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여우와 여우야 (19)
세수를 마치고 나가기 전, 남자는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턱을 살짝 치켜들자 푸르스름하게 든 멍이 보였다. 신휘민이 눈썹을 찌푸렸다.
아이돌의 얼굴에 흠집이 난 건 뼈아픈 손실이다. 그의 얼굴은 그 자체로 상품이고 회사의 자산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붓지는 않았다는 것. 상처가 난 건 아니라서 흉터 같은 것도 남지는 않을 거 같았다.
사실 불만을 품기도 애매했다. 약속된 사전 거리가 있었는데 연기에 몰입해서 한 뼘 정도 더 가까이 간 건 신휘민, 본인이었으니까.
얼굴에 상처가 생긴 경위는 이랬다.
여우야가 끝끝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사라지고 윤채준은 한이련이 눈을 뜨길 기다린다. 날이 밝아올 때쯤 한이련이 정신을 차리고.
- 정신 차렸어요, 이련 씨?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싱글거리던 윤채준은 그대로 한이련의 주먹에 얻어맞는다.
그리고 진짜로 얻어맞았다.
신휘민은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워서 픽 웃고 말았다. 초보 티 풀풀 나는 실수였다.
‘그래도 장면은 잘 뽑혔지.’
진짜로 얻어맞은 탓에 소리나 연기가 퍽 리얼했다. 촬영된 장면을 보고 나서 한 대 정도는 더 맞아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상처가 남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물론 그가 한 대 더 얻어맞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인기 아이돌을 촬영장에 모셔놓고 한 대 더 때릴 위인은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신휘민은 다시금 제 얼굴을 꼼꼼히 확인했다. 이 정도라면 메이크업으로 커버가 가능할 거 같았다. 그가 물기에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낸 후 화장실을 나왔다.
복도에 서 있는 인물에 화장실을 쓰려는 건가 싶어 옆으로 물러설 때였다.
“형. 얼굴 다쳤다면서요?”
아무래도 볼일은 그한테 있는 모양이었다. 신휘민은 가볍게 대답했다.
“응. 촬영 중에 사고가 생겨서.”
“조심해야죠. 원티어들이 가장 좋아하는 게 형 얼굴이잖아요.”
볼 게 얼굴밖에 없다고 말하는 주제에 싱글거리며 웃는 낯이 순해 보였다. 괜히 팬들 사이에서 윤댕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개 같긴 하지.’
물고 늘어질 건덕지만 찾으면 득달같이 달려와 캉캉대는 게 딱 개새끼였다.
“걱정 고마워. 형이 아침 차려놨더라. 가서 먹어.”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밥이나 처먹으란 소리였다. 아침부터 기운 빼기 싫었던 신휘민이 그를 지나쳤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결국 유명세 얻어 탄 거면서.”
우뚝. 신휘민의 발걸음이 멈췄다. 가만히 쳐다보는 눈길에 움찔한 이가 목소리를 키웠다.
“왜요. 제 말이 틀려요? 솔직히 맞잖아요.”
신휘민은 그가 자신에게 갖는 감정을 알았다.
열등감. 질투.
같잖지도 않았다.
물론 이해하려면 못할 건 없다.
아이돌에 관심도 없던 새끼가 갑자기 데뷔 조에 들질 않나, 얼굴 하나만으로 화제가 돼서 실력도 없는데 늘 센터에 서질 않나.
무엇보다 신휘민은 아이돌 활동에 흥미가 없는 걸 숨기지 않았다. 대충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의무적으로 했을 뿐. 거의 24시간 붙어 다니는 멤버들이 그걸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리더를 포함한 다른 멤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런 신휘민을 이해했다. 그룹에 들어온 게 그가 원하는 일이 아니기도 했고, 그렇다고 그가 팀에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들은 신휘민이 그은 선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윤지원은 신휘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신휘민은 그런 윤지원을 이해시켜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뿐이었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린애 덕을 봤으면서 형이 해낸 거라고 착각하는 게 불쌍해서 말해준 거니까요.”
윤지원이 사감을 그룹 활동에까지 끌고 올 정도라면 해결해볼 의지가 생겼을지도 몰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그 정도로 경우가 없진 않았다. 적어도 아이돌에는 진심이었으니까.
그래서 두 사람의 양상은 항상 비슷했다.
윤지원이 긁으면.
“그래.”
신휘민이 무시했다.
“자, 잠깐.”
“왜?”
“그게 다예요?”
