.
슬럼프.
그건 사람들이 쉬쉬하기는 해도 알고 있었던 사실이니까. 사실 다들 강이든에게 물어보고 싶었을 것이다.
강이든과 슬럼프라니.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긴가.
“잠깐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을 뿐입니다. 죄송하지만, 드라마와 관련되지 않은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강이든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 태연한 대답에 기자들은 ‘에이, 아닌가 보네’ 하면서 관심을 사그라트렸다.
이어서 신휘민에게 질문이 향하다가, 그 질문의 화살이 다시 도현에게로 향했다.
“웹툰에서 이 부분으로 파가 갈렸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도현 씨는 어린 여우야와 성인 여우야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서지민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기자들이 모두 그런 건 아니었지만, 꼭 저런 기자들이 존재했다. 허점을 보일 거 같은 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 문제될 만한 질문을 던지는 이들.
‘어리니까 만만했겠지.’
여기서 도현이 ‘어린 여우야요’라고 대답하기만 해 봐라. 지금은 웃고 넘어가겠지만 한 시간 뒤에 인터넷에는.
[자신감을 넘어 오만한 할리우드 배우?]
라는 제목이 올라올 것이다.
서지민은 벌써부터 댓글까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 이래서 너무 어린 나이에 데뷔하면 안 됨;
- 조금 비호감이다
- 나중에 크면 더 하는 거 아님?ㅋㅋㅋ
- 이럴 줄 알았어 인성 좋다고 영업하더니만 ㅋㅋㅋ
- 그래도 강이든이 선밴데;;
‘아, PTSD 오네.’
서지민은 부르르 떨리는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녀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도현을 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끼어들 생각이었다.
물론 배우 생활로는 도현이 선배지만, 그래도 인생 경험으로는 그녀가 선배였으니까.
그리고.
“어려운 문제네요. 둘 다 너무 매력적이거든요. 선배님,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서지민은 도현이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능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토스 실력을 보라.
“어린 여우야가 귀엽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다 큰 여우야가 멋있고 섹시하지 않겠어요? 딱히 제가 맡아서 그런 건 아닙니다.”
맞받아치는 강이든도 마찬가지였다. 누가 보면 미리 입을 맞춘 줄 알았을 것이다. 강이든의 너스레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건 편파적이잖아요! 그럼 이렇게 하죠. 지민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 저요?”
심지어 서지민까지 끌어들인다.
“네. 둘 중에 누가 더 매력적이에요?”
“…….”
여우네, 여우야.
어쩜 이렇게 배역이 찰떡같이 돌아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곤란한 질문을 던져주고선 싱글생글 웃는 도현에 서지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 잘 모르겠는데요. 두 분 다 분발하셔야겠어요.”
이왕 분위기가 이렇게 흐른 거.
괜히 딱딱하게 대답해서 분위기 흐리는 것보다는 장난식으로 넘기는 편이 나았다. 이 정도라면 ‘드라마 배우진들이 친하구나’로 받아들이고 넘어갈 것이다.
“지민 씨. 그 말씀 후회하지 마세요.”
근데 왜 강이든의 저 말은 장난 같지 않지. 서지민은 목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하하, 웃었다.
* * *
“휘민아, 수고했다.”
그룹 온탑의 매니저는 말없이 조수석에 앉아 창문만 보는 신휘민에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악! 휘민아!”
차 너머에서 팬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와중에도 신휘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매니저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하….”
움찔. 옆에서 들린 한숨 소리에 매니저의 어깨가 튀었다.
“형, 형도 봤지.”
“뭐, 뭘?”
“기자들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야, 야.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신휘민인데.”
“그러게. 내가 신휘민인데….”
왜 내가 주목을 덜 받을까.
“어이가 없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매니저는 필사적으로 모른 척을 했다. 저기서 건들면 터진다. 지금 신휘민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매니저의 눈물겨운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휘민은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주목은 익숙하다.
그러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고, 그거 하나 받자고 돌아온 시간이었으니까.
- 연기? 순진한 소리 하지 마. 그걸로 성공할 수 있을 거 같아? 너 정도 하는 애들은 널렸어.
- 너 머리 좋잖아. 똑똑하게 굴자, 휘민아. 응?
맞는 말이다.
그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결정했다. 다만, 생각보다 그룹이 더 크게 성공해서 노선을 트는 데 오래도 걸렸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제부터 제대로 된 길을 걸으면 되니까.
그러니 이게 그 시작인데.
“시작부터 참, 잘도 돌아가네.”
대본 리딩 날도, 촬영장에서도, 제작 발표회에서도.
그에게 잠깐 집중하는 척하다가 결국 스포트라이트는 다른 쪽으로 향한다.
그 어린애한테 말이다.
신휘민은 습관적으로 기사를 확인했다. 그 아래에 좋아요가 가장 많이 달린 댓글이 보였다.
- 라인업 개쩜 ㄷㄷㄷ
⌞함정 한 개만 빼면ㅋㅋㅋㅋ
⌞함정 카드 발동?
⌞ㄹㅇ 이도현이 있는데 아이돌은 왜 넣었는지 모를 일
⌞하여튼 아이돌 빠들이 문제야
- 제발 신휘민 발 연기만 펼치지 마라 제발 제발
⌞222222
⌞바랄 걸 바라셈ㅋㅋㅋ 인기로 들어온 애한테 뭘 바람
- 그러니까 형, 배우는 무슨 배우예요.
놀리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휘민의 팔목에 핏대가 섰다. 그가 부서질 듯이 쥐던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어차피 이런 건 다 의미 없었다.
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