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48)화 (349/582)

제348화. 종영, 그리고 (3)

물론 도현은 기사가 올라오기 이전에 일정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미국에서도 소식이 퍼졌는지 자고 일어나 보니까 문자가 쌓여 있었다.

문자의 개수로 따지자면 할리가 압도적이었고 길이로 따지자면 영찬이 제일 길었다. 덕심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구구절절한 메시지는 거의 감상문에 가까웠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 걸 보니 이번에 미국에 가게 되면 사인이나 좀 받아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마리아 작가님한테 받으면 되려나….

감상문은 나중에 읽고 답해주기로 하고 도현은 다음 메시지로 넘어갔다.

[니콜라스 가비 : 너 그럼 그때 여기 와?]

기대감이 어린 문자가 눈에 띄었다. 도현은 손가락을 톡톡 움직였다.

[늦어도 9월부터는 그쪽에 가 있을 거 같아.]

개봉은 9월이지만, 홍보 일정을 소화하려면 조금 더 일찍 도착해야 했다. 때마침 여름 방학과 이어져 있어서 도현과 이장혁, 서혜나는 여름 방학에 샌디에이고 있는 집으로 가든지 아니면 여행을 가든지 하기로 의견을 모은 참이었다.

사실 별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는다면 여행 후 샌디에이고로 갈 가능성이 컸다. 마리아와 티타임을 가지면서 도현은 종종 그녀의 고향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서혜나가 프랑스 릴에 가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간다고 해도 9월부터는 미국에서 머무를 예정이었다. 니콜라스는 답장이 늦는 편이라 도현은 다음 메시지들을 확인한 후 핸드폰을 껐다.

영화 일정도 중요하긴 하지만 아직은 몇 달 뒤의 이야기였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학교에 가야 한다는 것.

드라마 촬영이 끝나고 스케줄을 닥치는 대로 잡았다. 놀라운 건 그를 찾는 곳이 많아서 그렇게 일정을 소화해도 일이 계속해서 밀려든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도현은 촬영 이후 이 주 동안 CF, 잡지, 화보, 홍보 행사, 캠페인… 굉장히 바쁘게 살았다.

그러면서 다시금 신휘민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현이야, 바쁘긴 하지만 스스로 일정을 조절해서 잡은 거였다. 적어도 건강에 해가 가지는 않을 선이란 소리였다.

그러나 신휘민의 활동기를 들어보면 기가 질릴 정도였다. 새벽에 들어와서 새벽에 나가고, 하루 세 시간 잘 때도 있고… 시차 적응할 시간도 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고.

…그럼 나도 좀 더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도현아.”

“네?”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던 도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서혜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도현도 정신을 차리고 몸을 바로 했다. 그러자 서혜나가 결심한 듯 말했다.

“스케줄, 이번에 잡은 걸 마지막으로 하자.”

“네?”

“더는 안 돼.”

그녀의 선언에 도현은 뜨끔했다.

“학교 가자, 아들.”

“…….”

이렇게 단호한 엄마는 처음 보았다. 도현은 무어라 반항해 보려다가 결국 입을 닫았다. 사실 부모님이 많이 참아주고 있는 건 알고 있었다. 모른 척했던 거지.

“…아니면, 학교가 싫어?”

그 순간 도현은 떨리는 눈빛을 보았다.

아.

문득, 이 상황이 엄마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깨달았다. 샌디에이고에서는 촬영 중에도 학교를 그리워하던 애가 한국에 와서는 학교에 가기 싫어서 기를 쓴다. 도현이 한국에 온 이유가 두 사람 때문인 걸 알고 있는 그녀가 보기에 이 상황은….

“그런 건 아니에요.”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다들 저한테 친절해요. 학교에서 듣는 수업도 흥미롭고요. 그냥… 한번 이것저것 해보고 싶었어요.”

“그래?”

“네.”

아무래도 더 억지 부리기는 어려운 모양이었다. 사실 이 정도면 나름 오래 버틴 편이긴 했다.

