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여우와 여우야 (8)
[<구미호뎐 : 인과 연> 끝없는 상승세! 3화 만에 시청률 20%대 돌파!]
[구미호뎐 3화, 강이든 등장… 시청자 반응 ‘폭발적’]
[강이든-서지민-신휘민 삼각관계?]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성인 여우야!]
“하핫, 하하핫!”
“…….”
“아이고, 우리 복덩이 왔구나! 그래, 오는 길은 안 힘들었고?”
바로 옆이 숙소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그럼. 날씨도 이렇게 좋고.”
도현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상 예보에서 낮 동안 소나기가 내린다더니. 벌써부터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그러게요.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같이 아름다운 날씨예요.”
“그렇죠? 하하하!”
“호호호!”
현장을 눈에 담고 싶다는 이유로 촬영장에 방문한 서승아 작가였다. 아까부터 파들거리는 입꼬리를 도저히 주체하지 못하던 정가현이 참다 참다못한 사람처럼 뱉어냈다.
“시청률도 좋고!”
그랬다.
3화 만에 평균 시청률이 20%를 넘어섰는데 세상 그 무엇이 아름답지 않을까. 돈과 명성이 굴러들어 오는 소리가 이렇게나 크게 들리는데!
도현은 조심스레 뒷걸음질쳤다. 지금 두 사람이 뿜어내는 행복 바이러스를 견뎌낼 자신이 도저히 없었다.
성공적으로 자리를 피한 도현이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별로 안 기쁜가?”
“네?”
깜짝 놀란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아, 휘민 형?”
아무래도 자리에 선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도현이 어정쩡하게 두 걸음 정도 물러났다.
“근데 아까 뭐라고…?”
“별로 안 기뻐 보여서.”
“그래 보였어요? 제가 표정에 잘 안 드러나는 편이라 그런가 봐요.”
괜히 말이 길게 나왔다.
도현은 조금 더 물러난 채로 그를 쳐다보았다.
신휘민.
도현은 이 사람에 대해 아직 덜 파악한 상태였다.
차라리 강이든은 쉬웠다. 드러나는 표정만 적을 뿐 그 자체는 굉장히 숨기는 거 없이 솔직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신휘민은….
“그래? 나는 이 정도는 감흥 없는 줄 알고 대단하다 생각했지.”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딱히 속내라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언뜻 비치는 눈빛이 도현을 찜찜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짚고 넘어가기엔 또 그럴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
이 촬영장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을 꼽으라면 도현은 주저 없이 그를 지목할 자신이 있었다.
“모두 열심히 해서 얻은 성과잖아요. 당연히 기쁘죠.”
“하하, 그렇지.”
“아, 감독님이 부르시네요. 저 먼저 가볼게요.”
“그래. 열심히 해.”
방긋 웃는 신휘민에게 화답한 도현이 정가현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도현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강이든에게 붙잡혔다. 무언가 실랑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저… 휘민아?”
뭐가 문제였을까.
드라마 방영 전에 이도현에게 쏠린 관심은, 그래. 이해했다. 그럴 수 있다. 그만큼 이도현이 가진 입지는 대단하니까. 어리다고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3화는 그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화였다. 적어도 그때만큼은 그에게 관심이 집중되어야 했다.
그런데.
“어, 이든 씨! 여기 있었네. 어제 기사 봤어요? 완전 난리던데!”
“나도 어제 보고 반할 뻔했잖아. 너무 멋있게 나온 거 아니야?”
그가 가져가야 할 관심을 이번에는 강이든에게 빼앗겼다.
구미호뎐 3화.
과팅에 나온 한이련이 윤채준과 만나게 된다. 비록 첫 만남에서 귀신으로 인해 소동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이후에 만남을 계속한다.
몇 번 더 만났다면 두 사람은 좋은 관계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밖을 나돌기 시작하는 한이련을 의심스레 보던 구미호가 성인체로 나타나 은밀한 관계인 척하며 데이트를 망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 3화 내용에서 사람들이 주목한 건 ‘한이련의 썸남’이 아니라 ‘그 썸남을 방해하러 성인 모습으로 나타난 구미호’였다.
