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49)화 (350/582)

제349화. 종영, 그리고 (4)

진정하자. 

‘어차피 예상했던 상황이야.’

지난 이 주가 무의미한 등교 거부는 아니었다. 솔직히 생각보다 조금, 아니 많이 빠르고 갑작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다를 건 없다.

마음의 정리를 끝마친 도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 교실 안에 발을 디뎠다. 교실은 그가 문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조용한 상태였다.

이는 연기과 아이들이 유독 도현을 어려워해서 생긴 일이었다. 단순히 도현이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배우라서가 아니었다.

갓 중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열네 살의 나이에 전공을 찾아올 만큼 꿈에 열정적인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도현은 마치 황금 사과처럼 보였다. 갖고는 싶은데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은 없는, 황금 사과.

도현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진 않더라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황금 인맥이다. 가만히 있어도 쓸모 있는데 만약 콩고물까지 떨어진다면? 그 생각에 탐을 내다가도 괜히 밉보일까 싶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나게 되는 것이다.

도현이 입학 후 정상적으로 등교했다면 그런 분위기가 정리되었을 것이다. 아직은 어린아이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유니콘처럼 가끔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면서 심리적 거리감이 더욱 멀어졌다. 

그들에게 도현은 ‘이도현’이 아니라 ‘배우 이도현’이었다.

그 사실까지는 모르는 도현은 천적을 발견한 쥐처럼 조용해지는 교실에 잠깐 고민했다. 

혹시 나 환영받지 못하는 건가.

“네 자리는 저기야.”

“아, 알려줘서 고마워.”

자리까지 안내해준 한설아가 홀가분한 얼굴로 자신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도현의 시선이 그런 한설아에게 머물렀다.

‘독특한 애네.’

솔직히 말하자면, 도현도 알았다. 

아이들이 제게 말을 걸고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 난 걸. 그렇게 브로콜리 같은 눈들로 쳐다보는데 모르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첫날부터 한설아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도현을 반기기보단 꺼리는 기색이었다. 나름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는 원래 남의 기분을 잘 파악했다.

뭐, 그다음에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어느 정도 납득하긴 했다. 그녀에게 종종 주곤 하는 군것질거리는 나름대로 사과의 의미였다.

그녀에게 시선을 떼려던 도현은 한설아가 어딘가를 흘깃거린단 사실을 알아챘다. 도현이 애써 외면하던 위치였다. 그녀는 자신이 흘깃거리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하.”

그런 거구나.

깨닫고 나니 약간의 내적 친밀감까지 생겼다. 상대가 꺼림칙한 건 둘째 치고 어디 사는 누군가가 생각난 탓이었다. 옆에 진만 있으면 정신 팔려서 도현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누군가 말이다.

도현이 자리에 앉자 옆자리 애의 어깨가 움찔 튀었다. 그가 놀라지 않게 느릿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어, 어. 안녕!”

“한동안 등교를 못 해서 이동 수업은 처음 듣네. 이도현이야.”

“어어, 반갑다. 난 선민우야.”

“이동 수업에서는 뭘 배워?”

과하게 긴장한 거 같은 짝의 분위기를 풀어줄 겸, 학교생활에 적응도 할 겸 물어보았다. 대답하기 쉬운 질문이 나오자 그가 조금 풀린 낯으로 대답했다.

“오늘은 연기 이론이랑 발성 기초야. 교과서는 가져왔어?”

“응. 이거 맞아?”

“가져왔네. 잠깐 봐봐. 진도는 여기까지 나갔는데….”

도현이 눈을 깜빡이다 말했다.

“꽤 많이 나갔네.”

“…내가 필기 보여줄까?”

“그래도 괜찮아?”

“겨우 필기 가지고 뭐. 옆자리잖아.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그는 도현에게 베풀 기회가 온 게 퍽 반가운 모양이었다. 두 눈이 기대감에 차 있었다. 도현은 화답하듯이 눈매를 휘며 웃었다.

“고마워.”

어쩐지 주변이 좀 조용해졌다. 눈이 부신 듯 눈매를 찡그리던 선민우가 갑자기 어깨를 늘어트렸다.

“왜 그래?”

“아니. 진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하나 해서….”

