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39)화 (340/582)

제339화. 여우와 여우야 (13)

“어! 안녕!”

“와, 너도 붙었구나!”

안면이 있는 아이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기뻐했다. 실기 시험 날 안면을 익히거나 같은 학원 출신인 경우였다.

“자기 자리 모르는 학생들은 이리로 오세요! 학부모분들은 뒤쪽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주시면 됩니다!”

시끌벅적한 강당 안에서 선생님이 소리 높여 외쳤다. 고작 실기 시험장에서 한 번 봤을 뿐인 친구와 손깍지를 끼고 죽마고우와 재회한 듯이 기뻐하던 한설아도 그 줄에 가서 섰다.

입학생 전원에다가 학부모까지 모인 강당이었다. 제 앞으로 한참 늘어진 줄에 한설아는 오 분 만에 단짝이 되어버린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

“넌 어디 초등학교 출신이야?”

“난 새빛! 혹시 알아?”

“어, 내 집 주변이야! 난 그 옆에 있는 하나초!”

“헐, 진짜? 대박. 우리 운명인 듯.”

“우리 집 방향도 같은 거 아니야? 그럼 같이 하교하면 되겠다!”

“완전 좋아!”

설아의 단짝 친구도 그녀와 이어진 운명을 느낀 거 같았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시선을 교환했다. 너 앞으로 내 거야. 알지? 당연하지.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근데 반 갈라지면 어떡하지?”

“등하교 같이 하면 되지! 쉬는 시간에 같이 놀고.”

과연 현명한 대답에 한설아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그녀의 단짝 친구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걔, 걔들 혹시 안 왔니?”

“걔들?”

“그 있잖아! 이도현이랑 정희운!”

“아.”

그 말에 한설아도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사람이 미어터지는 강당에서 누군갈 찾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모르겠어….”

“으, 그치. 나도.”

아쉽다는 듯 수긍한 한설아의 단짝 친구가 홍조를 띤 채 말했다.

“난 아직도 신기해. 두 사람이랑 내가 같은 학교에 다닌다니. 연예인이잖아! 너는 안 그래?”

“난 사실 한 명 봤어.”

“뭐? 누구?”

“정희운!”

돌아온 대답에 아쉬운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도현이 아닌 게 실망인 모양이었다.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 <구미호뎐 : 인과 연>을 시청하지 않은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말이다. 가장 핫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 반응도 얌전한 축이었다.

아쉬움을 접은 소녀가 물었다.

“걔 어땠어? 알려 줘!”

“연예인은 연예인이더라. 딱 보면 뭔가 눈에 띄어.”

“진짜? 다른 애들이랑 뭔가 달라?”

“응. 일단 얼굴이 달라.”

“아….”

우문현답이었다.

“그리고….”

한설아는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자기가 울고 있는지도 모르고 뚝뚝 눈물을 흘리던 남자애. 보는 사람까지 울컥하게 할 정도로 울길래 시험을 망쳐도 대차게 망쳤구나 싶었던 한설아는 그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인터넷에 그의 합격 기사가 올라오자 안심했을 정도였다.

‘내가 걱정할 주제는 아닌데.’

한설아는 배우 꿈나무였고 정희운은 배우였다. 적어도 그가 걱정받을 위치는 아니란 뜻이었다.

“그리고? 뭔데?”

“아니야. 그냥 좀 특이해.”

“그래? 연예인이라 그런가.”

한창 연예인들에게 환상을 갖고 있을 나이였다. 연예인을 제3의 종족처럼 취급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실제로 한설아의 단짝 친구는 그녀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와도 놀랄 준비가 되어 있는 거 같았다. 초콜릿을 먹더라. 헐, 초콜릿을 먹어? 말을 하던데? 와, 대박. 이렇게.

하지만 한설아는 친구를 우습게 보지 않았다. 자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실기 시험 날 말을 좀 섞어봤으니 이렇게 태연히 말하고 있는 거였다.

그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시끄러운 건 아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한설아는 자연스럽게 소란의 근원지를 눈으로 찾았다.

“어….”

걔다.

사람이 미어터지는 강당이라 찾을 수 없다고? 그녀는 그 생각이 얼마나 무지했는지 깨달았다.