그러니까 그가, 강이든의 등장을 돋보이는 들러리 역할을 했다는 소리였다.
들러리.
“그 들러리 짓을 하기 싫어서 이 길을 걸어온 건데….”
결국엔 돌고 돌아 이 상황이다.
허탈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뭔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 * *
“싫어! 저리 가! 제발 나 좀 내버려 둬!”
서지민이 악을 쓰며 소리 질렀다. 충혈된 두 눈도, 짓씹어 상처가 새겨진 입술도, 흥분으로 달아오른 뺨도 모두 붉었다.
“은인….”
“가라고! 제발!”
부릅뜬 눈을 한 서지민이 짓씹듯이 단어를 내뱉었다.
“애초에 너랑 엮이면 안 됐어.”
무어라 말을 하려던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두 눈이 깊이 침잠되는 것을, 슬픔과 격노에 휩싸인 서지민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허공을 맴돌던 흰 손이 힘을 잃고 추락한다.
‘미쳤네….’
그 장면을 찍고 있던 카메라 감독은 생각했다. 배우들의 연기가 날이 갈수록 물이 오르는 거 같다고.
‘상승세를 타서 그런가.’
드라마가 승승장구하면 부담감에 눌릴 법도 한데. 어째 구미호뎐 배우진들은 날개 돋친 듯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현재 촬영하는 장면은 5화.
<구미호뎐 : 인과 연>은 기본적으로 코미디 로맨스지만, 사실 중후반부는 코미디보단 시리어스에 가까웠다.
그렇게 분위기가 전환되는 게 바로 이 5화부터였다.
3화에서 여우야의 등장으로 윤채준과 관계를 망친 한이련은 그에게 화가 단단히 나게 된다. 그리고 4화에서 두 사람은 냉전 상태에 돌입하게 된다.
뻔뻔한 듯하지만, 은근히 낯짝이 얇은 여우야는 그 차가운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제 오랜 악우이자 벗, 이무기를 찾아간다.
- 왜. 여자 잘 만나서 얹혀살더니.
- 아니거든! 잘 만나긴 개뿔이!
그렇게 씩씩거리던 여우야는 이무기가 툭 던진 질문에 입을 다물고 만다.
- 너… 감정적이구나.
정확히는 이다음 질문이었다.
- 설마 또 인간에게 빠진 거야?
- …미쳤냐? 머리가 어떻게 됐어? 그 쓸모없는 뱀 대가리 달고 다니기 힘들면 내가 뱀술이나 담글까? 어?
- 좋지. 날도 추운데 여우 모피나 입어보자. 개새끼야.
그렇게 개싸움을 벌인 여우야는 이무기에게서도 쫓겨나 갈 데가 없어진다. 하늘을 올려다본 여우야의 낯이 설핏 심각하게 굳는다.
달이 만월에 가까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여우야는 그가 봉인되어 있던 절로 돌아간다.
그리고.
- 걘 대체 어딜 간 거야….
처음엔 불같이 화가 났지만, 그렇게 싸운 후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는 여우야에 한이련은 점점 걱정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 집이 이렇게 썰렁했나?
하루, 이틀, 삼 일.
- …잘 때 꼬리 안고 자면 좋았는데.
한이련은 점차 여우 요괴의 빈자리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녀가 정이 많아서기도 했지만, 정이 고파서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에게 버림받고, 할머니를 눈앞에서 잃고 홀로 살아온 그녀였기에 그 온기에 속절없이 젖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이련은 여우야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학교, 알바 장소. 집 근처 공원까지. 샅샅이 뒤지던 그녀는 이내 한 장소를 떠올린다.
- 저, 하루만 쉬어도 될까요?
아르바이트까지 쉬어가며 버스에 오른 그녀는, 여우야를 처음 만났던 산으로 향한다. 그녀가 숲을 헤매며 절을 찾았을 땐 밤이 깊은 후였다.
달이 떠오른 밤.
- 여우야…!
절 안에 있는 청년을 발견하고 화색한 한이련은 곧 무언가 잘못되었단 걸 깨닫는다.
- 너… 여긴 왜 왔어!
