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여우와 여우야 (18)
서지민이 간절한 눈으로 이무기 역을 맡은 배우를 보았다. 그는 유유자적하게 한 바퀴 빙 돌며 구경하더니 한마디 꺼냈다.
“안 돼.”
이어, 설명이 더 필요하다 느꼈는지 부연했다. 안타깝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는 건 덤이었다.
“구해준다는 건 저 여우랑 내가 인연의 실을 새로 묶는다는 소리인데, 요괴와 요괴는 엮여서 좋을 게 없거든.”
구미호는 죽음에서 기원한 요괴.
그리고 이무기는 기만에서 비롯된 요괴.
죽음과 기만이 만나 봤자 누구 하나 죽거나 기만당할 뿐이었다. 아니면 기만당하고 죽거나. 그래서 요괴란 족속이 저주인 것이다. 동족과도 엮일 수 없으니 말이다.
서지민이 입꼬리를 꿈틀거리더니 버럭 성을 냈다.
“그럼 왜 온 거야!”
“그야… 구경하려고?”
서지민의 두 눈에 살심이 치솟았다. 죽인다. 벗어나면 저 새끼만은 꼭 죽인다. 저 뺀질거리는 면상에 주먹을 꽂아 넣지 않고는 도저히 천국에 가지 못할 거 같았다.
그때였다.
“네가 하면 되잖아.”
이무기가 태연하게 말을 뱉었다.
“네 힘이면 이 주술 정도는 애들 장난 수준이야. 네 일을 남에게 미루면 안 되지.”
“하, 하지만… 난 이미 신기를 줘 버렸는데.”
“멍청한 것.”
이무기가 혀를 찼다.
“너, 그만… 읍, 으븝!”
“씁, 반려동물은 끼는 거 아니야.”
이무기가 손을 까딱한 것으로 도현의 입을 닫아버렸다. 적어도 이런 잡기에 있어서는 이무기가 한 수 위였다. 도현은 딱풀처럼 입이 달라붙은 채 사나운 눈으로 이무기를 노려보았다.
“너는 신기가 무슨 물 단지에 담긴 물인 줄 알아? 신기는 결국 냇물이다. 계속 흐르지. 멈추지 않아. 댐을 세워 두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아.”
“그 소리는….”
서지민의 눈동자가 흔들리자 이무기가 여유로이 말했다.
“모든 것을 손에 쥘 수는 없어. 자, 선택할 시간이야. 방해꾼은 잠시만 쉬고 있고.”
이무기가 등장한 순간부터 팔이 구속되어 있던 신휘민이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렸다. 미친 건가. 아까부터 드는 위화감을 무시한 이무기가 인간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한이련을 보았다.
“골라. 네 삶을 지킬 건지.”
뱀 같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가 은근한 투로 말했다.
“네 여우를 구할 건지.”
안 돼. 도현이 분노인지 다급함인지 모를 눈으로 서지민을 보았다. 안 된다. 이미 두 차례나 봉인되었던 신기다. 한 번 더 깨어져 나가면 되돌릴 수 없을지 모른다.
그녀가 지키고자 했던 평범한 삶을 영영 돌려받지 못할 것이다.
순간적으로 도현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을 끌어와 이무기의 주술을 끊어냈다. 자유로워진 입으로 도현이 쉰 목소리를 내었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은 저지르지 마.”
서지민의 떨리는 눈이 도현을 향했다. 도현은 소리 지르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감정은 터트리기 시작하면 끝이 없을 것 같았기에 억누른 채였다.
“지금 봉인을 풀면 되돌릴 수 없어. 더는 나도 네 신기를 봉인해 줄 수 없다고.”
한이련의 힘은 강대하다.
법력, 신력, 요기까지 한데 뭉친 힘은 이제 한이련이 원한다 해도 순순히 고개를 수그리지 않을 터였다.
“평범한 삶, 원했잖아.”
지친 듯 갈라진 목소리였다. 그러나 덤덤한 목소리에서 간절한 애원이 느껴졌다.
그녀가 정말 전생의 기억을 찾았는지는 모른다. 아니. 찾았을 리가 없다. 만약 기억한다면 아직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볼 리가 없을 테니. 그건 우연이었을 것이다. 환청이거나.
서지민이 조용해졌다.
도현은 이제야 그녀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하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그다음 순간.
그녀의 주위로 힘이 요동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너, 이 멍청한!”
“그래. 나 멍청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면서도 그녀의 두 눈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이것을 후회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너와 함께하는 순간이 이렇게 특별한데 어떻게 평범하게 살아? 진짜 멍청하지.”
도현의 표정이 멍해졌다. 서지민은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너 없이 안전한 삶보다는 네가 있는 위태로운 삶이 나아.”
“너… 한이련.”
도현이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그 시도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봉인이 풀리며 거센 돌풍이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컷!”
