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7화. 여우와 여우야 (11)
기울었던 달이 다시 차올랐다.
굵은 나뭇가지에 몸을 기대어 앉은 이가 하늘을 응시했다. 밤을 배경으로 길게 내려온 은발이 희게 빛났다.
수려한 붉은 눈이 달을 담았다. 그리 쳐다보면 밤이 물러나 낮이 찾아오기라도 할 것처럼. 밀랍처럼 희었던 낯에 표정이 생겨났다.
“결국엔 손을 탄 짐승이라는 건가.”
주인을 잃고 오랜 시간 헤맨 여우는 그게 자유인 줄 알았다. 그 믿음에 침입자가 비집고 들어왔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제 목줄을 기이하리만치 순순히 넘겨주면서 여우는 깨달았다.
그건 자유가 아니라 방황이었음을.
‘좋을 때다.’
윤경희가 피식 웃으며 드라마를 보았다. 화면 속 둘은 뭐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사소한 일로 투닥거린다. 그러다가도 시선이 얽히면 숨을 멈추고, 또 어느 날은 가만히 서로의 어깨가 스치는 거리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연인이네.’
둘은 아직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그건 분명 서투른 연인의 모습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주어졌더라면.
그러면 평범한 연인처럼 사랑을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 * *
“주, 주인님. 그게….”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물었다.”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는 몸종이 무릎 꿇려지고 손에 쥔 것을 빼앗기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생간의 피가 남자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렸다. 툭, 바닥에 떨어진 피가 붉은 얼룩을 만들어냈다.
지워지지 않을 붉은 얼룩을.
* * *
“…왜 안 오는 거야?”
필사적인 다람쥐의 노력에 일말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은 사내가 투덜거렸다.
세 번.
벌써 세 번의 달이 차고 기울었다.
처음에는 오지 말라고 해도 속 터지게 얼굴을 들이밀던 이가 갑자기 발걸음을 끊은 지 그만큼 흘렀다는 뜻이었다.
괜히 다람쥐한테 송곳니를 드러내며 화풀이를 하던 사내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간신히 풀려난 다람쥐가 허둥지둥 도망쳤다.
“가엾은 여우를 주웠으면 책임을 져야지.”
가엾다기엔 퍽 사나운 미소가 얼굴에 떠오른 채였다.
* * *
요괴와 인간.
결코 좁혀지지 못할 간극이었다.
그래도 계속 걸었을 것이다. 어깨를 스칠 만큼 가까운 곳까지. 그리하여 불가능을 넘어 서로의 옆에 섰을지도 몰랐다.
“더는 찾아오지 마세요.”
어느 날 밤에 소년 같았던 얼굴이 차게 굳었다. 일순간에 사내는 단단한 가면을 썼다. 그러지 않으면 속내가 흘러넘칠 거 같았다.
“그거, 진심인가?”
기회를 주듯 말했다.
누구에게 주는 기회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은인께 입은 은혜는 갚을 길이 없으나, 저도 이제 혼약을 치러야 할 몸입니다. 함부로 밖에 나다닐 수 없고 부군 되실 자가 아닌 이를 만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 어울리지도 않는 딱딱한 말보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흐릿하게 나온 한마디가 심장을 쥐어짜내는 거 같았다.
왜?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했다. 뱉고 싶은 말은 턱없이 많았지만, 정작 나온 건 형편없는 말이었다.
“…그래. 이제야 제정신이 돌아왔나 보지.”
조롱하듯 내뱉은 말은 진심이었다.
부정해 주길 바란 진심이었다.
끝내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남자는 짧게 웃었다.
다 부질없는 가정이었다.
* * *
어쩌면 꿈을 꾼 것인지도 몰랐다.
짧지만, 전부처럼 느껴지는 꿈.
파리하게 질린 안색을 본 남자가 쯧, 혀를 찼다.
“이달 말에 혼인식을 치를 것이다. 너도 이제 한 집안의 안주인이 될 몸이니 항상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거라.”
“어찌….”