크르륵, 목소리에 짐승의 울음소리가 묻어났다. 한이련은 그대로 굳은 채로 남자를 보았다. 선뜩한 홍채와 뺨에 돋아난 붉은 선, 날카로운 송곳니. 짐승의 소리가 커져갔다.
- 당장 나가…!
이윽고 달이 온전해지자.
그의 몸이 들썩이며 크게 부풀어 올랐다.
거기에 있는 건 더는 한이련이 아는 여우야가 아니었다.
아홉 개의 꼬리가 달린 커다란 여우의 모습에 한이련은 힘이 풀리고 만다. 이성을 잃은 여우 요괴가 그녀에게 달려드는 순간.
거기까지가 4화의 내용이었다.
“은인.”
“싫어, 싫다고!”
“…한이련.”
발악하며 소리 지르던 서지민이 우뚝, 멈춘다. 그녀가 붉어진 눈으로 소년을 응시했다.
“방금, 뭐라고….”
“네 말이 맞아.”
깊은 침식을 걷어낸 얼굴로 담담히 말한다. 태연한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뭐?”
“네 말이 맞다고.”
무심히 흘러나온 말에 심장 한 켠이 덜컥 내려앉았다. 손끝에 차오르는 서늘함에 서지민이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그러니 바로잡아야겠지.”
“…바로잡아?”
“그래.”
멀다.
서지민은 눈앞의 소년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와 투닥대던 이인데도. 한순간에 너무나 멀어진 거 같았다.
“내가 너의 신기를 온전히 가져가겠다. 나는 힘을 얻고, 너는 평범한 인간이 되는 거야. 아무것도 몰랐던 때처럼.”
“그게… 가능해?”
그러나 ‘평범한 인간’이라는 단어가 주는 울림이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감을 느끼면서도 서지민은 그렇게 물었다.
“이상하다 했지. 신기가 그리 넘치는데 흘러나오는 건 한 줌조차 되지 않으니.”
도현이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하니 봉인된 상태였을 줄이야.”
봉인.
그 말에 서지민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만월의 밤.
이성을 잃은 사특한 요괴에게 위험을 느낀 영혼은 격을 가둬두었던 봉인을 스스로 풀어냈다. 그와 동시에 한이련은 잃었던 것과 잊었던 것을 되찾았다.
- 소름 끼쳐. 왜 저런 애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불운을 몰고 다니는 아이는 그렇게 제 어미에게서 버려졌다.
- 이련아… 넌 신기를 타고났다. 네 체질은 온갖 잡것부터 영물까지 끌어들일 게야. 아직은 네가 어리니 괜찮다. 그러니 지금 네 기억과 힘을 모두 봉인하마. 너를 위한 선택임을 알아주렴.
버려진 그녀를 할머니가 거둬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알았다.
그래서는 안 됐다.
- 낄낄낄! 주, 죽어…!
- 죽이자, 죽이자!
사고가 아니었다.
봉인 도중 힘을 모조리 소진해 버린 할머니가 스스로 보호할 능력을 잃자, 기다렸다는 듯이 원한을 지닌 악귀들이 달라붙었다. 달라붙고, 달라붙고 달라붙어서.
- 아아아아악! 할머니!
우지끈, 할머니가 계시던 방 위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지운 기억이다. 그렇게 억누른 힘이다. 그렇게 찾은 삶이다.
그런데 멍청하게도, 할머니를 죽음으로 내몰아가며 얻어낸 삶을 스스로 걷어찼다. 할머니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서지민은 도저히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신기가 흐르는 걸 막던 것이 사라졌으니, 흡수는 어렵지 않다. 백 일 정도만 지나면 너는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영단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주고 갈 터이니. 아, 그래. 원한다면 기억도 지워주마.”
그래서 그녀에겐 저 말을 거부할 힘이 없었다. 마치 지옥에 내려온 유일한 동아줄처럼 보였다.
서지민은 도현이 내미는 손을 잡았다. 어디선가 그러면 안 된다고 절규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그녀는 귀를 막은 채였다.
얽힌 손을 가만히 응시하던 도현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붉은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그래.
이러면 될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