갑자기?

앞자리에 앉아 있던 애가 동질감을 느끼는 표정으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선민우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의 콩트를 보던 도현은 뭐라 말하려다 말았다.

두둥, 둥!

이번에 녹음한 건 밴드부인 모양이었다. 교실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드럼 소리가 경쾌하게도 울렸다. 선민우가 그에 아는 척을 하며 말했다.

“너도 드럼 잘 쳤지?”

“조금 배운 게 다야.”

“영화에서 네가 직접 연주한 거 아냐?”

“맞긴 한데… 그 한 곡만 제대로 할 줄 알거든.”

그 후로 드럼 스틱을 잡지 않기도 했고. 도현은 ‘그런 적도 있었지’ 하는 기분으로 대답했다.

“아깝다. 드럼 치는 거 멋있던데.”

“맞아. 너 영화에서 막 막대 던졌다가 받고 그랬잖아. 그것도 연습해서 한 거야?”

끼어들 타이밍만을 노리고 있던 앞자리 아이가 불쑥 말을 걸었다. 선민우도 궁금했는지 도현을 쳐다봤다.

딱히 비밀은 아니라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응. 근데 그거 애드리브였어.”

“뭐? 진짜?”

“헐. 애드리브?”

아까부터 생각했는데 반응이 조금 재밌다. 연기과라 그런지 리액션이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뭐가 애드리븐데?”

주변에 앉아 있던 아이 하나가 호기심을 보였다. 곧 앞자리 아이는 자신의 무용담이라도 된 것처럼 방금 해준 이야기를 알려주었다.

어쩐지 애들이 너무 흥미로워하는 탓에 도현은 그 애드리브의 기원-방랑자에서 나이프를 던졌다 받았던 것에서 착안했다는-을 설명해주는 것부터 볼펜으로 시범을 보여주는 것까지 하게 됐다. 던졌다가 받을 때마다 너무 좋아해서 내가 지금 물건을 던졌다 받는 게 아니라 사라지게 하는 마술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아, 난 안 돼!”

“나도 안 되네.”

“우앗, 나 방금 성공함! 대박!”

도현은 볼펜 던졌다 받기 열풍이 분 교실을 흐린 눈으로 보았다. 그걸 굳이 그렇게… 아니, 너희가 즐거우면 됐지. 그래.

신경 쓰이는 건 그게 아니었다.

‘쟤는 왜 또 저걸….’

이를 악물고 외면한 상대가 해맑게 연필을 던졌다 받고 있었다. 그 와중에 손재주가 없는지 던지는 족족 놓친다. 떨어트려 놓고도 좋다고 웃는 걸 보니 속이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더 보고 있다간 신경 줄이 닳을 거 같아서 시선을 뗐다. 이럴 땐 그의 직업이 배우인 게, 그의 재능이 연기인 게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그가 드러내길 원하지 않으면 누구도 속마음을 볼 수 없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건 제일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럴 텐데.

“저….”

“…….”

“저기.”

도현은 느릿하게, 정말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어색한 듯 눈을 굴리는 소년이 책상 앞에 서 있었다.

“어, 안녕. 두 번째지?”

“…….”

“기, 기억 안 나나? 저번에 교무실에서….”

“…….”

“난 정희운이야. 그, 너처럼 유명하진 않지만 배우인데….”

“이도현, 이야.”

가벼운 대답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은지 어린 얼굴이 활짝 펴졌다. 아이들은 어느새 두 유명인의 만남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하는 중이었다.

최악이다. 가장 피하고 싶은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둘뿐인 상황이라면 적당히 무시할 텐데 이쪽을 보는 시선이 많았다. 도현은 얼굴을 구기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했다.

“할 말이라도 있어?”

표정 관리에 힘쓰느라 말투가 조금 차갑게 나갔다. 정희운의 갈색 눈동자에 당혹이 감돌았다.

“아니. 그냥….”

도현의 시선이 꼼지락거리는 손에 닿았다. 손에는 연필이 쥐어져 있었다. 아까 던지고 놀던 연필이었다. 시선을 눈치챈 희운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잘 안 돼서 방법이라도 있나 하고.”

“…그래?”

겨우 그거.

