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5화. 여우와 여우야 (9)
조용했다.
그 연기에 놀라지 않은 사람이 이곳에 있을까?
순간적이지만, 카메라 감독마저도 감독이 아닌 제3자로 만들어냈다. 아니, 한순간 두 사람은 그들만의 세계에 있었다.
“…미치겠네.”
서지민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거 말고는 달리 표현할 단어가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태풍의 핵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인가.’
한없이 잔잔하다. 또한 한없이 혼란스럽다.
자칫 발을 잘못 디디면 거대한 폭풍에 휩쓸려 버린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저를 둘러싼 공기의 흐름 속에서 안온함을 느꼈다.
그야.
‘내가 그 안에 있는 한은 이 태풍이 나를 휩쓸지 않을 테니까.’
그리하여 바깥 세계와 유리된 감각. 그 괴이하고도 이상한 감각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물론 잠깐. 아주 잠깐이었다.
한 움큼 쥔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를 스쳐 지나가는 것같이 희미하고 짧은 순간이었다. 지금도 연기에 너무 몰입해서 그저 꿈을 꾼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서지민이 제 손을 꽉 쥐었다. 움켜쥔 손에서부터 그녀만이 알 수 있는 잔떨림이 느껴졌다. 흥분에 내던져졌다가 가라앉은 폐부가 가쁘게 들썩인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 느끼고 있는 이 희열은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컷! 오케이!”
뒤늦은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울고불고 악을 쓰며 연기한 터라, 서지민에게는 수습 시간이 주어졌다. 스태프가 건네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서지민은 도현을 보았다.
그도 몰입했던 감정을 정리하는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적당히 정리가 끝난 듯 평소의 낯빛으로 돌아오자 서지민이 그를 불렀다.
“도현아.”
“네?”
돌아보는 얼굴이 앳되다.
아까 그 구미호라고 볼 수 없을 만큼이나.
서지민의 마음에 결심이 섰다.
그녀가 느꼈던 게 진짜건 아니건, 혹은 단 한 번 있는 우연의 산물이건 다 상관없었다.
“연기 스터디. 나도 해도 돼?”
“…이든 선배님이랑 하는 거요?”
“응. 그거. 나도 하고 싶어.”
의지견정한 두 눈이 빛났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한가?
‘내가 미치도록 재밌었다는 게 중요하지!’
스터디에 끼면 자연스레 연기를 맞춰볼 기회도 늘 거고, 그러면 다시 한번 그 감각을 느껴볼 기회도 생길 것 아닌가? 꼭 그게 아니더라도 오늘 연기를 해보고 나니 확실해졌다.
강이든, 이도현. 저 두 사람이 있는 스터디가 그녀에게 도움이 안 될 리가 없다.
“물론 내가 너랑 이든 씨에 비하면 조금 손색이 있긴 하지만, 열정 하나는 뒤처지지 않거든? 나랑 하면 재밌을 거야. 그리고 둘보단 셋이 낫잖아?”
반짝반짝 눈을 빛내오는 서지민에 도현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갑자기 왜?’
물론 싫지야 않다.
그녀의 말대로 둘보단 셋이 나으니까. 세 명이 있으면 의견도 세 개가 나오겠지. 그럼 더 많은 상황을 고려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그건 그거고.
“그건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에이. 그 연기 바보야, 뭐. 네가 좋다면 다 좋다고 하겠지. 그 인간 너한테만 편애가 넘쳐나던데.”
연예계 대선배에게 하기엔 격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평소 두 사람 관계를 생각해 보면 못 할 말이 아니기도 했다.
무엇보다.
‘부정할 수가 없어….’
그냥 어느 날 서지민을 데리고 와서 ‘그렇게 됐어요’라고 하면 정말로 강이든은 맹하게 고개를 끄덕일 거 같아서 문제였다.
아니다. 도현은 강이든의 허술함을 밀어두고 생각했다. 사실 스터디라고 명명되긴 했지만, 더 정확한 표현은 구미호뎐 준비반 정도 될 것이다.
