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36)화 (337/582)

제336화. 여우와 여우야 (10)

한국에 오고 나서 생긴 변화를 꼽으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은혜 가족과의 관계였다.

본래도 한국에 올 때면 꼭 한 번은 보았다. 도현이 처음 한국 땅을 밟은 뒤로 몇 년. 그 몇 년간 만남의 횟수를 따지자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그 숫자가 아니었다. 그 긴 시간 연락을 이어온 사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게 친분을 유지하다가, 도현과 서혜나가 완전히 한국에 눌러앉게 되었다. 두 가족이 급속도로 친해지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서혜나와 윤경희, 두 사람의 친분으로 시작된 사이는 두 아빠의 친분까지 이어졌다. 이제 두 가족은 서로 편하게 볼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잘 오셨어요!”

“빈손으로 오셔도 된다니까.”

“별거 아니에요. 애들 먹으라고 케이크 좀 사 온 거예요. 도현이 케이크 좋아하지?”

윤경희의 질문에 도현이 그렇다 대답하고 있으려니, 그녀의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도현이는 볼 때마다 잘생겨지네.”

“은혜도 날이 갈수록 쑥쑥 크네요. 더 예뻐지면 연예인 하는 거 아닌가 몰라.”

으레 어린 애들을 볼 때 자주 꺼내고는 하는 말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예의가 섞인 말이 아니라 양쪽 다 진심이 가득 들어차 있을 뿐.

서로에게 금칠하는 부부를 보던 도현이 손을 뻗었다.

“은혜야, 이리 와.”

턱선까지 내려오는 단발은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은혜한테 잘 어울렸다. 사람보다는 꼬마 요정 같았다. 그리고 그 꼬마 요정이 위아래로 입은 맨투맨 세트가 마린느 주니어 라인인 걸 확인한 도현이 웃음을 삼켰다.

‘내가 얼마 전에 화보 찍었던 신상 라인이네.’

<전지적 참견쟁이들> 촬영 당시 찍었던 화보와 함께 출시된 옷이었다. 은혜네 부모님이 사준 건지, 이쪽에서 선물해 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은혜가 도현의 손을 잡자 두 가족은 거실로 향했다. 거실엔 이미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본래라면 손님 대접은 주방에 있는 테이블에서 했겠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도현이는 미리 봤지?”

“촬영하시는 모습은 봤죠. 하지만 편집된 건 저도 못 봤어요.”

오늘은 두 가족이 함께 <구미호뎐 : 인과 연>을 시청하기로 한 날이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1화를 같이 시청하기로 했다. 도현이 극구 반대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민망한 걸 어떡해.’

촬영장에서 연기하는 건 부끄럽지 않다. 그러나 가족 그리고 친분 있는 지인과 함께 제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는 건 조금 힘든 일이었다. 특히 그들이 자꾸만 흐뭇한 눈길로 쳐다본다면 더욱.

물론 배우가 그런 걸 부끄러워하면 안 되는 건 안다. 하나, 사람 마음대로 안 되는 게 감정 아닌가?

그래서 오늘.

도현이 등장하지 않는 6화를 같이 시청하게 된 것이다.

저녁 식사 자리가 무르익어 가고.

처음에는 신이 나서 이것저것 먹던 은혜가 피곤함에 눈을 느릿하게 끔뻑일 때 즈음.

“어, 광고 끝났다.”

“이제 시작이네요.”

드라마 오프닝이 나왔다.

“은혜야, 소파로 가자.”

도현이 은혜를 추슬러 소파에 올라갔다. 은혜는 금방이라도 고개를 떨굴 것 같으면서도 막상 자기는 또 싫은지, 비척비척 소파 위로 올라왔다.

“졸려어….”

“졸리면 자.”

“시러어….”

빈말이 아닌지 눈에 부릅 힘을 주었다. 그것도 잠시.

토닥, 토닥.

도현이 일정한 간격으로 토닥이자 부릅뜬 눈에 힘이 풀렸다. 초점이 사라지고 새근새근 잠드는 데까지는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 도현이 애 돌보는 데 선수네, 선수.”

윤경희가 조금 감탄하며 말했다.

집에서는 비글도 그런 비글이 없는데. 도현의 앞에만 가면 마법처럼 얌전해졌다.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아직도 신기했다.

‘하긴. 근데 나라도….’

애라고 외모에 무심한 줄 아는가? 애를 키워본 엄마로서 말하건대, 가장 외모에 진심인 게 어린아이였다.

못생겨서 차별한다기보다는 예쁜 것을 사심 없이, 그리고 순수하게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그중에서 은혜는 좀 지독한 편이었다.

‘너무 어릴 적에 도현이를 봐서 그런가.’