연예인의 존재감이라는 건 사람 자체의 존재감만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 사람을 보고 동요하는 주변인들, 그 공기, 그 분위기. 그 모든 것이었다. 찾아내긴 무슨, 인기인이란 보기 싫어도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다.

연예인이라도 입학의 설렘은 마찬가지인지, 두 뺨에 홍조가 살짝 올라와 있었다. 형광등 아래서 반짝이는 갈색 눈이 바삐 움직여댔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 탓인지 아니면 옅은 색소 탓인지 모르겠지만, 꼭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한설아의 두 눈이 깜빡였다.

우는 얼굴이 아니네.

당연한 일이었다. 입학식 날 우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그런데도 한설아는 그게 낯설었다.

생경한 기분으로 소년을 볼 때였다.

“…아.”

시선이 마주쳤다.

눈이 얽히고, 그녀를 알아본 소년의 눈이 커졌다. 이윽고 일전의 일이 떠올랐는지 두 눈이 떨리더니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어, 어어?”

한설아가 바보처럼 가슴께를 더듬었다. 방금 뭔가 쿵 하고 떨어졌는데. …뭐였지? 어리둥절해하던 한설아는 어깨를 철썩 내리치는 손에 정신을 차렸다.

“와, 와. 네 말이 맞았어. 얼굴이 다르네. 대박, 개안하는 줄.”

“하, 하하…. 그치?”

“응. 같은 반 되면 좋겠다. 그럼 맨날 저 얼굴 볼 거 아니야.”

어깨를 연신 내리치며 좋아하는 친구에 한설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쳤네. 생각해 보니까 정희운이 저 정도면 이도현은 대체 어느 정도란 거야?”

“그러게.”

대답하면서도 한설아는 왠지 이도현이 어떻든 별로 상관없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실물을 볼 생각에 들떠 있었던 주제에 말이다.

* * *

시끄러운 강당이 조용해지고 모두 착석할 때까지도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던 이는 등장하지 않았다.

- 지금부터 가연 예술 중학교 신입생 환영 공연이 있겠습니다.

“뭐야, 이도현은?”

“안 오는 거야?”

불만 어린 소리가 튀어나왔다. 어린아이들이라서 그렇다기엔 학부모 측도 조금 더 점잖은 태도였을 뿐 비슷한 반응이었다.

“애가 안 오나 봐요.”

“그러게요. 촬영 때문인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참 드라마 촬영 중이잖아요.”

저마다 떠들어대던 이들은 2, 3학년의 공연이 시작되자 점차 조용해졌다. 공연을 맡은 아이들은 음악과였다. 사람들의 눈이 곧 놀라움으로 변했다.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 거기에 멈추지 않고 하프 색소폰, 트럼펫, 드럼, 가야금, 해금까지. 합주하면 떠오르는 익숙한 악기부터 낯선 악기들까지 총집합해서 화음을 이뤄내고 있었다. 동서양의 결합이었다.

“와… 예중은 예중이구나.”

누군가 말했다.

가연 예중. 지금 이도현에게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쏠려 있긴 하지만, 거기 있는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온 이들이었다. 명문이라는 예술 중학교에 속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어째서 가연 예술 중학교가 명문 학교인지 깨닫는 중이었다.

짝짝짝짝짝!

공연이 끝나고 박수가 쏟아졌다. 막 입학한 후배들은 선배들을 보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멋있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그런 기대와 설렘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단상에 있던 의자들이 모두 치워지고 국민의례까지 끝이 나자, 단상 위로 한 여성이 올라갔다.

얼굴에 난 주름이 나이가 적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깔끔하게 떨어지는 흰색의 정장과 얇은 테의 안경이 그 나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멋지다라는 감상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이 단상에 오른 지 십 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이렇게 새로운 친구들을 맞이하는 날이면 기쁘고 설레는군요. 우선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하하는 바입니다.”

짧은 인사말 다음에 박수가 나왔다. 적당히 박수가 잦아든 후 교장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신입생 환영사를 하기 전에 먼저, 신입생 대표 선서와 입학 허가 선언이 있겠습니다. 신입생 대표가 선서를 외치면 학생 여러분과 학부모께서는 함께하는 마음으로 선서를 외쳐주시길 바랍니다. 신입생 대표는 단상 위로 올라와 주세요.”

