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42)화 (343/582)

제342화. 여우와 여우야 (16)

“오늘이 과거 편 마지막이랬지?”

“네.”

서혜나는 짧게 대답하는 도현을 흘깃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있어? 옆에서 입 모양을 물어오는 이장혁에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쾌하게 등교했던 도현은 심각한 낯으로 돌아왔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서혜나가 걱정스러운 낯을 했다.

“뭐 해, 도현아?”

“네? 아…. 반 단톡에서 친구들이 저를 불러서요.”

보라는 듯 화면을 보여주었다.

- 나 지금 티비 앞임 ㅋㅋㅋ

- 나도

- 여기 한 명 추가요

- 도현아!! 나도 티비 틀었어!

- 근데 이도현 단톡 봐?

- 안 보는 듯

- 잘 안 본댔어

- 똑똑똑똑 이도현 씨 계십니까?

그 사이에도 카톡은 순식간에 휙휙 올라갔다.

- 얍! 나와라, 이도현!

- ㅋㅋㅋㅋㅋㅋㅋ

- 그런다고 나오겠냨ㅋㅋㅋ

- 하여튼 서일준 ㅈㄴ웃김ㅋㅋㅋ

- [이도현 명대사_여기서 어떻게 더 예쁘란 말이냐_ver.//yutube.com//watch?v=_3nWZ-D6RcI2]

- 이거면 나오지 않을까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앀ㅋㅋㅋㅋ

- 일준아 돌았니

- 월요일에 이도현 옴?

- 안 온댓음

- 노렸넼ㅋㅋㅋㅋㅋㅋ

‘반 애들이랑 사이는 좋은 거 같네.’

친구 문제는 아닌 거 같단 생각에 안심한 서혜나였다. 생각보다 애들이랑 잘 어울리는 거 같고.

“대답은 안 해주려고?”

“하면 놀라던데요.”

“…응?”

도현은 말 대신 보여주겠다는 듯이 가볍게 기호 두 개를 쳐서 올렸다.

- ^^

- ?

그 물음표 이후로 올라오는 채팅이 없었다.

- ??

- ??????

- 헉…

한참 후에 조금씩 다시 올라오기 시작하는 메시지에 서혜나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러네….”

대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 거니. 약간 아련한 눈이 도현을 향했다. 정작 도현은 무심하게 핸드폰을 끌 따름이었다.

“이제 드라마 시작해요.”

“아, 그래! 봐야지.”

도현의 학교생활은 담임 선생님과 학부모 상담을 통해 들어야겠다. 계획을 세운 서혜나가 화면에 집중했다. 이젠 익숙해진 오프닝이 송출되고 있었다.

* * *

“이거, 놓으십시오!”

남자의 손에 끌려가던 해아가 팔을 비틀었다. 그녀가 온 힘을 다한다 해도 요괴를 떨쳐낼 수는 없을 진데, 이상하리만치 순순히 팔이 풀려났다. 제 손목을 부여잡은 해아가 한 발짝 물러났다.

이송 도중 습격한 여우야는 해아를 데리고 무작정 도망쳐 나왔다.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끌려와 정신을 차려 보니 숲속이었다.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돌아가세요.”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그렇게 말했다.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

가만히 그 말을 듣던 남자가 픽 웃었다. 때아닌 웃음에 해아가 눈매를 찡그릴 때였다. 남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더는 찾아오지 말라. 돌아가라.”

그 담담한 말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해아의 눈이 파르르 떨리다가 아래로 향했다.

그가 자신을 비웃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내치고 고작 이런 꼴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나온 말은 달랐다.

“내가 들어줄 수 없는 것만 바라네.”

놀란 해아가 고개를 들자 한 번도 시선을 돌린 적 없었다는 듯,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해아는 그제야 남자가 무척이나 분노한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여우야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싫어.”

“…예?”

“네 부탁 들어주기 싫다고.”

다시 손을 잡아끄는 손에 해아는 넋을 놓고 끌렸다. 앞서가는 이의 등에 묻은 피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성은 안 된다고 부르짖고 있는데 몸은 그에게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구름 위에 걸린 달 때문일까. 몸은 무겁고 정신은 몽롱한 와중에 기이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너!”

바닥에 쓰러지기 전에 해아를 받아낸 이가 아름다운 붉은 눈을 크게 떴다. 분노가 휘발되고 불안이 떠오른 눈에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며칠 만에 해아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저 붉은 눈이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사자라면, 죽음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릴 때면 항상 붉은색이 보였다. 그러면 해아는 안도하며 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여튼 깨어나면 보자. 너.”

