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1화. 여우와 여우야 (15)
“여우야, 너 설마… 아니지?”
얼굴을 일그러트린 서지민이 분노에 찬, 그러나 절박한 기색으로 말했다.
“아니라고 해. 제발.”
도현은 자문했다.
언제까지 반복되어야 하는가?
또다시 나로 인해 그녀가 위험에 처했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그를 아끼던 존재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끝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죽음과 저주로부터 태어난 요괴였으니까.
도현은 몸을 파고드는 주술을 피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길고 길었던 인과 연을 끊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여우야! 여우야!”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고요하던 얼굴이 동요한 건 그 순간이었다.
“…은인님!”
끝을 받아들이던 소년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기대인 건지 불안인 건지 모를 감정에 얼룩진 검은 눈동자가 화면에 들어찼다.
“컷! 오케이!”
시원스러운 외침 다음으로 지시가 떨어졌다.
“그럼 후보 교체합시다!”
여기서부터는 둔갑술이 풀린 성인 여우야의 차례였다. 도현이 자리를 비키고 그 자리를 강이든이 채웠다. 구미호뎐 촬영은 첫 화부터 거의 이런 식이었다.
대기 자리로 돌아오는 도현에 또 한바탕 하겠구나 싶어 마음의 준비를 하던 신휘민은 조용한 소년에 의아한 눈을 했다. 왜 얌전하지?
“…형.”
그래. 조용하다 했다.
“왜?”
이젠 해탈의 경지에 오른 신휘민이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도현이 그를 쳐다보았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뭘?”
“아까 그 장면이요.”
이건 또 무슨 질문인가.
‘뭔 꼬투리를 잡으려고.’
신휘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거운 분위기를 잘 잡았던데. 죽음을 결심한 순간을 강렬하지 않고 고요하게 표현해서 더 극적으로 보였어. 오래 살아온 요괴다운 면모로 보이기도 했고. 그리고 한이련을 쳐다볼 때….”
“아뇨, 그거 말고요.”
신휘민은 말이 끊기는 걸 싫어했다. 아무리 상대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얻고 있는 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난 점쟁이가 아닌데.”
웃고 있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평소라면 그가 빈정 상한 것을 곧장 눈치챘을 도현은 다른 곳에 신경이 팔려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한창 촬영 중인 세트장을 응시했다. 서지민과 강이든이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신휘민의 인내심이 아슬아슬하게 출렁거리다가 한계점을 넘어서려고 할 때였다.
“죽음 이후에 이어진 인연이 의미가 있을까요?”
여상히 흘러나온 질문이었다. 뜬금없는 말에 신휘민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겨우 그런 쓸데없는 소리나 하자고….
그가 스터디 일원이 되기는 했지만, 그게 허물없이 친한 사이가 되자는 뜻은 아니었다. 네 단물을 빼먹겠다는 뜻이었지.
자주 교류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는 여전히 도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긴 하지만 가장 큰 건 역시 그거였다.
동족 혐오.
신휘민이 도현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낯이었다. 겨우 중학생 들어간 어린애 주제에. 본인이 겉과 속이 다른 인물이라 그런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에게는 반사적으로 불쾌감이 들었다.
연예계에서 안 그런 사람이 있냐 싶지마는 눈앞의 인물은 조금 유난했다.
“갑자기 철학 공부를 하자는 건 아닐 테고….”
살짝 긁어 봤는데도 동요 없는 모습에 신휘민은 속으로 혀를 차고는 말했다.
“없지.”
죽음 이후. 그런 쓸데없는 걸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다가는 현재에 충실하지 못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뭐든지 죽으면 다 끝이야. 그러니까 이 순간이 중요한 거고. 네 생각은 조금 다른가?”
“…아니요. 그 말이 맞아요.”
별다른 이견 없이 순순한 수긍이 돌아왔다.
“그냥, 배역 해석으로 고민돼서 물어봤어요. 고마워요.”
도현은 어느새 평소처럼 돌아온 후였다. 신휘민은 약간의 찝찝함을 느끼며 소년을 보았다가 이내 신경을 껐다. 그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 * *
“응, 아직까진 친한 친구가 생기는 건 어려울 거 같아.”
- 진짜? 아, 좋은 티 내면 안 되는데…. 큼. 유감이야.
“진, 이미 늦었어.”
- 앗, 그래?
능청스러운 목소리 다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유쾌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래도 난 네가 나랑 제일 친하면 좋겠단 말이야.
솔직한 말에 도현은 불쾌감 없이 웃었다. 그만큼 저를 좋아한다는 뜻인데 싫을 리가 없었다.
- 뭐? 너랑 제일 친한 건 나야!
- 다비, 그 얘기가 아니잖아.
- 이건 양보 못 해. 나야, 쟤야?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실랑이에 도현이 빙그레 웃었다. 이대로 둘만의 세계에 빠져서 못해도 삼십 분은 헤어 나오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나 먼저 끊을게.”
- 아니, 그 소리가 아니잖아!
- 그게 아니면 뭔데!
“…하하.”
짧게 웃은 도현이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저러고서 또 철썩 붙어 다닐 게 뻔했다. 저 커플 사이에 끼는 건 사양이었다.
“도현아?”
“네, 잠시만요.”
도현은 전날 미리 챙겨두었던 가방을 집어 들었다. 통화 마무리가 조금 이상한 것과는 별개로 진에게 한 말은 진심이었다.
도현은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괜한 걱정을 했네.’
사실 입학식 전에 도현은 고민했다.
진이나 니콜라스만큼 친구에게 마음을 줄 수 있을까.
두 사람은 도현에게 너무도 특별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인연이 또다시 찾아올 거 같지 않았다.
