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32)화 (333/582)

제332화. 여우와 여우야 (6)

구미호뎐의 제작 발표회는 여러모로 화제가 되었다. 도현의 한복 차림이나 강이든과 신휘민의 케미 같은 부분도 물론 화제였지만.

- 예고편만 스무 번째 돌려보는 중ㅠㅠ

- 진짜 이도현 미쳤냐고… 아니 애기가 왜 멋있는 건데;;

[본격_만화를 찢고 나온_배우_ jpg]

무엇보다 제작 발표회 중간에 상영했던 하이라이트 영상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 요괴가 왜 요괴인지 아느냐?

카메라 감독이 혼신의 힘을 다해 찍었을 것이 분명한 완벽한 각도였다. 오래 방치되어 쓸쓸한 분위기가 흐르는 절 안.

옆얼굴에 부드러이 타고 흐르는 달빛이 그 이목구비의 수려함을 부각해 주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소년의 얼굴에 비친 표정만큼 인상적이진 못했다.

소년의 뒤로 아홉 개의 꼬리가 돋아났다. 방송국에서 이 드라마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짐작이 갈 정도로 정교한 CG였다. 그 뒤로 피리와 어우러진 몽환적인 배경 음악이 깔렸다.

- 그 태생이 저주이기 때문이지.

마침내 모두 돋아난 아홉 개의 꼬리에 시선을 빼앗겼을 때.

- 그러니 선택하거라. 나와 이곳에서 칠 년을 보낼지, 함께 갈지. 그도 아니라면….

제 목덜미를 쥐고 사납게 웃는 구미호를 넋 놓은 채 보던 한이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내 인생에 구미호라는 이상한 존재가 끼어든 순간이었다.]

그 독백을 마지막으로 예고편은 끝이 났다.

그 예고편은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도현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대단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인식 속에서 도현은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처음 베니스에 등장했을 때 젖살도 채 가시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고 한국에서 흥행한 괴짜들에서도 조금 이상하고 철없는 배역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 생각해 보면 이도현 방랑자에서도 저런 연기 되게 잘했음 뭔가 신비롭고 무거운 느낌의 연기 ㅇㅇ

- 헐 그러네

- 와 잊고 있었다…

- 제이로빈 이미지가 넘 강하게 박혀서 그럼 ㅋㅋ

도현의 성장과 이미지 변신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오기 충분했다.

오랜만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도현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때보다 젖살이 더욱 빠져 원래도 날카로운 편이던 턱선이 더 도드라졌고, 눈매나 인상에도 서늘함이 더해졌다.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은 유독 성숙해 보인다더니, 그가 이제 중학교 입학하는 나이라는 걸 모르고 본다면 십 대 중반처럼 보이는 생김새였다.

거기다 구미호 역할을 맡아서 연기했다. 연기력이 뛰어난 건지 본래 타고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예고편에서 도현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진짜로 어린아이의 거죽을 입은 요괴라도 된 것처럼.

그와 관련해 사람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 이도현 캐스팅 신의 한 수 ㅇㅈ

- 나 원작 팬인데 좋아서 기절할 뻔… 진짜 캐스팅 원작 고증 미쳤음

[웹툰 여우야와 드라마 여우야 비교 (사진 첨부)]

웹툰의 각 장면과 도현이 연기한 장면을 잘라다가 비교해 보는 글이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금요일, 구미호뎐 첫 방영!]

[KBN <구미호뎐>, 첫 방영은 언제?]

[배우 이도현, 드디어 한국에서 드라마 출연!]

<구미호뎐 : 인과 연>의 첫 방영일은 성큼 다가왔다.

* * *

드라마의 첫 방영은 촬영을 함께한 사람들이 모여서 보는 게 일종의 관례였다. 도현도 그 자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도현아! 여기, 여기 앉아!”

도현이 오자마자 벌떡 일어나 반갑게 손을 흔든 사람은 서지민이었다. 그 자리에 감독과 작가를 비롯해 강이든, 신휘민, 정동연. 작품 내에서 한가닥 하는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도현이 옆자리는 제 차지네요!”

“끄응….”

한 박자 늦었던 정동연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서지민이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도현은 그렇게 서지민이 마련해 준 자리에 가서 앉았다. 양옆에는 서지민과 신휘민이, 맞은편에는 강이든이 있었다. 강이든 옆에는 정동연과 감독님, 작가님이 자리했다.

“자, 다들 모였으니 일단 한 잔 마시고 시작합시다!”

정가현이 외치는 말에 다들 잔을 들어 올렸다.

“응? 도현이 너…?”