웅웅거리는 소리 위로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이 느껴진 것도 같았다.

목이 탈 듯한 갈증을 느끼며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던 해아는 치미는 두통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스르륵. 몸을 덮었던 장포가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을 곱게 갠 해아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크진 않지만, 사람 두엇 정도 몸을 뉘여 쉬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동굴이었다. 천천히 동굴 벽을 짚어가며 밖으로 나온 해아는 절벽 쪽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휘영청 떠오른 달 아래서 여덟 개의 꼬리가 희게 빛났다. 해아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광경을 보았다. 기척을 느낀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고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을 때까지.

깊은 밤중에도 붉은 눈은 기이하리만치 선명하게 보였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리자 그가 다가와 손으로 치워주었다. 해아는 그 손이 떨어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영원하지 못할 걸 알면서도 바라게 되는 게 사랑이라면.

참으로 지독한 감정이었다.

* * *

“요괴 척살령?”

“그렇다니까!”

“그 요물이 관군을 습격했다지 뭔가. 그 탓에 착호군이 눈에 불을 켜고 산을 쥐 잡듯이 돌아다니고 있지 않겠는가?”

“겨우 요괴 한 마리 잡겠다고….”

“예끼, 이 사람아! 그 요괴 한 마리에게 걸린 포상금이 얼마인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얼만데 그러나?”

“삼백 냥!”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상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것도 산 채로 잡아 오면 오백 냥이라더라!”

“오, 오백 냥…?”

큰 수컷 호랑이 한 마리를 잡으면 40냥을 받을 수 있다. 그 40냥도 좋은 초가집 한 채를 구매할 수 있는 거금이었다. 오백 냥이면 그야말로 인생 팔자가 바뀌는 것이다.

이야길 나누던 이들의 얼굴에 점차 탐욕이 어려갔다. 탐욕은 들불처럼 번져 온 마을을 뒤덮었다.

* * *

“가지, 마세요.”

해아가 잠든 사이 나가려던 여우야가 멈칫했다. 해아가 창백한 낯으로 말했다.

“또 피를 묻혀 오실 것 아닙니까.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나가지 마세요.”

“내가 말했지. 넌 들어줄 수 없는 것만 바란다고. 쉬고 있어라.”

그들은 산속에 버려진 오두막을 찾아내어 머무는 중이었다. 여우야는 전날에 보수해놓은 문을 닫은 뒤 훌쩍 뛰어 나뭇가지를 밟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자 산 중턱에서 어슬렁거리는 인간의 무리가 보였다. 여우야의 입이 길게 찢어지며 송곳니가 드러났다.

“감히….”

짐승의 울음소리가 낮게 울렸다.

감히 그 누구도 그에게서 여자를 빼앗아 갈 수는 없었다.

그 누구도.

투둑, 긴 손톱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무심하게 손을 털어낸 여우야가 멈칫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시체가 걸친 붉은 장포였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가 시체의 몸에서 겉옷을 빼내었다. 피가 묻었으나 색깔이 검붉은 탓에 티가 잘 나지 않았다.

물론 그래봤자 온몸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는 숨길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옷에 묻은 피를 볼 때마다 창백하게 질리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여우야가 붉은 장포를 제 몸 위로 걸쳤다. 붉은색 천 위로 늘어진 흰 머리카락이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가 대충 옷을 털고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마을에 가서 먹을 것과 약재를 구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그리고 그 시각.

“주지 스님…?”

“법우님.”

기어이 나간 이가 걱정되어 오두막 근처를 돌아다니던 해아는 예상치 못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무아미타불. 법우님.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이 산은 여우 요괴가 사는 곳인데 어찌하여 이런 늦은 밤에…. 저와 함께 내려가시죠. 여긴 위험합니다.”

“저는 갈 수 없어요.”

유일하다시피 한 인연이었다.

스승이자 친우이며, 그녀가 흔들릴 때마다 지탱해 주었던 은인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툭, 터져 나온 말은 이내 홍수가 되었다.

“식솔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저는 관노가 되어 평생을 노역해야 합니다. 스님…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부친께선… 부친께선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으셨어요. 평생을 결백하게 살아오신 분이란 말입니다!”

말이 이어질수록 목소리에 절망이 섞여 들어갔다.

“어찌 세상이 이럴 수 있습니까?”

원망이자 비명이었다.

“어찌해서요?”