‘쓸데없는 고민이었지만.’
친한 친구는 고사하고 혼자 있을 시간도 없었다. 어디 갈 때도 최소 다섯 명의 친구가 함께했다. 거기다 촬영 때문에 학교를 자주 빠지다 보니 저를 제외하고 어떤 무리가 만들어진 거 같았다. 물론 그들이 도현을 멀리하지는 않지만….
도현의 표정이 모호해졌다.
약간, 트로피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각 무리가 도현을 데려오려고 눈치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현은 그들을 비난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촬영 때문에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들이 도현을 그 정도로 여기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 이전에 도현조차 그들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니 할 말도 없었다.
나가기 전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확인한 도현이 운동화를 신었다. 문 앞에 선 이장혁과 서혜나가 도현을 보았다.
“정말 안 데려다줘도 되겠어?”
“앞으로 매번 데려다주실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저도 이제 중학생이고요.”
미국에서는 어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닐 수 없다 보니 셔틀버스나 자차로 이동했다. 그러나 한국은 아니었다. 도현이 그때보다 크기도 했고 말이다.
도현의 부드러운 거절에 서혜나가 아쉽다는 눈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도현이 문을 열고 나갔다.
아침의 공기는 선선했다. 한국에 와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고 물으면 도현은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거라고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어딜 가든 어른을 동반해야 하던 처지에서 혼자 돌아다닐 수 있게 되니 생활 반경이 넓어지는 것은 물론, 훨씬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몇 달간 도현의 존재가 익숙해졌는지 알아보는 눈치는 있어도 달려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연예인들이 자주 출몰하는 동네라서 그런지도 몰랐다.
도현은 그렇게 느긋하게 산책하듯 걸어서 학교에 도착했다. 부지런한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 아직 푸른 공기가 맴도는 학교는 한산했다.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본관으로 들어갔다. 1학년 교실은 2층에 있어서 한 층 올라가야 했다. 계단을 올라 오른쪽으로 꺾으면 1학년 2반이 있었다.
그러나 도현은 반으로 곧장 가는 대신 교무실로 향했다. 아직 아무도 없을 때라 교무실에서 교실 열쇠를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똑똑.
“어, 들어와.”
드륵, 문이 열리자 이른 시간에 출근한 선생님 한 분이 보였다. 그가 도현을 보고 반가워했다.
“도현이네. 열쇠 가지러 왔어?”
“네, 안녕하세요. 선생님.”
“그래, 그래.”
도현이 벽에 걸린 열쇠를 챙기고 있자 그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촬영 때문에 피곤할 텐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잠은 잘 자거든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연예계에서는 어린애들도 빡세게 잡는 일이 많아서… 혹시라도 무리하면 안 돼. 알았지?”
“그럴게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후로도 도현은 선생님의 말을 몇 번 더 들어주어야 했다. 한참 말을 늘어놓던 그는 더 할 말이 없자 아쉬운 표정으로 도현을 보내주었다. 예의 바른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던 도현이 가벼운 목례와 함께 교무실을 나갔다.
“으앗.”
그리고 때마침 안에 들어오려던 아이와 어깨가 부딪쳤다. 명찰의 색깔을 얼핏 확인한 도현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 걱정스러운 낯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밖에 누가 있는지 몰랐어. 괜찮….”
흐르듯 나오던 말끝이 흔들렸다. 그러나 금방 표정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기 때문에, 상대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괜찮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현을 마주친 희운이 동공 지진을 일으키다가 몇 박자 늦게 허겁지겁 말했다.
“아, 아니야! 내가 미안해. 앞을 제대로 못 봐서….”
“아픈 데는 없고?”
말을 끊은 건가? 문득 든 생각이었으나 곧 과민 반응이라 여기며 대답했다.
“으응, 나 완전 괜찮아.”
“그래, 그럼 먼저 들어가.”
…묘하게 차가운 거 같은데. 아냐. 착각이겠지. 희운이 제 생각을 털어내며 조심스레 교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 잠깐…!”
그리고 미련 없이 교무실을 떠나는 도현에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부르려고 입술을 달싹였지만, 망설이는 사이 도현은 이미 교무실에서 멀어진 후였다.
“어어, 희운이. 너도 열쇠 가지러 왔어?”
“…아, 네.”
“하여간에. 바쁜 애들이 더 부지런하다니까.”
“하하….”
희운은 선생님의 수다를 들으면서도 미련 어린 눈으로 문밖을 흘긋거렸다.
타박, 타박.
조용한 복도에 발걸음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불이 켜진 교무실에서 들리는 말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자물쇠를 푼 도현이 반에 들어갔다.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평온하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한번 생긴 균열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갔다. 누군가 보았다면 깜짝 놀랄 만큼 일그러진 얼굴로, 도현이 꾹꾹 담아냈던 울분을 토해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해요, 형?”
신경질적으로 입술을 짓씹다가 한참 뒤에 한숨을 토해냈다. 물어봤자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수 없었다.
그야, 형은 죽었으니까.
힘없이 문에 등을 기댄 도현이 그대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왜 하필 이 학교에. 왜 하필 네가.
무릎을 모아 안은 도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두 눈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이젠 대부분의 일에 태연해질 수 있었는데, 유독 저 애가 보일 때면 감정이 주체가 안 됐다.
스스로도 낯설었다.
“그렇게 피했는데 왜 마주쳐서….”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원망의 말이 튀어나왔다.
실은, 정말 아이들이 저를 따라다니는 게 싫었다면 말로 타이를 수 있었다.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현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더 절실한 건 이쪽이었다.
아이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있으면 소심한 그 애는 다가오지 못할 테니.
“하아….”
텅 빈 교실에 무거운 한숨이 가라앉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