높이 들어 올린 소주잔 사이에 끼어는 작은 손에 서지민이 의아한 눈초리를 했다.

“거, 주인공이나 다름없는데 혼자만 빠지면 쓰나? 내가 일부러 물 따라줬지!”

정동연이 장난스레 하는 말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들 귀엽다는 듯이 쳐다봐 도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건배합시다!”

고깃집 형광등 아래, 잔들이 부딪쳤다.

“쭉, 들이켭시다. 쭈욱!”

신이 난 사람들이 시원하게 소주를 들이켰다. 도현도 소주인 척하는 물을 마시곤 서지민이 건네주는 환타를 홀짝였다.

“도현이는 못 올 줄 알았는데.”

그 말에 도현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딱 봐도 기뻐 보이는 정가현이 도현을 보고 있었다. 그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현도 오늘 참석하지 못할 수 있겠단 생각을 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 방영되는 <구미호뎐>의 방영 시간은 다름 아닌 10시 반. 중학교도 안 간 아이가 참여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엄마 아빠가 별다른 말씀 안 하시던걸요.”

진짜로 그랬다. ‘보고 바로 돌아와야 해. 매니저님이랑 떨어지지 말고. 그리고 또…’라는 말로 시작된 잔소리 겸 걱정은 한 시간가량 이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쉽게 허락해 주었다.

“하긴. 내 자식이 도현이면 별로 걱정이 안 될 거 같아. 워낙에 야무져서.”

정가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다들 촬영하면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자, 먹어. 먹어. 많이 먹고 커야지.”

말리는 손길에도 불구하고 직접 집게를 든 정동연이 잘 구워진 고기를 도현의 자리에 올려주었다. 도현이 감사하다고 말하며 한 점 집어 우물거리자 그가 흐뭇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고기가 익어가며 밤도 더욱 깊어져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 앉았던 자리는 의미를 잃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테이블을 옮겨 다닌 탓이었다. 물론 도현은 술을 마시지 않으니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도현아! 우리끼리 짠 하자!”

서지민이 환타가 든 잔을 내밀며 그렇게 말하자 도현이 잔을 부딪치며 물었다.

“누나는 안 마셔요?”

“술? 응. 못 마시는 건 아닌데… 버릇이 좀 안 좋아서. 공적인 자리에선 잘 안 마셔.”

그러면서 웃는 얼굴이 장난스러웠다. 그러다 얌전히 고기를 굽고 있는 이에게 말을 걸었다.

“휘민 씨. 휘민 씨는 안 마셔요?”

“전 체중 조절을 해야 해서요.”

“아이돌은 힘들구나….”

서지민이 진심으로 안타까운 눈으로 신휘민을 보았다. 그가 웃으며 비활동기에는 잘 마신다며 답했다.

“자, 그러면 못 마시는 사람들끼리 건배나 할까요?”

“좋죠.”

세 사람의 잔이 부딪쳤다.

그리고.

어느새 시곗바늘이 10시를 지나 10시 2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기분에 취한 채로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고작 광고가 나올 뿐인데도 가게 내부는 점점 조용해졌다.

이어.

만월이 떠올랐다.

* * *

깊은 밤.

타다닥!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둑한 하늘을 밝히는 횃불이 불길한 붉은색으로 일렁였다. 마을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 도망, 도망가야… 끄윽!

절박하게 외치던 사내가 제 목을 틀어잡았다. 날카로운 송곳니에 꿰뚫린 목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털썩. 쓰러진 사내를 밟고 선 짐승의 붉은 눈이 밤하늘 아래서 선뜩하게 빛났다.

- 괴, 괴물 자식!

용기를 낸 이가 손에 든 횃불을 휘둘러 보았지만, 길게 돋아난 손톱에 가슴께가 베이고 산 채로 간을 뜯어 먹히는 끝을 맞이했을 뿐이었다.

학살.

그건 학살이었다.

여우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피가 번졌다. 비명과 절망, 죽음의 소리만이 마을을 가득 채웠다.

- 으, 으으….

눈물범벅이 된 아이가 벌벌 떨며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붙은 여우가 공포에 잠식되어 팔다리를 휘두르는 아이의 발목을 아득, 깨물었다.

- 아아아악!

발을 쥐어 잡은 아이가 절망 어린 낯을 했다. 여우의 뒤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아이의 눈에는 저승사자처럼 비쳤다.

죽음.

그것이 짐승의 형태로 다가와 기어코 피를 취하려던 때였다.

아이의 숨소리만이 들리던 것에 피리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동시에 하늘에서 요요히 빛나던 달이 구름에 가려졌다.

아우우우우!

여우가 달을 향해 길게 울었다.

탁, 타닥.