서혜나와 이장혁은 숨조차 죽인 채 화면에 집중했다. 잔뜩 곯은 속을 토해내는 서지민의 연기는 감정이 동화될 만큼 몰입력이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눈물로 젖은 뺨. 건조하게 갈라진 목소리. 그 모든 게 여우야 앞에서는 드러내지 않고 감추었던 것들이라 그녀가 몰려 있다는 게 더욱 절절히 와닿았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썩고 썩은 속내가 토해졌다.

그리고.

참담한 낯으로 해아를 보던 주지 스님이 한참의 침묵 후에 결연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이 나라의 백성이지만 동시에 그대의 친우입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해아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계였다.

부모의 죽음, 가문의 몰락,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건강, 그런 자신 때문에 희생하는 여우야. 그 모든 게 그녀를 벼랑 끝까지 밀어 넣고 있었다.

그래서 해아는 이 구원의 손을 놓칠 수 없었다.

도현은 썩은 동아줄을 잡는 해아를 무덤덤한 눈으로 보았다. 해아의 선택을 이해한다. 그녀는 그저 몰랐을 뿐이었다.

세상에 완벽한 구원은 없다는 걸.

* * *

잠깐의 평화가 찾아왔다.

여우야는 해아의 설득에 못 이겨 절에 몸을 의탁했다. 스님은 두 사람에게 안채 두 칸을 내어주고는 편안히 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스님은 여우야의 정체를 몰랐다.

여우야가 사람의 모습으로 둔갑했기도 했고 해아가 그것만큼은 입에 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스님을 의심하던 여우야도 갈수록 평화에 젖어 들었다.

피비린내도, 비명도 없는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지난 일이 모두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고요한 시간이.

절 뒤편에 앉은 해아가 가만히 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여우야가 몇 송이를 따다가 가져왔다. 그 위로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녔다.

꽃을 건네받은 해아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여우야는 오랜만에 떠오른 부드러운 미소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 * *

그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너무 주제넘은 바람이었을까.

* * *

“죄인을 포박하라! 중요한 인질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

여우야가 먹을 것을 찾아 떠난 사이 절에 군졸이 들이닥쳤다. 해아는 저를 묶은 이들에게 끌려가 사당 한가운데에 꿇어 앉혀졌다.

“스님…?”

목덜미에 드리운 칼날에 해아가 더듬거리며 상대를 불렀다. 불신과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였다.

“스님, 왜… 대체 왜?”

“원망 마십시오. 이래야 했던 일입니다.”

차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해아는 묶인 채로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알던 사람이 아닌 거 같았다. 자애롭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사냥을 떠난 요괴가 언제쯤 돌아올지 가늠하던 이가 입을 열었다.

“제가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여우 요괴와는 어떤 식으로든 엮여서는 안 된다고.”

“…그는 절 살려주었어요! 사악한 요괴가 아니란 말입니다! 차라리, 그래요. 차라리 절 죽이세요. 다 제 잘못입니다. 다 제가 잘못한 겁니다.”

절박한 외침에 스님은 대답 대신 바짓단을 걷어 보였다. 해아의 시선이 그의 발목에 고정되었다.

“보이십니까?”

두 개의 붉은 점.

“…그건,”

“기억하십니까. 여우에게 물린 어린아이를.”

드라마로 보고 싶다며 웹툰을 보지 않았던 이장혁이 천천히 풀리는 과거 이야기에 입을 벌렸다.

사냥꾼을 죽음으로 내몰고.

마을을 침묵에 잠기게 하며.

끝내 저주받은 요괴를 탄생시켰다.

살아남았지만, 아이의 업보는 발목에 화인처럼 새겨졌다. 사랑하는 이가 단명한다는 지독하리만치 제 죄를 닮은 저주와 함께. 그의 후손에 후손을 이어서 대대로.

그르릉. 사당 안을 울리는 짐승 소리에 관군들이 긴장하며 칼을 고쳐 쥐었다. 굳은 낯을 한 스님이 염주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조상의 죄를 이어받았으니 제 대에서 끊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토록 기다리던 요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 * *

너무 주제넘은 걸 바라서.

해아의 목에 닿은 칼날이 더욱 바짝 붙었다. 흰 피부에 실선이 그어지고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시선을 조금 더 올리니 흰 얼굴이 눈물에 젖어 엉망이었다.

“요괴와 인간은 얽혀서 좋은 것이 없다. 그러나 네가 정녕 인간의 마음을 품었다면, 그리하여 이 여인을 살리고 싶다면, 방법이 있다. 네 목숨을 대신 내어 놓거라.”

그래서 네가 우는 걸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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