신입생 대표?

아이들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헉!”

어디선가 헛바람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와, 쟤 쪽팔리겠다. 한 아이가 작게 중얼거렸으나 그 아이의 예상과 다르게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뒤늦게 이상함을 눈치챈 아이가 단상을 보았다. 그리고 방금 전 일을 깨끗이 잊어버렸다.

“이도현이다….”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그들의 심정을 대변했다.

잘 다린 교복은 그들이 걸친 것과 같은 옷일 텐데 왠지 다르게 느껴졌다. 평범한 단상조차 소년이 존재하는 순간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탈바꿈했다. 저번 주 금요일에만 해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얼굴이라서 같은 학생이라기보단 다른 존재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단정한 걸음걸이로 걸어 나온 이도현은 교탁 앞에 반듯이 섰다. 아이는 하필이면 정중앙에 앉은 걸 안타까워했다. 대각선이면 옆얼굴이라도 보였을 텐데!

이도현은 그대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 인사를 받은 교장 선생님도 마주 허리를 굽혔다 폈다. 별거 아닌 행동에 강당 안 모든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선서.”

학생과 내빈 측은 조용했다. 정신이 팔려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입을 열려고 해도 조용한 강당에서 먼저 소리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미성이 울렸다.

“선서.”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다.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하나둘씩 선서를 외쳤다. 엉망진창이고 하나도 맞지 않는 선서였다. 급할 것 없이 그런 그들을 기다린 소년은 다시 주변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저희 가연 예술 중학교 신입생 254명은 교칙을 준수하고 학업에 성실히 임하여, 창의적이고 슬기로운 가연 예술인으로 거듭날 것을 선서합니다.”

또렷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사람들은 선서문이 짧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좀 더 길게 하면 안 되나?

“신입생 대표. 이도현.”

그들이 아쉬움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짧은 선서문은 끝이 났다. 이어받은 건 교장 선생님이었다.

“신입생 이도현 학생 외 253명의 입학을 허가합니다.”

짝짝짝짝짝!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처음 단상에 올라왔을 때처럼 인사한 이도현이 선서문을 반납하고 단상 오른쪽으로 향했다.

…내려오네?

단상 계단을 밟으며 아래로 내려가는 이도현에 사람들이 술렁이며 동요했다. 다음으로 교장 선생님 환영사가 이어져야 하는데 신경이 온통 소년에게만 쏠려 있었다.

이도현은 강당 안의 모두가 얼굴이 뚫어져라 저를 쳐다보고 있는데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아이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아이들이 고개를 쭉 빼 들었다.

한설아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제 옆자리를 보았다. 비어 있길래 결석인가 했는데 그럼 이 자리가….

“안녕.”

반경 일 미터 이내의 모든 이들에게서 부러움의 시선을 받은 한설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응, 안녕….”

은근하게 두 줄마다 띄워진 자리가 반별로 나뉜 거란 건 알고 있었다. 근데….

‘이거 설마 번호순인가.’

그러면 반에서도 옆자리 아니야…?

아주 불길하고도 정답에 가까운 예감이었다.

* * *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옆자리네. 잘 부탁해.”

무슨 사람이 이렇게 생겼지. 한설아는 잠깐 상황도 잊고 감탄했다. 강당에서는 흘깃 본 게 다였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마주하니 더 비현실적이었다. 일단 같은 종족이 아닌 건 확실했다.

“아, 소개를 안 했지. 이도현이야.”

여기서 가장 자기소개가 의미 없는 사람이 너일걸. 한설아는 그 말을 속으로 삼키며 대답했다.

“난 한설아야. 나도 잘 부탁해.”

말을 끝낸 한설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얘들아. 난 사냥감이 아니야….’

어딘가 높은 벽이 있는 거 같은 월드 스타 대신에 그 옆자리에 앉은 소녀를 쳐다보는 눈빛들이 아주, 아주 열렬했다. 호시탐탐 물 기회만 노리는 야생 매들 사이에서, 한설아는 제 순탄치 못할 슬픈 미래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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