“그럼?”
윤지원이 입술을 짓씹었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신휘민은 차분한 눈으로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원아.”
“네?”
긴장한 눈이 이쪽을 향했다. 주먹을 쥐는 게 무슨 말이 나오든 맞받아칠 의향이 가득한 거 같았다.
하지만 신휘민은 그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마음이 없었다.
“가서 밥이나 먹어.”
황당한 얼굴을 향해 싱긋 웃어준 후 방으로 쏙 들어갔다.
이전이라면 그 말에 조금은 반응했을지도 몰랐다. 윤지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항상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신휘민은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단 걸 증명했다. 그간의 시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는데 불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틀린 말은 아니지.’
여러모로 그 어린애의 덕을 본 게 맞았다. 유명세뿐만 아니라, 신휘민은 스터디를 시작한 후로 연기력이 늘어나는 걸 매일매일 실감하고 있었다.
안 늘기도 어려웠다.
- 형… 그.
- 그냥 말해.
- 그게 최선인가요?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태도가 더 화났다. 그 건방진 애는 그의 자존심을 처참히 뭉개다 못해 부숴버렸다. 이젠 그 정도의 어그로가 아니고서야 신휘민을 흥분시킬 수 없었다.
“대표님, 저 신휘민입니다.”
- 어어, 우리 휘민이! 무슨 일이야. 응?
“별건 아니고요. 지원이가 스케줄이 없어서 심심해하는 거 같길래… 얼마 전에 예능 피디님한테 출연 제의를 받은 곳이 있어서요. 아쉽게도 저는 촬영 중이라 나가기 어려우니까 거기에 지원이가 대신 출연하는 게 어떨까요?”
- 아이고. 동생도 챙기고. 기특하네, 기특해. 무슨 예능인데?
신휘민이 빙긋 웃었다.
“<사나이가 간다>요.”
배우, 아이돌, 모델, 아나운서 등등 불문하고 빡세게 굴리기로 유명한 군대 예능이었다.
화는 안 났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다고는 안 했다. 전화를 끊은 신휘민이 상쾌하게 웃었다.
* * *
[KBN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 구미호뎐 반전 화제!]
[윤채준, 악역이 아니라 큐피드?]
[기억을 되찾은 한이련, 앞으로 행보는?]
[<구미호뎐 : 인과 연> 마지막이 다가온다!]
- 와씨… 난 윤채준이 큐피드일 줄은 몰랐다 ㅋㅋㅋㅋ
- 아 윤채준 밀었는데 ㅠㅠㅠ
⌞님 그건 망한 주식이에요….
⌞알지만 놓지 못했을 뿐…
⌞동양화과 17학번 윤채준 못 잃어 ㅠㅠㅠㅠ
- 근데 악역 없어서 신박한데 좋음
⌞222 맞아 주지 스님도 막판에는 맘 약해져서? 봉인만 했고
- 근데 여우야 미친놈은 얼마나 지독한 사랑을 하는 거냐…
⌞ㅇㅈ 몇백 년간 이어져 온 저주가 한이련이랑 다시 만나게 해줬다고 풀림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본 남주 중에서 찐 사랑꾼 탑3에 든다 진짴ㅋㅋㅋㅋ
9화가 방영될 땐 윤채준의 반전에 대한 반응이 쏟아졌고.
[여린 커플, 이대로 헤어지나?]
[전생의 일을 알게 된 한이련, 그 선택은?]
정신을 차린 한이련은 윤채준과 이무기에게서 그간의 진실을 듣게 된다.
- 난 몰랐어. 그러니까 내가 여우야의 전 애인이라고?
- 환생이지.
- 근데 왜 아무런 기억이 없지?
- 환생이니까.
이런 가벼운 대화에서 구미호뎐 특유의 발랄함이 드러났다. 그런 큰일이 있었는데도 드라마의 정체성을 놓지 않은 것이다.
- 하지만 같은 영혼이라며.
- 모든 기억을 잃었으니 결국 다른 사람이다. 쯧, 너나 그 여우나. 멍청하게 굴지 마. 결국엔 지난 것은 지난 것이야.
그리고 등장한 장면 자체는 적지만 임팩트는 작지 않았던 이무기는 마지막까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퇴장했다.
- 찾아갈 거예요?
- 그래야죠.
- 하지만 들었잖아요. 그 요괴 때문에 승천하지 못하고 구천에 떠돌았다면서요. 나도 양심은 있어요. 이련 씨가 싫다면 강제하지 않아요.