바람이 잦아들었다. 한 스태프가 송풍기로 엉망이 된 도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도현은 손길을 받으며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피곤하니?”
“아무래도요.”
스태프의 질문에 도현이 긍정했다.
격렬한 감정 연기는 그만큼 에너지를 소모할 수밖에 없다. 분노를 표현하느라 내내 이를 악물고 있어서 턱이 약간 뻐근하기도 했다.
“근데 아까 연기 되게 신기하더라. 진짜 주술에 걸린 거 같았어!”
“아. 입 다무는 연기요?”
“응, 그거!”
“연습 많이 했거든요.”
이무기의 주술은 어떤 물체가 입을 틀어막도록 하는 게 아니라 혓바닥이 천장에 붙게 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 순간을 연기로만 표현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연습 효과가 있었나 보네.’
도현이 뿌듯하게 웃었다. 머리 손질이 모두 끝이 나자 도현은 시선을 돌렸다. 연기 내내 와이어에 대롱대롱 묶여 있던 신휘민이 아래로 내려와 휴식하고 있었다.
가늘게 뜬 눈으로 그의 안색을 살피던 도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얼핏 보면 사람 좋아 보이지만, 은은한 거리감이 느껴지는 미소를 보니 제정신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아까는 좀….’
충격과 공포였다.
도현은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소름이 돋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전에 유 배역을 연습한답시고 까칠하게 다녔던 것을 다시금 반성했다.
“자, 다시 촬영 시작합시다. 휘민 씨는 미안하지만 와이어에 다시 매달려 주시고요. 괜찮죠?”
“몸은 튼튼해서요. 괜찮습니다.”
튼튼하다고?
도현의 시선이 신휘민의 상체에 닿았다. 군살 없는 관리된 몸이란 건 알겠지만….
‘에드워드 같은 게 튼튼한 거 아닌가.’
아니면 마누엘이라던가.
둘 다 도현에게 있어서 ‘튼튼한 몸’ 하면 떠오르는 사람들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 기준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도현이었다.
“도현이도 준비됐어?”
“네.”
정가현의 물음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신호를 받기도 전에 곧장 감정 몰입에 들어갔다. 신호가 떨어진 순간 배역에 동화되려면 미리 준비해놓는 편이 좋았다.
그리고.
“레디, 액션!”
슬레이트가 맞부딪혔다.
* * *
주술이 풀렸다.
구속하던 것이 사라져 몸은 한없이 가벼웠음에도 무저갱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도현의 눈에 천천히 쓰러지는 서지민이 담겼다.
주저 없이 달려가 끌어안았다. 뒤에선 주술이 강제로 파훼된 신휘민이 피를 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쪽도 멀쩡하진 않았다.
“왜, 어쩌자고!”
분노를 토해내는 도현에 서지민이 맥없이 웃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사랑해, 여우야.”
도현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어 화조차 내지 못한 채 그녀를 응시했다. 픽 웃은 서지민이 눈을 감았다. 곧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죽은 게 아니라 기절한 것임을 확인한 도현이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잠시 후에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구나.”
구경꾼처럼 있던 이무기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그 호칭. 알려준 게 너였어.”
확신한 투였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걸 깨달은 이무기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으, 기억해낸 걸 수도 있잖아.”
“그럴 리가.”
도현이 조소했다.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다.
놓아줄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백 년간 구천을 떠돌게 만들었다. 미치고 미쳐서 자아를 잃어버릴 때까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변명해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그랬으니까. 하지만 도현은 알았다. 만약 제정신이었다면 더욱 강력한 저주를 걸어 영원토록 붙들어 놓았을 것임을.
그녀는 그의 추악함을 몰랐다.
- 사랑해, 여우야.
그러니 그리 말할 수 있었겠지.
끔찍한 것은 네 말이 너무도 달게 느껴진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네가 전생을 기억했다면 나를 증오할 거란 사실도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너를 저주했던 것이 후회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너를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테니까…. 도현은 눈을 감은 서지민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제가 만지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가볍게 닿았던 손끝이 곧 떨어졌다.
그러니 끝내자.
오백 년간 괴롭혔으면 충분했다. 더는 욕심낼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나는 결국 너를 나락에 떨어트릴 테니까.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저 애는 대체….’
정가현은 탄식조차 내뱉지 못한 채 넋을 놓고 그 장면을 보았다.
경건하다. 차라리 신에게 기도하는 것처럼 엄숙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애절했다.
차마 닿지 못하고 그러쥔 주먹이나 가장 귀한 것을 보듯이 하는 눈빛 같은 게. 보는 사람마저 아리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지금.
웹툰에서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장면 중 하나가 도현의 연기로 인해 생동감을 입고 재탄생하고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각에 정가현은 약간의 이질감마저 느꼈다.
“정말 지우려고요?”
그 이질감에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신휘민이었다.
정가현조차 순간적으로 넋을 빼앗긴 상황에서 신휘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제법….’