계속 이 상황을 유지할 수 없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정말 피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기보단 그냥 일탈에 가까웠다.

저도 모르게 쌓인 스트레스가 이런 식으로 표출된 모양이었다. 덕분에 도현은 자신이 꽤 충동적인 성격이란 걸 새로이 깨달았다.

결국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며 순순히 답했다.

“학교 갈게요.”

거진 한 달 만의 등교였다.

* * *

“도현아!”

“완전 오랜만이다! 학교 그만둔 줄 알았잖아, 너무 안 와서!”

“그동안 뭐 했어? 왜 안 나왔어?”

학교에 오자마자 아이들에게 휩싸였다. 드라마 방영 중에도 인기가 장난 아니었는데, 드라마가 성공적으로 종영한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일정 때문에 바빴어.”

대답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이 튀어나왔다.

“나 어제 광고 나온 거 봤어!”

“광고… 로하이?”

강이든이랑 찍은 정수기 CF가 어제 공개되었다. 도현은 잠깐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어제 공개된 게 조선시대 편이었던가.’

한복을 입고 숲을 거닐던 강이든은 목이 말라 호숫가로 향한다. 속이 비칠 만큼 투명한 호수에서 물을 떠 마실 것처럼 굴다가 호수 옆에 세워진 정수기에 물을 받아 마신다.

동시에 강이든 목소리의 나레이션이 나왔다.

- 깊은 숲속 청정수보다 더 깨끗하게 살균한 물.

어느새 나뭇가지 위로 올라간 강이든이 기둥에 기대어 앉은 모양새로 물을 마셨다.

- 믿고 마실 수 있으니까, 로하이.

귀를 쫑긋거리던 다람쥐가 정수기로 향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CF가 끝이 났다. 그 CF는 구미호뎐 드라마 팬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었다.

“응! 네 건 언제 나와?”

조선시대 편과 현대 편은 시간차를 두고 공개될 예정이라 아직 도현이 찍은 현대 편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 나올 거야.”

“헐, 대박. 개떨림.”

내 광고인데 왜 떨린다는 걸까.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우르르 몰려 있는 아이들을 보고 상황을 파악한 송하나가 교탁을 두들겼다.

“다들 자리에 앉아! 도현이 괴롭히지 말고.”

“에이~ 쌤! 저희가 언제 괴롭혔어요!”

“가뜩이나 피곤할 애한테 우르르 몰려가서 그러면 괴롭히는 거지, 뭐겠어.”

“애정이죠!”

“맞아요. 애정에서 비롯된 관심이죠!”

“허이구. 그러세요.”

도현은 조금 생경한 기분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가 학교에 나오지 않은 한 달간, 아이들과 담임 선생님의 사이가 퍽 가까워진 거 같았다.

‘한 달이면… 학교에 적응하기 충분한 시간이었겠네.’

도현은 입학 후 두문불출하며 등교하는 날이 손에 꼽았지만, 다른 아이들은 달랐을 것이다. 어쩐지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도현이, 잘 지냈어?”

“네.”

“그래. 뭐 궁금한 거나 힘든 거 있으면 선생님 찾아오고.”

“알겠습니다.”

“맞아. 반 청소는 돌아가면서 당번이 하는데 이따가 반장한테 물어봐.”

“반장이요?”

누가 반장인지 몰라서 그렇게 되물었을 때였다. 옆에 있던 한설아가 도현의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도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한설아가 약간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반장이야.”

“…아.”

“부반장은 서일준.”

한설아가 덧붙인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톡방에 자주 들어가지는 않아서 잘은 모르지만, 서일준이 반의 분위기 메이커인 건 대충 알고 있었다. 가장 시끄러운 애였으니까.

걔가 부반장이었구나.

“오늘도 수업 잘 듣고. 수업 시간에 떠들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특히 서일준!”

“아, 쌤! 왜 저만 가지고 그래요!”