주춤거리며 일어난 어린아이가 뒤를 흘긋거리다 땅에 핏자국을 점점이 수놓으며 정신을 놓고 도망칠 때까지. 여우는 계속 달을 향해 울었다.

이내 마을에 침묵에 잠겼을 때.

희게 빛나는 꼬리 옆에 새로운 꼬리가 돋아났다. 여우의 긴 울음과 동시에 화면의 초점이 만월이 뜬 밤하늘로 향했다.

“이게….”

채 여운에 잠기기도 전이었다.

어슴푸레하던 밤하늘이 순식간에 붉은색에 잡아먹혔다. 활활 타오르는 불이었다.

- 하, 할머니….

재가 묻고 다쳐 엉망이 된 아이가 불이 난 집안에서 울고 있었다.

- 어여 나가! 어여!

- 싫어! 같이 가! 같이 가!

- 나가래두!

- 싫어, 할머니! 싫….

우지끈. 

울며 비명 지르던 아이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방금까지 할머니가 있던 방이….

“…싫어!”

벌떡!

헉, 허억. 숨을 몰아쉰 이가 식은땀이 배어난 이마를 닦았다. 작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 어두컴컴했다.

“…또 그 꿈 꿨네.”

하아. 피곤한 숨을 뱉은 한이련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겁에 질린 어린아이가 아니라 씩씩한 여자가 있었다.

“할머니, 저 오늘 엠티 날이라고 꿈에 나오신 거죠?”

한이련이 읏차,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운 내야지. 즐겁게 놀아야 하는 날인데!” 

아까의 슬픔은 찾아볼 수 없는 활기찬 모습으로 외친 한이련이 밤하늘을 보며 씩 웃었다. 그 후로 장면이 진행되자 가게에 내려앉았던 침묵이 깨어져 나갔다.

“시작부터 장난 아니네요.”

“그러니까요.”

다들 동감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잘 뽑힌 장면에 세상 배부른 얼굴을 하고 있던 정가현이 말했다.

“이게 첫 화라서 오프닝 대신에 저 장면이 나온 거고, 2화부터는 오프닝이 나올 거예요. 그것도 정말 잘 만들었으니까 기대하셔도 좋을걸요.”

편집팀을 갈아 넣어 만든 오프닝이 아닌가.

감독의 말에 다들 시끌벅적해졌다. 그사이 1화의 내용은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치근덕대는 대학 선배에 참다못한 한이련이 웃으며 주먹을 쥐자, 눈치 빠른 동기 한 명이 그녀가 사고 치기 전에 밖으로 쫓아냈다.

- 아씨, 한 대 칠 수 있었는데….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가게 내에 웃음이 터졌다. 촬영장에서 보는 것과 편집이 끝난 장면을 보는 건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 또 따라 나왔어? 바퀴벌레도 아니고!

소름이 돋은 한이련이 선배를 피해 숲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욕을 쏟아내며 산속을 걷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을 때였다.

- 어? 언제 여기까지 왔지. 알았어. 나 이제 돌아갈게. 응.

전화를 끊은 한이련이 되돌아가려고 뒤를 돈 순간이었다.

- 그런데… 여기가 어디더라?

얼굴에 서서히 당혹이 번졌다.

- 뭐, 뭐야. 이게 왜 안 돼!

급히 핸드폰을 켜보았지만, 아까까지는 터지던 데이터가 먹통이었다. 전화를 걸어봐도 수신음이 걸리지 않았다. 한이련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앞을 보았다. 어둠에 잠긴 숲이 펼쳐져 있었다.

- 망했다….

망연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잠시 후.

거기에 계속 서 있을 수 없었던 한이련이 숲속을 헤맬 때였다.

- 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진 한이련이 쓰라린 무릎을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발이 걸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 그녀가 중얼거렸다.

- 새끼줄? 여기에 왜 새끼줄이….

그리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한이련의 두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분명히 아까까지는 아무것도 없던 숲 한가운데에.

- 절…?

방치된 듯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그러나 웅장하리만치 커다란 절이 있었다.

이후.

스님이 계신다면 도움을 청할 심산으로 절에 들어간 한이련은, 뜬금없는 곳에 자리한 산수화를 홀린 듯이 건드리게 되고 오백 년간 잠들어 있던 구미호를 깨운다.

- 그러니 선택하거라. 나와 이곳에서 칠 년을 보낼지, 함께 갈지. 그도 아니라면….

예고편에 나와 인터넷을 휩쓸었던 구미호의 요사스러운 미소와 경악한 한이련을 마지막으로.

먹물 번지듯이 화면이 흑백으로 변하며 OST가 흘러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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