무속과 가까이 컸기 때문에 윤채준은 영혼이 윤회의 길에 들어서지 못하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알았다. 한이련에게 얽힌 모든 일을 알게 된 윤채준은 남은 저주를 푸는 대신 그녀를 배려하기를 택했다.
묘하게 소시오패스 같은 면모를 내비쳤던 윤채준이었기에 의외였다. '윤채준이 한이련을 관찰하는 동안 스며들었다'라는 주장이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시청자들은 난리가 났다.
- 아ㅠㅠㅠㅠ 윤채준 왜 섭남이냐….
- 마음 접었다면서 못 접은 듯
- 사랑해서 오백 년간 저주한 요괴 vs 좋아해서 오백+N년간 이어져 온 저주 푸는 걸 포기한 인간
⌞이렇게 보면 닥후잖앜ㅋㅋㅋㅋㅋㅋㅋ
⌞그래봤자 남주는 여우야임
⌞알고 있어 새끼야 ㅠ
약간의 아우성이 있긴 했지만, 그건 여우야의 근황이 나오면서 사그라들었다.
아무도 없는 절. 첫 화에서 한이련이 주저앉았던 곳에 기대에 앉은 여우야가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흰 머리카락이 등허리까지 뒤덮고 있었고 그 뒤로 아홉 개의 꼬리가 살랑였다.
절 안에 홀로 남겨진 어린 여우야는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특히 건조한 듯하면서 씁쓸한 도현의 표정 연기가 일품이었다.
- 누가 우리 여깽이 유기했냐
- 이련아 이건 네가 봐주자 ㅠㅠㅠㅠ
- 완전 주인 잃고 슬퍼하는 개 같음
⌞님 개 아니고 여우임;
⌞아… ㅇㅋㅇㅋ
그리고 그런 시청자들의 마음을 읽은 듯. 일상으로 돌아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던 한이련이 집을 나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가 향하는 곳은 여우야가 있는 산이었다.
[돌아오는 금요일, <구미호뎐 : 인과 연> 마지막 화 방영!]
[‘구미호뎐’ 배우진, 한계 없는 매력에 마지막 화 기대감 상승]
드라마 종영까지는 일주일이 남았지만, 실제로 크랭크 업을 하는 날짜는 오늘이었다.
촬영장에 모인 사람들이 싱숭생숭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미친 듯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끝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아쉬워하는 건 신휘민이었다.
“너무 짧지 않나.”
그가 입맛을 다시며 하는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뭔가 폭풍같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강이든을 만나고, 스터디를 결성하고, 그리고….
“뭐야. 두 사람 왜 처져 있어?”
발랄한 목소리가 툭 끼어들었다.
“좋은 날인데 웃어야지. 휘민 씨도요. 이제 재밌는 작품 쏟아질 텐데요.”
처음부터 너무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신휘민은 알게 모르게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다음에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을.
그답지 않은 태도였다.
“…그러네요.”
신휘민이 진심으로 웃었다.
약한 생각을 했다는 게 어이없었다. 잘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당연히 잘해야 하는 건데. 신휘민의 입매가 비틀리며 올라갔다.
“우리, 이제 확실히 해야죠. 이거 끝나고도 이어지는 건가요?”
서지민이 네 사람이 질질 미뤄두었던 주제를 꺼냈다. 확실히 마지막 촬영 날이니 결론을 내릴 때가 되었다. 신휘민이 입술을 얕게 핥았다.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계속해요.”
세 사람이 의외란 눈으로 신휘민을 보았다. 그가 자기주장이 약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생각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끝나긴 아쉽잖아요.”
신휘민이 상큼하게 웃었다.
아직 이들에게서 빼먹을 걸 다 빼먹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이도현, 강이든, 서지민이라면 친분을 쌓아 놓을 가치가 충분한 이들이었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내린 결론이었다. 사감 따위는 없었다.
그런 신휘민을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보던 매니저가 미적지근한 눈을 했다.
‘그 반의반의 반만큼만 생기 있는 눈으로 멤버들을 대해줘라, 좀.’
물론 닿지 않을 바람이었다.
“전 찬성!”
서지민이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도현은 시선을 돌려 강이든을 올려다보았다. 강이든은 도현에게 선택권을 맡기듯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도현은 잠시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학교에서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했지만….
그래도 여기에 있었다.
“저도 좋아요.”
새로운 인연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