즉, 이 드라마가 끝나면 흐지부지 끝날 만남일지도 모른다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이든 선배님이랑 대화를 해봐야겠어.’
사실상 드라마 중에는 스터디가 제 역할을 못 한다. 따로 시간 내어 만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지민이 말하는 건 그 후의 일일 것이다.
‘스터디를 계속할 건지부터 묻고, 그다음에는 지민 누나의 합류를 얘기해 봐야겠네.’
생각을 정리한 도현이 입을 뗄 때였다.
“그럼 넷은 어때요?”
별안간 들려온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돌아갔다. 거기엔 보기만 해도 마음이 청량해지게 웃고 있는 미청년이 있었다.
“휘민 씨?”
도현보다 먼저 반응한 건 서지민이었다. 그 놀란 목소리에 신휘민이 멋쩍음을 담아 말했다.
“물론 제가 세 분에 비해서 여러모로 많이 부족하지만….”
“그게 무슨 소리예요! 휘민 씨면 차고 넘치지.”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객관적으로 제가 부족한 건 알아요. 경력에서도 실력에서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이든, 이도현, 그리고 예비 스터디 멤버 서지민까지. 어디 가서 빠지는 이름은 아니었으니까.
인지도나 인기 측면에서는 신휘민이 앞지를지도 모르나… 적어도 연기 분야에서 그는 막 발을 뗀 초보자였다. 사실 저기에 끼어드는 건 무리일 정도로.
“그래도 후발 주자는 나름의 역할이 있는 법이니까요. 제가 입에 담기엔 민망한 말이지만, 뒤에 따라오려는 누군가가 있으면 더 자극받지 않겠어요?”
그게 아무리 정론이고 맞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직접 입에 담기엔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신휘민은 꿋꿋이 주장했다.
도현이 놀란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태도다. 드물게 생각을 내비치는 어린 얼굴에 신휘민은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신휘민이 끼어들던 순간부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휘민의 매니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신휘민답네.’
신휘민은 성격이 지랄 맞다. 그것도 조금 지랄 맞은 게 아니라 아주 개차반에 예민 덩어리인데 그 와중에 또 프라이드는 높아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인물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지랄 맞은 개차반을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그 성미가 가장 날카로이 이빨을 드러내는 게 타인이 아니라 본인이기 때문이었다.
어디 배우 연습생이 갑자기 아이돌로 전향하고 데뷔하는 게 쉬웠겠는가? 갑자기 노래를 익히고, 춤을 익히고, 무대에서 끼를 부리고.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온탑을 키워낸 기획사가 중소인 데다가 주먹구구식으로 운영되는 곳이 아니었다면, 배우라는 미끼에 낚여 온 신휘민이 아이돌이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갑작스레 다가온 현실에 적응할 새도 없이 데뷔하고 무대에 섰다. 신휘민이 아무리 독종이라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제대로 연습생 기간도 못 채우고 데뷔했다. 그렇게 실력 구멍이라고, 버스 탑승자라고 손가락질받고 미흡한 모습들을 박제당하면서, 신휘민은 버텼다.
- 괜찮아. 다음엔 그런 소리 못 하게 만들면 돼.
귀기 서린 목소리로 다짐하듯 말하면서.
그 말을 들었을 땐 그저 허세라고 생각했다. 자존심 센 놈이니까 약한 티를 내기 싫어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신휘민은 제가 뱉은 말을 증명해 냈다.
그걸 고스란히 봐온 사람으로서, 저 싸가지는 미울지언정 사람은 미워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가장 엄정한 잣대를 들이미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이니까.
“적어도 앞에 있는 분들 긴장할 정도로 노력할 자신은 있어요. 더 제 쓸모를 말하고 싶지만, 지금 제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네요.”
그리고 지금 또.
어린애한테 밀렸다고 애꿎은 그에게 신경질은 될 대로 부렸으면서 지금 그 어린애한테 고개 숙여 들어가고 있었다. 저 자존심에. 저 개차반이.
‘이래서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매니저가 한숨을 삼켰다. 싸가지를 마음대로 미워할 수도 없는 팔자라니. 스스로 생각해도 서글펐다.