처음 공원에서 만났던 때나 지금이나 비현실적인 건 마찬가지지만, 그때의 도현이는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예뻤지, 도현이….’

여자아이라고 해도 의심 없이 믿을 정도였다. 지금은 좀 더 선이 깊어지고 체구도 커져서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음, 아니. 잘 보면 또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집에 군림하는 소악마가 도현의 앞에만 가면 힘을 못 썼다. 윤경희가 도현의 무릎에 뺨이 뭉개진 채로 쿨쿨 잠든 은혜를 보며 웃음을 참았다.

“아, 나온다!”

이장혁이 탄식했다. 그 말에 도현의 표정이 금방 진지해졌다. 화면을 보는 두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정말 진심이구나.’

짧은 단면만으로도 연기에 대한 마음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윤경희도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텔레비전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오프닝이 끝나고 드라마가 시작되고 있었다.

* * *

옥상 난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찬연했다. 그 찬연함이. 그 화려함이 그에게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 말하는 거 같았다.

“아닐 거라 믿고 싶었다. 아닐 거라고….”

허망한 말이 달빛을 타고 흘러갔다. 그리고 옥상 뒤편. 어둠이 진 곳에서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청한 여우 새끼.”

평소라면 달려들어 난장을 피웠을 이가 조용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흰 얼굴에 갑갑함이 차오른다. 이윽고 나온 건 짙은 허망함이었다.

“대체 왜…, 왜.”

- 먼저 끊어내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니….

“왜….”

- 자유로워지세요.

간신히 버티던 등이 무너져 내렸다. 달빛이 내려앉은 등이 한없이 초라했다. 두 가족은 드라마에 완전히 빠져들어 침묵한 채로 그것을 보았다. 이어, 담담한 독백이 흘러나왔다.

정말 인연이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랬다면 원치 않은 감정을 잘라내고 그것을 바람에 흘려보낼 텐데.

어두운 도시의 밤이 전환되었다.

시끌시끌 들려오는 저잣거리의 소리. 그리고 활력이 넘치는 시내의 풍경이 나왔다.

덜컹, 움직이는 가마 안에서 흰 손이 작은 창을 열어냈다. 살짝 열린 문으로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보였다.

“아기씨. 날이 찹니다. 창을 닫아야….”

“이 정도는 괜찮다.”

살짝 걷어낸 너울 너머로 얼핏 보이는 낯이 창백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여인의 아름다움을 감출 수는 없었다. 병색이 떠오른 얼굴로, 고요한 눈이 창 너머를 내다본다.

어째서 너는 저주에 묶여서 떠나지 못하는가.

탁. 동시에 열렸던 창이 닫혔다.

“와….”

서혜나가 감탄 어린 표정을 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데?”

도현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편에 등장한 여인을 맡은 배우는 다름 아닌 서지민. 한이련 역할을 맡은 배우였다.

그러나 한이련과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병은커녕, 건강하다 못해 시청자들이 ‘기존쎄’라고 부르는 한이련과 품위 있지만 병약한 양반댁 아기씨는 샌디에이고에서 서울까지 정도의 거리는 있어 보였다.

절에 도착한 여인을 맞아준 이는 주지 스님이었다. 여인의 안색이 밝아졌다. 양반댁에서 태어난 몸. 그것도 선천적으로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태어난 해아(海雅)에게는 절을 방문하는 날이 무엇보다 귀한 날이었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외출이었으니까.

주지 스님은 이 가엾은 여인을 위해 불경을 외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실상 그녀에게는 스승이자 친우나 다름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절을 둘러보며 오랜만의 산책을 즐기던 해아는 문득 한 족자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을 펼치자, 붓으로 그린 여우가 있었다. 기이하게도 꼬리가 여러 개나 달린.

- 나무아미타불. 안쓰러운 존재이죠. 산 것의 간과 정기를 취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저주받은 운명을 지녔으니….

옆에 다가온 스님이 한 말에 해아는 조금은 신기함을, 조금은 흥미를 담아 그림을 보았다.

- 꼬리가 여러 개인 여우 요괴를 마주치거든, 어떤 식으로든 엮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홀려 죽음으로 이끄니까요.

옆에 있던 몸종은 두렵다는 듯 몸을 떨었지만, 해아는 살짝 웃고 말았다. 그녀에게 있어 요괴에 대한 이야긴 허구의 상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고는 갑작스레 찾아온다던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세차게 내리기 시작한 비에 가마꾼 한 명이 발을 헛디뎠다. 이어진 일에 몸종이 비명을 질렀다.