“네가 제일 문제니까 그러지.”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부반장이란 놈이 하여튼 믿음이 안 가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담임 선생님은 몇 차례 잔소리를 더 늘어놓은 후 자리를 떴다. 조례가 끝났음을 알리는 시간보다 상당히 이른 퇴장이었는데 도현은 금방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짧은 사이에 도현이 등교한 사실이 퍼졌는지 종이 치자마자 복도는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이다.

‘약간 데자뷔가 느껴지네.’

입학식 날도 이랬던 거 같은데.

그 뒤로 며칠간 조금 잠잠해지는 듯하더니, 도현이 등교를 안 하는 동안 리셋된 모양이었다.

“그, 당번 말이야.”

“아, 응.”

한설아는 한 달 만에 본 짝이 조금 어색한 모양이었다. 조금은 부자연스러운 투로 말했다.

“일주일마다 돌아가면서 하는 건데 이번 주가 네 차례거든. 네가 이번 주에도 안 나올 줄 알고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음, 네가 등교를 했네.”

왜 눈치를 보지.

반 아이들이 다 하는 거라면 도현도 당연히 해야 하는 거였다. 근데 한설아는 필요 이상으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 좀 이방인인 건가. 도현은 덤덤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뭐 하면 되는데?”

“당번은 분리수거 하는 거야. 어, 그리고 아침에 창문 열고 환기하는 것도 당번 일이고. 그냥 등교하면 창문 열었다가 일 교시 시작하기 전에 닫으면 돼.”

도현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내가 분리수거 장소를 몰라서….”

“아, 괜찮아! 오늘은 나랑 같이하자. 내가 알려줄게. 그리고 분리수거는 쓰레기봉투가 꽉 찼을 때만 하면 돼.”

“그래도 괜찮겠어?”

“별일 아닌데, 뭐. 그거 말고도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맞다, 너 연기과지?”

“응.”

“오전에는 합동 수업인데 월, 수, 금 오후에는 과별로 수업 들어서 이동해야 해. 네 이동 반 어딘지 알아?”

“아니.”

가연 예중은 크게 음악과, 미술과, 무용과, 연기과로 나뉘었는데 네 개의 과별로 반을 나누지 않고 모든 과를 섞어서 수업을 듣게 했다.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학풍 때문이었다.

덕분에 반에 있다 보면 온갖 악기 연주 소리와 물감 냄새,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아이들, 그리고 상황극을 펼치며 노는 아이들까지 볼 수 있었다. 창의성은 모르겠지만 다채로운 난장판인 건 확실했다.

한설아의 설명에 따르면 입학 이 주 후부터 이동 수업을 실시한 모양이었다. 그때 도현은 학교에 안 나오거나 나와도 오전 수업만 듣고 가서 알 수가 없었던 거고.

“연기과는 A, B반으로 나뉘는데 너는 나랑 같은 A반이야. 나도 연기과거든. 이동할 때 같이 가자.”

어색한 것과는 별개로 한설아는 반장으로서 그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거 같았다. 도현으로서는 나쁠 건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근데 우리 반에….”

“도현쓰!! 보고 싶었잖아!”

와락! 뒤에서 덮쳐 온 서일준에 도현의 몸이 한순간 앞으로 쏠렸다.

“이거 봐봐. 너 없는 동안….”

서일준이 핸드폰을 들이밀며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했다. 도현은 한설아의 말이 끊긴 게 마음에 걸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한설아가 별거 아니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들으면 되겠지.

도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가볍게 넘겼다.

* * *

내가 왜 그랬을까.

문 앞에 우뚝 멈춰 선 도현이 심호흡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낯을 가장한 채로 옆에 서 있는 한설아를 돌아보았다.

“너 아침에 나한테 하려던 말.”

“아, 그거? 안 까먹고 있었어?”

한설아가 반 안쪽을 향해 눈짓했다. 그리고 태연히 말했다.

“별거 아냐. 우리 반에 정희운도 있다고.”

그거 별거야.

도현은 차마 속마음을 내뱉지 못하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울 수는 없으니 그냥 웃는 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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