“저는 휘민 씨면 찬성이죠! 물론… 도현이랑 이든 씨가 허락해 준다면요.”
서지민이 마냥 기껍다는 듯이 말했다. 저게 보이는 그대로 진심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반응에 신휘민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진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뭐야….’
홀로 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도현은 뭔가 갑자기 쑥쑥 진행된 상황에 떨떠름한 낯을 했다. 두 사람이 과하게 의욕에 찬 눈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부, 부담스러워.’
도현이 무의식중에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러자 생글거리는 낯의 신휘민이 한 발짝 다가왔다.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서지민도 마찬가지였다. 도현은 포위당한 초식 동물의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든 선배님은 왜 이때 먼저 가셔가지고.’
원망의 마음이 든 도현이었다.
* * *
- 아 ㅠㅠ 저 둘 뭐냐고 ㅜㅜ
-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 거 같긴 한데… 강이든 설렌다
- 텐션 미쳤음… ㄹㅇ
- 왜 엇갈려!! 왜 엇갈려 ㅠㅠㅠ!!!
- 꼭 이렇게 엇갈릴 때 썸타기 시작하냐고요 왜 ㅠㅠㅠㅠ
5화가 방영되고 시청자들은 여우야와 한이련의 썸에 설레면서도 마냥 기뻐할 수가 없었다.
백 일의 유예.
그것도 그 끝은 파국이 분명한 백 일의 유예.
파국이면 파국일 것이지. 완전히 신기를 각성한 한이련을 지키기 위해 여우야가 하루 24시간 붙어 다니기 시작하며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생기기 시작했다.
구미호는 본래 주술에 능통한 요괴. 같은 과 사람들에게 주술을 걸어 동기인 척 같이 어울려 다니기 시작하니, 외로운 두 존재가 온전히 일상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그건 서로에게 있어서 남다른 의미였다. 곁을 지켜주는 존재가 없는 이들이기에 더욱.
그러나 한이련은 제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여우야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했다.
백 일. 백 일 후에는 모두 잊고 지워질 것들이기에.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서.
한이련보다 더 알 수 없는 건 여우야였다.
- 여깽이는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건데ㅜㅠㅠㅠ
- 나만 선 긋는 거 같음…?
- 진짜 기억 지울 거 아니지? 아니라고 해조 ㅠㅠ
집에선 평소처럼 한심한 백수처럼 굴고, 밖에서는 동기들과 어울려 본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행동하면서. 묘하게 선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 하.
잠든 한이련의 머리맡에서 여우야가 허탈한 미소를 터트렸다.
- 하, 하하하. 하하하!
이내 그 미소는 광소가 되어갔다.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여우야는 미친 듯이 웃었다. 웃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다는 듯이.
- 그래서 으른 여깽이는 왜 그렇게 웃은 거임??
- 뭐야 뭔데 ㅠㅠ 나만 몰라 왜
- 뭔가 한 거 같았는데…
- 흡수 끝난 거 아님?
- ㄴㄴ 그건 아니야. 야악간의 스포 괜찮으면 (링크) 이거 ㄱㄱ
[5화 마지막 장면 여우야 웃은 이유]
(사진)
웃기 전에 한이련 몸에 뭔가 집어넣었잖아?
그게 요기임.
근데 구미호뎐 설정에 따르면, 인간은 요기를 지닐 수 없음. 받아들일 수도 없음. 구미호뎐에서
인간 = 흘러가는 것
요괴 = 묶인 것
이런 개념인데 요기는 업보의 굴레에 묶인 요괴들이 가진 근원임. 인간은 그게 진기고. 신기는 또 다른 개념 ㅇㅇ. 암튼 인간이 요기를 지니거나 받아들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함. 서로 성질이 다르기 때문.
근데 한이련은 그걸 받아들였다?
그것도 제 힘처럼 흡수했다?
이상은 스포가 될 거 같아 자제할게. 아마 다음 화나 다다음화 내로 여우야 과거사 나올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