머뭇거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어찌 그리 서두르십니까. 혼인은 집안의 경조사가 아닙니까. 조금 더 신중히 하여도….”
“아직 그 요괴를 마음에 담아두고 있더냐?”
“아버지!”
“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 하여 사냥대를 꾸리지 않고 지나가 주었다. 그 사실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말문이 막힌 해아가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기어이 사이한 요괴에 홀렸단 소리가 흘러나가야, 그렇게 온 집안에 먹칠을 해야 비로소 만족할 것이냐? 네 철없는 행동을 내가 어디까지 봐주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해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눈을 지그시 내리감았다.
“…소녀가 경솔했습니다.”
한참 뒤에 흘러나온 음성이 담담했다. 해아는 아버지를 향해 느릿하게 절을 하며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
영원할 수 없기에 꿈이었다. 이제는 눈을 떠야 할 때였다.
남자는 해아가 절하고 물러난 자리를 보다가 피곤하다는 듯이 눈가를 문질렀다. 흔들리는 호롱불이 그 얼굴 위로 짙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었다.
홀로 남은 아비가 답답한 속내를 풀어내듯 읊조렸다.
“출가하지 아니한 자녀는 그 죄를 물어도 출가한 자녀는 부재차한(不在此限)인 법.”
남자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시운이 심상치 않구나.”
세 사람의 사정이 얽힌 밤.
붉은 곤룡포를 입은 이가 서한을 받아들고 짧게 웃었다.
“교만과 방종에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 아니겠느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전하!”
“죄인과 죄인의 자식, 연좌된 자들까지 빠짐없이 잡아 오거라.”
“예, 전하!”
그들의 위로 거대한 암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 * *
어느 날부터 민가에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 왕이 정신이 나가, 대신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고문해 죽이고 있다는 소문이.
그리고.
바닥에 얼룩진 핏자국처럼 작은 소문에서 시작한 것은 결국 짙은 피바람이 되어 들이닥쳤다.
* * *
연산 10년, 1504 갑자, 명 홍치(弘治) 17년.
9월 26일 (癸丑).
“죄인을 모두 압송하라! 반항하는 이는 죽여도 좋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군졸들이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비명과 피가 난무했다.
퍽! 그녀의 등을 차는 발길질에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거친 밧줄에 몸이 묶이면서도 해아는 넋을 놓고 있었다.
“감히, 감히 누구의 명을 받고 이러는 것인가!”
“오해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대감, 뭐라고 말씀 좀 해보십시오!”
소란 속에서 홀로 동떨어진 기분이었다.
“해아, 해아는 아닙니다. 해아는 혼인을 약속한 아입니다. 이달 말이면 혼인식을 치를 아이니, 해아는 놔주십시오.”
어머니가 칼을 든 이의 바짓가랑이를 부여잡고 애원했다. 그 발에 걷어차여도 다시 달라붙어 빌었다. 늘 엄격한 어머니의 간절한 모습에 해아가 충혈된 눈으로 입술을 짓씹을 때였다.
“…아.”
“반항하는 자는 베어서 본보기로 삼아라!”
“어, 어머니…?”
“끌고 가!”
몸을 묶은 밧줄이 피부에 쓸려서 따끔거렸다. 그러나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박히는 광경만이 시리도록 선명했다.
현실일 리가.
현실일 리가 없는데 너무나도 선명했다.
툭.
손에 든 것을 떨어트린 이가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지른다면 금방이라도 들킬 거 같았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있던 이는 집 안의 모든 이가 비참한 몰골로 끌려가고, 텅 비고 나서야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다급한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산이었다.
* * *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에 사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시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기분이 더럽네.”
아까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진득한 위화감….
“요, 요괴님!”
“너는 계집종이 아니냐. 그만 오라 했는데 왜 또…. 아니, 꼴은 왜 그 모양이냐? 무슨 번개 맞은 개도 아니고….”
“그게 아닙니다. 아기씨가, 아기씨가 잡혀가셨습니다!”
콰르릉!