입술이 이마에 닿으려던 순간 방해받은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거기엔 피를 토한 채로 실실 웃고 있는 신휘민이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도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주술이 강제로 파훼되면 시전자는 그 여파를 돌려받는다. 속이 말이 아닐 게 분명했다. 반면에 도현은 아직 힘이 넘쳐흘렀다. 그의 목숨은 도현의 손에 달린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신휘민은 원하던 것을 이뤘다는 듯이 후련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후련? 아니. 저건 즐거워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미친놈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당신과 이련 씨의 끊어질 뻔한 인연을 다시 잇는 것만으로도 내 저주가 약해졌어요. 그런데 정말 지우겠다고요? 당신이?”
하하하하! 신휘민이 아주 웃긴 것을 보았다는 듯이 파안대소했다.
도현은 그의 웃는 낯에 관심을 주는 대신 굳은 얼굴로 발목을 확인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챈 신휘민이 보란 듯이 바짓단을 걷어 올려주었다.
두 개의 붉은 점.
그러나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었다. 제 발목을 보던 신휘민이 중얼거렸다.
“이련 씨가 불쌍하네요. 이 정도면 집착 아닌가.”
“너….”
“너무 놀란 표정 하지 마세요. 사람이 경험을 배우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을 봉인했는데도 저주가 약해지긴커녕 강해지기만 했으니… 뭐. 집안 꼰대들은 그게 요괴에게 죽음을 내리지 못한 조상의 죄라고 하는데 제 생각은 좀 달랐거든요. 역효과가 났으면 그게 답이 아니란 거지.”
신휘민이 후련한 낯으로 말했다.
“내가 집을 나온 것도 그래요. 집안 어른들은 하나같이 당신을 잡아내 족칠 생각밖에 없다니까. 내가 크면서 읽은 퇴마서만 서재를 가득 채워요, 채워. 근데, 봐.”
발을 살랑살랑 흔든 신휘민이 즐겁게 웃었다.
이무기의 주술에 의해 허공에 걸린 채로 발을 달랑거리면서 웃는 게 미친놈 같고, 딱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새로이 보석을 발굴한 기분에 정가현이 웃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이 장면은 드라마에서 가장 큰 반전.
악역인 줄 알았던 윤채준이 실은 조력자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조력자보다는 뜻이 일치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이 부분에서 윤채준의 과거가 삽입되며 비밀이 밝혀진다. 처음에는 어린 시절의 모습이었다.
윤채준은 타고 나길 남달랐다. 일반인과 기질이 달랐다고 보는 게 맞았다. 도현보다 더 어린 모습을 한 윤채준은 구미호와 관련된 기록을 보고 한심하다는 듯이 말한다.
- 업보네.
그게 조상부터 내려져 오는 저주에 대한 감상이었다. 그때부터 윤채준은 저주의 근원을 없애는 게 해주의 방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떠올리게 된다. 그게 답이었다면 오백 년 전 봉인 이후 저주가 약해졌어야 하니까.
그렇게 성인이 된 윤채준 앞에 한이련이 나타난다.
과팅에서 귀신을 본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윤채준이 한이련에게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가 그거였다. 같은 부류인 거 같아서.
그다음에는… 뭐, 그래. 호감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한이련은 유쾌하고 매력적이었으니까.
물론 그 호감은 구미호가 나타나는 순간 다른 쪽 호감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윤채준은 그들을 관찰했다. 처음에는 한이련이 인간 제물인가 싶었다. 아니면 옆에서 신기를 쪽쪽 빼앗길 리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뻔뻔하게 대학생으로 위장해 붙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다른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둘이 좋아하나?
멀리서 아는 건 한계가 있었다. 윤채준은 부러 같은 교양을 들으면서 그들에게 접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의 모든 이들이 여우야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그건 한이련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윤채준만이 그를 기억했다.
역시 인간 제물이었나?
헷갈렸다. 그가 갈피를 잡지 못할 때였다. 한이련의 목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 그건….
- 아, 이거요? 저도 언제부터 걸고 다녔는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이상하게 소중하게 느껴지는 거 있죠?
그야 당연하지. 영단이니까.
윤채준은 확신했다.
적어도 요괴 쪽은 여자를 사랑한다. 그것도 꽤 깊은 감정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제 영단을 남에게 주는 미친 짓을 저지를 리가 없지 않나. 그것도 저런 보호 주술을 덕지덕지 붙여서 말이다.
그리하여 윤채준은 모두를 속였다.
신휘민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내가 맞았잖아.”
뭐…. 만약 주술 실행 도중 저주가 약해지는 낌새가 보인다면 진짜로 죽이려고 하긴 했다. 그래도 결국엔 정답을 찾았으니 됐지.
“인간한테 거하게 한 방 맞았네. 여우 새끼.”
도현의 크게 뜨인 눈과 이무기의 비웃음을 마지막으로 컷 소리가 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