해아가 탄 가마가 비탈길을 굴러떨어졌다. 손쓸 도리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쏴아아. 눈앞이 뿌옇게 물들고 손끝에 닿는 축축함이 피인지 비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혈색이 빠져나간 입술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 푸른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가마 밖으로 나온 해아는 수풀이 우거진 숲속에 저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붉은 피가 번졌다.

죽음.

다가오는 건 분명 죽음이었다.

그리고 해아는 보았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보이는 짐승의 하얀 두 귀와 살랑이는 꼬리. 그리고….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붉은 눈을.

얼핏 온기가 닿은 것도 같았다.

- 아, 아기씨! 아기씨가 눈을 떴습니다!

다시 깨어난 해아가 본 것은 붉은 눈이 아니라 익숙한 천장과 안도감에 우는 몸종이었다.

- 천운이지요. 자잘한 상처를 입긴 하였으나, 생명의 위협이 될 만한 부상은 없었습니다.

해아는 의원의 말을 멍하니 들었다. 아니다.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죽음의 앞에 서 있었다.

- 그런데 살아 있구나….

알 수 없는 낯으로 작게 중얼거린 해아가 눈을 감았다.

덥썩! 손톱이 길게 자라난 손이 나무를 내달리던 산 다람쥐를 잡아챘다. 포식자의 손아귀에 들어간 산 다람쥐가 운명을 직감했는지 벌벌 떨었다.

“쯧, 안 잡아먹어.”

먹을 것도 없는 게 무슨. 코웃음을 친 사내가 다람쥐를 쿡쿡 찌르며 놀려댔다. 그러다 질렸는지 손을 풀어 보내준다.

나무 위에 방만하게 누워 있던 이의 귀가 움직인 건 잠시 후였다. 붉은 눈이 나무 아래로 향했다. 너울을 쓴 여인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포대로 싼 무언가를 바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파삭.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한 사내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포대를 보다가 그것을 열어보았다.

붉은 눈이 황당하게 뜨였다.

“…미친 계집인가?”

당혹감을 채 추스르지 못한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포대에 소중히도 싸인 것의 정체는, 돼지의 생간이었다.

한번은 기행이라 치고 넘어갈 수 있다. 두 번까지도 뭐… 그럴 수 있다 치자.

그런데 석 달째.

석 달째 보름마다 어김없이 나타난 여인이 바위에 포대로 싼 간을 내려놓았다. 남들이 보면 미친년이라 비난받을 일을 태연히 저지르며 또 미련 없이 뒤돌아가는 것이다. 사내는 저 등이 이젠 익숙하다 못해 기가 차고 열불이 났다.

그래서였을 거다.

“!”

여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놀란 여인과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흰 저고리를 아무렇게나 걸쳐 입고 사자 갈기 같은 백발을 풀어 헤친 기이한 사내. 그리고 귀한 집 여식답게 고운 빛깔의 의복을 차려입은 여인.

섞이는 게 더 이상해 보이는 두 사람의 만남이었다. 그러나 다음 일은 천하의 여우 요괴조차 예상 밖의 일이었다.

“제 선물은 잘 받으셨나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도 모자랄 판에 뻔뻔하게 물어오는 것이다.

기가 찬 사내가 답했다.

“안 먹었는데.”

“…왜요? 싱싱한 것으로 고른 것입니다.”

하,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낸 사내가 한 발짝, 여인에게로 다가섰다.

처음엔…, 그래.

이 말 같잖은 짓을 어디까지 할까 싶었다. 그다음에는 조금 궁금했던 거 같다.

“난 짐승의 간은 먹지 않아.”

이어진 무례에 여인이 두 눈을 크게 홉떴다. 사내가 멋대로 여인의 너울을 걷어내더니 단단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틀어쥔 것이다.

“인간의 것을 먹지. 너 같은.”

그의 정체를 완전히 직시하면 이 미친 계집은 어떻게 반응할까 하는 궁금함.

하나.

‘뻔하군.’

붉은 눈이 흥미를 잃고 무심해졌다. 겁을 집어먹은 인간의 낯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손을 풀자 여인이 뒤로 물러났다. 사내는 뒤돌아가며 생각했다.

이제는 귀찮은 것이 사라지리라고.

그래.

그래야 할 텐데….

“…계집, 너 간을 어디다 흘리고 다니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져야 다시 이곳에 얼굴을 들이밀지? 사내가 기이한 것을 보듯이 여인을 보았다.

평소와 같은 작은 포대가 아닌 커다란 보자기를 펼친 해아가 양갓집 귀한 여식답게 반듯하게 말했다.

“인간의 간은 구할 수 없으니 다양한 짐승의 것을 준비했습니다. 인간만 못하더라도 이 중에 입맛에 맞는 게 하나쯤은 있겠지요.”

말투만 반듯했다는 소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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