세상을 뒤엎으리만치 커다란 우레가 내리쳤다. 천지가 진동하는 울림에 어깨를 움츠렸던 몸종은 눈을 부릅떴다. 나뭇가지 위에 있던 사내가 코앞에 와 있었다.
“…어디 있어?”
“예, 예?”
“해아, 어딨냐고.”
붉은 눈이 불길하게 일렁였다.
연산 10년, 1504 갑자, 명 홍치(弘治) 17년.
9월 27일 (甲寅).
우레 소리가 크게 진동하였다.1)
* * *
화면을 스쳐 지나가는 장면에 서혜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끝이 좋지만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알았는데도 그들에게 닥친 상황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관청으로 끌려간 해아는 날이 갈수록 병색이 짙어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다른 곳으로 끌려간 아버지는 생사조차 알 수 없다. 식솔들은 매일같이 울음을 터트리고 있다.
신경이 긁히는 거 같았다. 모든 것이 버거웠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해아가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쯧, 영 재밌는 사냥감이 없구나.”
청계산에 사냥 갔다가 환궁한 임금이 말에서 내려 저를 맞이한 대신들을 보았다. 제게 죄인들을 어찌할 것인지 묻는 이에, 그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백관이 흩어지기 전에 차례로 서도록 하고 강형(姜詗)을 능지처참하거라.”
가볍게 나오기에는 한없이 잔인한 말이었다. 깊게 고개 숙인 이들 사이를 걸어가는 임금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화면이 전환되며 처형이 집행되는 광경이 나왔다. 해아의 아버지의 목이 굴러떨어졌다.
끌려가는 여인들의 모습이 나오며 그 아래에, 흰 글씨로 자막이 떠올랐다.
연산군이 윤씨 추봉존승을 논의할 때 반대하거나 거슬리는 말을 한 정승들과 심사 판원들 고찰하여 아뢰게 하였다.
청계산에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온 연산군은 환궁하여 심문한 백관들을 늘어서게 하고, 대간을 능지처참하여 효수하고 그 자식들은 모두 참형에 처하고, 처첩, 딸 및 며느리를 모두 바다 밖의 관비에 소속시키라 하여 백관과 유생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2)
죄인처럼 끌려가는 여인의 행렬에는 해아도 있었다. 완전히 드라마에 몰두한 서혜나는 숨을 죽인 채 화면을 보았다.
보통 역사 드라마는 주인공이 그 역사의 한 축이 되어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해아는 그저 역사서에 한 줄조차 남기지 못한 무력한 이였다. 역사의 흐름에, 거대한 운명에 그대로 휘둘리는 힘없는 사람.
그래서 더욱 참담하게 느껴졌다.
수레가 덜컹거리며 길을 지났다.
수레에 올라탄 여인들은 모두 해아와 같은 처지였다. 그들은 바다 밖, 관청에 소속된 노비가 되기 위해 옮겨지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송장과도 같은 낯빛이다. 제 아비가, 자식이, 지아비가 죽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잡혀 왔으니 미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쿨럭…!”
꺼끌한 목에서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소매에 묻어나는 피에도 해아의 표정은 무심했다.
어차피 살아도 죽어도 지옥이다.
이 목숨에 미련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그때였다.
“네놈은 누구냐!”
수레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그때까지도 그저 넋을 놓고 있던 해아는 이어진 말에 눈을 번쩍 떴다.
“요, 요괴다!”
…설마.
피딱지가 굳은 손이 다급히 창살을 움켜잡았다.
“…혼인하러 가는 건 아닌 거 같네. 그렇지?”
두 시선이 얽혔다. 창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위로 해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깨어야 할 꿈이다.
그런데 그 꿈이 영원처럼 느껴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다음 편에서 계속)
1) 연산 55권, 10년(1504 갑자 / 명 홍치(弘治) 17년) 9월1일-9월30일 [조선왕조실록]
2) 한희숙. (2008). 연산군대 廢妃尹氏 追封尊崇 과정과 甲子士禍. 한국인물사연구, (10), 175-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