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0화. 종영, 그리고 (5)
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정희운은 고동색에 가까웠던 형의 눈 색과 비교해서 조금 더 밝았고, 조금 더 붉은 기가 돌았다.
연기를 하려면 눈을 마주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것을 핑계 삼아 도현은 처음으로 소년을 하나씩 뜯어보았다.
형은 따지자면 차갑게 생긴 편이었다. 도현처럼 흰 피부나 날카로운 이목구비에서 오는 차가움이 아니라, 어딘가 엄격한 차가움이었다. 실없이 웃고 있어도 그건 감춰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그런 형을 보고 다가가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건 꽤 정확한 표현이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날카로운 태연함과 허상 같은 가벼움을 두른 거니까. 저나 형이나. 그들의 차가움의 기저엔 오래된 방어기제가 존재했다.
그러나 눈앞의 존재는….
활짝.
시선이 닿자 크고 동그란 눈매가 휘었다. 혈색 좋은 피부는 사랑스러운 인상을 돋보이게 했다. 웃는 상인 입꼬리가 올라가자 왼쪽 볼에 보조개가 파였다.
종합해 보자면, 무해했다.
그리고.
“하나도 안 닮았네.”
“응?”
“아니야.”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형은 입양아였다. 정희운과 유전적으로 비슷한 요소가 있는 게 더 이상했다. 그 얼굴에서 형의 흔적을 찾으려고 한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졌다.
형은 차라리 도현과 더 닮아 있었다. 정희운이 아니라. 도현은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었다. 아까부터 바닥을 치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이 기분이라면 연기할 수 있을 거 같다. 그 상대가 정희운이라고 해도 말이다.
도현은 어느 지점에서 시작하면 좋을지 생각했다. 예고편 시작 부분부터 하면 상대역의 대사가 없었다.
선생님이 그걸 알고 정희운을 불렀는지 아닌지는 몰랐다.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더미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배우 활동을 하는 두 명을 붙여놓고 싶을 뿐인지도 몰랐다. 뭐든 상관없었다. 도현은 도현이 할 일을 하면 되니까.
그래, 그쯤이 좋겠다.
고요하던 얼굴에 표정이 걸렸다. 능청스러운 낯을 한 도현이 입을 열었다. 묘한 음성이었다.
“한낱 미물도 은원은 알거늘. 나라고 은인을 이리 대접하고 싶을 리가.”
아무것도 없는 교탁 앞이었다.
세트장도, 카메라도, 그럴듯한 복식 같은 것도 없었다. 그냥 평범한 교실이었다.
그런데도 무언가 다르다.
“허나.”
도현이 희운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안타깝다는 듯이 말이다.
아이들은 점차 깨달았다. 달라진 게 무엇인지. 저 앞에 선 소년이 오직 자신의 존재감만으로 모든 부자연스럽고 어색한 것들을 가리고 저에게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은인께서 불쌍한 아이를 두고 가겠다니 어쩔 도리가 있나.”
주어진 대본 같은 건 없었다. 희운이 드라마를 봤을지 아닌지도 몰랐다. 봤다고 해도 이 장면의 대사를 기억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것도 아무래도 좋다.
틀린 대사를 치더라도 도현은 이어갈 자신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포기한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었다. 얼굴을 마주 보고 연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말이다.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어. 그대가 내게 신기만 충분히 나눠준다면 내보내 줄 테니까.”
어떻게 할래?
그런 생각을 담아 상대를 쳐다보았다.
* * *
예고 없이 시작한 연기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연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연기 상대 때문인지도 몰랐다.
교무실에서 마주쳤던 날.
그날 이후로 희운은 짧았던 대화를 여러 번 곱씹어 보았다. 곱씹고 곱씹을수록 어떠한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혹시 나를… 싫어하나?’
그리고 금방 고개를 저었다.
‘날 언제 봤다고 싫어하겠어!’
희운은 자신의 소심한 면모를 알았다. 또 소심한 성격이 지레 겁을 먹고 헛생각을 하는 게 분명했다.
분명한데….
- 볼일은 그게 끝이야?
덜컥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 착각이 아니었어?
정말로 나를 싫어해?
왜냐고 묻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 현실이 된 기이한 느낌이었다.
이상했다. 세상 모두가 날 싫어해도 너만큼은 날 싫어할 리가 없는데. 진리처럼 느껴졌던 명제가 흔들리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어깨를 붙잡고 묻고 싶었지만, 피곤이 내려앉은 얼굴에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사실 그건 핑계고 겁이 났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선생님의 부름에 앞에 서면서도 무서웠다. 싫다고 하면 어쩌지. 나랑 연기하기 싫은 티를 내면….
그러나 소년은 희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리고 갑작스레, 정말 갑작스레 연기를 시작했다.
불친절함을 넘어 막무가내이기까지 한 시작이었다.
어떡하지.
안 그래도 혼잡했던 머릿속이 엉망이 되었다. 제대로 사고가 회전하는 것 같지 않았다. 희운은 그대로 물러서려고 했다. 한 발자국 물러나서.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하려고 했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희운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조용했다. 희운은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물러나고 싶지 않아.
어디선가 들린 목소리는 아마도, 자신의 것이리라.
희운은 서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지러졌던 세상이 다시 멀쩡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놀라웠다.
이 정도구나.
내가 닿고 싶었던 사람이 저렇게 높게 있는 거구나.
좌절할 법한데도 희운은 오히려 심장이 바삐 뛰었다. 몇 년 전. TV에서 본 것만으로도 목표가 되어 버린 존재였다. 그 짧은 순간만으로도 희운의 영혼을 사로잡은 존재였다.
닿고 싶다.