그게 궁금해서.

“하.”

황당함에 한숨이 나왔다. 도현은 지긋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최선을 다해서 피하는데 눈치 없이 굴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나를 찾은 이유가 너무… 별거 아니라서. 그래서 속이 울렁거렸다. 

네 얼굴 한번 보고 싶어도 싫어할까 봐 참았어. 반기지 않는 걸 아니 이름을 지워서 선물을 보냈어. 그러다가 적막에 익사할 거 같을 때 그 집을 찾았어. 어차피 아무도 환영하지 않는 걸 알면서도 그곳으로 향했던 건….

머릿속에서 기억이 엉켰다. 강렬하게 몰아치는 심상에 순간적으로 어지러움이 밀려들었다. 도현은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아니야.

나는 형이 아니야.

“딱히, 그런 건 없어. 그냥 연습하면 돼.”

검은 눈동자가 평정을 되찾았다.

형의 기억과 경험을 물려받았다는 게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얼마나 영향을 받았든지 도현은 도현이었다.

그래서 나는 도무지 너를 좋아할 수가 없다. 

형이 너를 얼마나 아꼈건. 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건 간에. …그래. 도현은 순순히 제 마음을 인정했다.

나는 그냥 네가 싫어.

“볼일은 그게 끝이야?”

그래서 개나리를 닮은 영혼이 크게 요동치는 걸 보면서도 모른 척했다. 그게 도현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야. 자리로 돌아가라. 쌤 오신다.”

툭 끼어든 목소리는 선민우였다. 도현은 그의 눈이 꽤 예리하게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선생님이 조금 늦었지? 자, 자. 수업 시작하자.”

제대로 된 첫 연기 수업이었다. 기대했던 게 무색하게도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중이 안 돼서 괜히 교과서만 노려보았다.

“-아?”

“야, 야.”

옆에서 툭 치는 감각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선생님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첫 수업부터 딴생각이야?”

선생님의 말에 아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딱히 비웃는 건 아니고 그냥 웃긴 모양이었다. 도현은 곧장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중학생답지 않은 깔끔하고 정중한 사과였다. 그에 선생님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 화난 건 아니시구나.

“딴짓한 건 한 거니까. 음… 그래. 나와서 연기 시범 한번 보여줄래?”

“네?”

“이론 시간이라고 이론만 주구장창 배우면 재미없잖아. 애들아, 그렇지?”

“네!”

“선생님 최고!”

이도현의 연기라니! 아이들이 눈을 반짝반짝하게 빛내며 긍정했다.

그들이라고 왜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뜬금없이 ‘연기해보면 안 돼?’라고 묻기엔 상대의 허들이 너무 높아 보여서 문제였을 뿐이다.

도현은 기대감 가득한 시선을 느끼고 눈을 깜빡이다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환호가 쏟아졌다.

“오오오오!”

아직 무언가 하지도 않았는데 환호가 과했다. 선생님이 손짓한 대로 교탁 옆에 선 도현이 그를 쳐다보았다. 일단 나오래서 나오긴 했는데 뭘 시킬 거냐는 뜻이었다.

“음… 패스파인더 연기 가능해?”

“그건 스포일러라서 안 돼요.”

그도 한번 물어본 것뿐인지 곧장 수긍했다. 아쉬움의 목소리는 아이들 쪽에서 나왔다.

“그럼….”

“여우야! 여우야요!”

번쩍 손을 들고 외친 여자아이에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야 연기 한번 해줄 수 있어?”

“장면은….”

“티저! 티저!”

예고편 말하는 건가.

지금 그냥 하면 되는 건가 싶어서 선생님을 다시금 쳐다보자 그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반을 쭉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어디선가 멈췄다.

“희운이 나와 봐.”

갈색 눈동자가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네에? 저요?”

“그래. 희운이가 상대역 하자.”

“쌤! 대박!”

“와아아아!”

박수 치고 난리 났다.

“저는 왜….”

“에이, 빼지 말자. 정희운!”

“나가라! 나가라!”

아이들의 부추김에 못 이겨 정희운이 앞으로 나왔다. 그가 주춤대며 옆에 다가오자 도현은 정말, 진심으로 피곤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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