나도 따라가고 싶어.
그런 욕심과 바람을 담아 홀린 듯이 입을 열었다. 수도 없이 반복해서 본 대사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 * *
“나, 난 평범한… 아니, 그래.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 그럼 그거! 신기 주는 거. 그거 얼마나 걸리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개인적으로는 후자가 좋았다. 아무리 연기는 상대를 가리지도, 그래서도 안 된다지만. 이 상황이 유쾌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런데 희운의 선택은 둘 다 아니었다. 연기의 어색함이나 어설픔은 둘째 치고….
“…대략, 십 년 정도?”
대사를 알고 있다고?
“아, 은인께서는 신기가 이상하게 넘치시니 그보단 적게 걸릴 수 있겠군.”
“그, 그러면?”
“칠 년이면 되려나?”
“나보고 여기서 칠 년이나 있으라고?”
도현처럼 한 번 본 것을 대부분 기억하는 기억력을 가진 건 아닐 터다. 형의 기억 속 정희운은 평범한 어린애였으니까. 딱히 특출나게 머리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굶어 죽을 걱정은 안 해도 좋아. 내 먹을 것은 잘 챙겨줄 터이니. 설마하니 은인을 굶기겠어?”
“은인이라며! 은인을 무슨 우리에 가둬 키우는 돼지처럼 취급해?”
그런데 토씨 하나 안 틀린다.
그래. 양보해서 대사를 다 알고 있는 건 그렇다고 치자. 드라마의 팬일 수도 있으니까. 정희운이 그가 나오는 드라마의 팬이란 게 기묘하다는 사실은 잠깐 미뤄 두고 도현은 생각했다.
정말 거슬리는 건 그런 사소한 게 아니었다.
저 눈빛.
어떻게든 아득바득 따라붙고 싶어 하는 저 눈빛. 어쩐지 맥을 떠오르게 하는 눈빛을 왜 네가 하고 있을까.
도현은 희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게 연기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는지 희운이 어깨를 움찔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희운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도현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다음 대사를 입에 올렸다.
“오백 년이라.”
구 년.
형의 기억 속 정희운은 구 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정희운은 만화 영화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아이였다.
문득 의문이 일었다.
그 구 년간 무슨 일이 있었길래 뜬금없이 연기를 시작해서 배우가 되고, 지금 내 앞에 서 있을까. 이게 정말 우연일까.
“오랜 시간이 지나긴 했구나. 그대가 거짓을 입에 담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하지만, 그래.
“요괴가 왜 요괴인지 아느냐?”
이렇게 마주하니까 알겠다.
어깨를 툭 치자 정희운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연기가 아니라 진짜로 놀란 거 같았다.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나 다름없는 장면에 아이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몰래 핸드폰을 꺼내든 아이도 있었다.
선생님이 그 아이를 제지하며 작은 소란이 일었지만, 도현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그 태생이 저주이기 때문이지.”
마주하고, 스스로를 내려 두고 여우야라는 탈을 한 겹 뒤집어쓴 채 그 뒤에서 너를 보니까 확신이 선다.
인정한다. 네가 한 행동을 용서하지 못하는 척하고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그냥 네가 싫었다. 그 싫음의 기원을 파고들어 가면… 그래. 부러움에서부터 기인할 것이다.
정희운은 도현의 결핍을 자극한다.
너에겐 주어졌지만 나는 갖지 못한 것을 의식하다가 끝내 스스로를 탓하게 만든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채우지 못한 마음속 한 공간. 끝내 버리지 못한 미련. 한 자락의 아쉬움. 그리움. 그걸 차지한 네가 부럽다. 싫다. 그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불쾌하다. 그 불쾌감은 또다시 너에게로 향한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니까 이리도 선명하게 보인다.
‘어쩌면 이미 한 번 대차게 겪어봤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자신감과 확신에 찬 푸른색 눈동자가 환영처럼 보였다가 이지러졌다.
도현은 몇 번이고 했던 질문을 또다시 던졌다.
잘 지내야 하는가?
아까 그녀를 떠올린 탓인가. 답을 내기 전에 한 기억이 떠올랐다. 잘 지내보려고 했지만 샐러리와 감자튀김으로 끝나버린 관계. 차라리 처음부터 도현이 제 감정을 인정했으면 그런 식으로 멸망하지는 않았을 관계 말이다.
그리고… 아마 눈앞의 소년과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겠지.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도현은 오래 고민했다. 아주 오래, 성실하게.
등교 거부까지 해가며.
‘이전이라면.’
적어도 니콜라스가 전학을 가기 전이라면 잘 지내보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현은 몇 년간의 부질없는 시도 끝에 실패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간을 무의미하다고 치부할 수 있나?
그건 아니다.
적어도 감정이란 게 이성의 명령을 따르는 종류가 아니란 걸 깨닫기엔 충분한 시간이었거든.
도현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걸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거야말로 비이성적인 멍청한 짓이니까.
“그러니 선택하거라.”
그래서 선택했다.
도현은 희운을 똑바로 직시했다.
상대의 눈을 피하려고 노력하지도 애쓰지도 않았다. 그저 어느 정도 탐탁지 않음과 적당한 체념과 후련함을 담아 응시했다.
“나와 이곳에서 칠 년을 보낼지. 함께 갈지.”
나는 네가 싫다.
하지만 신경 쓰인다.
“그도 아니라면….”
그러니 너를 끊어내려고 노력하지도 좋아하려고 애쓰지도 않을래.
이게 정답인지는 모른다. 애초에 정답이란 게 존재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린다. 그리고 결정했다면 받아들이는 거다.
지난하게 그를 괴롭혔던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린 도현이 진심으로 웃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