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51)화 (352/582)

제351화. 종영, 그리고 (6)

조금 쌀쌀한데 하늘은 푸르렀다.

차는 도시를 벗어나 이제 시골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창문을 열자 시골 특유의 맑은 공기가 느껴졌다. 도현은 멍하니 하늘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보았다.

“시골에 와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처음이에요.”

대답하던 도현이 멈칫했다.

“드라마 촬영 때 가본 적은 있네요. 개인적으로는 없어요. 매니저님은요?”

매니저님, 매니저 형. 도현은 경찬호와 조금 친해진 뒤로 입에 달라붙는 대로 부르는 편이었다.

경찬호도 그런 도현이 편해졌는지 기본적으로 존댓말을 하다가도 가끔가다 반말을 섞어 썼다. 호칭도 배우님, 도현아, 뒤죽박죽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그 뒤죽박죽인 호칭과 말투가 쭉 이어지는 중이었다.

“전 고향이 시골이라서 익숙합니다.”

벌써 세 시간째 이동 중이었다. 도현은 심심함도 죽일 겸 매니저와 스몰토크를 시전했다.

“그렇구나…. 그럼 부모님은 시골에 계시는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가끔 내려가요.”

가만히 대답하던 경찬호가 반대로 물었다.

“배우님은 부모님 두 분 다 도시 출신인가요?”

“어… 아마도요?”

애매한 대답에 경찬호가 흘깃 시선을 보내자, 도현이 작게 웃었다.

“사실 몰라요. 그런 이야기는 잘 안 해서.”

“그렇군요.”

부모님과 좀 더 친근한 대화를 나눠보라거나, 그런 말을 할 법한데도 경찬호는 수긍했다. 짤막하게 이어지던 대화가 끊기자 도현은 열린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모르네.

도현은 한국에 온 뒤로 부모님 말고 혈연으로 엮인 다른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었는데, 사실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미약하게 일었던 호기심은 곧 수그러들었다. 알아야 할 일이라면 알려주겠지. 말하지 않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도현은 자신이 이런저런 비밀이 많다 보니까 남들의 비밀에 관대한 편이었다.

“긴장돼요?”

침묵하고 있자 긴장한 줄 안 모양이었다. 경찬호의 질문에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한 번 해 봐서 그런가… 긴장은 안 돼요. 저만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 도현은 예능 <도시 밖 스타>에 출연하기 위해서 강원도에 있는 한 시골 마을로 가는 중이었다. 스타를 게스트로 불러 도시 밖, 그러니까 시골에서 1박 2일이나 2박 3일간 촬영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이번 예능에는 드라마 출연진들이 초대되었다. 서지민, 신휘민, 강이든 그리도 이도현까지. 주연 배우를 모조리 섭외하기 위해서 프로그램 측에서 애를 좀 썼다는 거 같았다.

‘오랜만에 보겠네.’

스터디는 이어가기로 했지만, 문제는 네 사람이 다 나름 한 가닥씩 하는 인물이라는 거였다. 거기다가 드라마까지 너무 성공적으로 끝나버렸다. 시간을 맞추려야 맞출 수가 없었다.

도현이 시간이 나면 신휘민이 어딘가 떠나 있고 신휘민이 간신히 시간이 비면 서지민이 촬영 가고… 끝없는 굴레였다.

그래서 드라마가 끝난 이후 네 사람이 모이는 건 처음이었다. CF 촬영 때 만났던 강이든을 제외하면… 한 달 넘었나. 조금 설레는 것도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방 좁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이 보였다.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거의 다 도착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다지 익숙하지는 않은 풍경에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구경하다가, 코를 찌르는 냄새에 기겁하며 창을 닫았다. 경찬호가 드물게 웃음을 터트렸다.

“비료 냄새예요. 지독하죠?”

“그러네요….”

“촬영할 곳은 목장에서 떨어진 곳이라 냄새는 안 날 겁니다.”

“하아.”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평생 도시에서 산 도현에게는 너무 낯설고 견디기 힘든 종류의 냄새였다. 잠깐이라면 괜찮지만 머무는 내내 냄새를 맡아야 한다면….

부르르. 상상만 했는데도 기가 빨렸다. 도현은 헤레이즈만큼은 아니더라도 후각에 예민한 편이었다.

아니. 후각에 예민하다기보다는… 청결을 중요시하다 보니 냄새에도 자연히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해야 하나. 옆에 헤레이즈가 있다 보니 도드라지진 않았지만, 도현도 여러모로 청결에 예민한 편이었다.

타고난 천성이라기보단 병원에서 만들어진 습관 같은 거였다. 거긴 온통 하얘서 더러워지면 금방 티가 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더러우면 더 싫어할까 봐 그랬지.’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요소라면 무엇이든 없앴다.

불쾌한 냄새, 지저분한 습관부터 시작해서 화내고 떼쓰는 거, 귀찮게 구는 거, 게으르게 행동하는 거, 아프다고 우는소리 하는 거, 뭐든 다. 되돌아보건대 일종의 강박이었을 거다.

물론 지금은 그냥 별다른 의미 없이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전처럼 강박적으로 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달라지려고 굴지도 않았다. 그때의 소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다행이에요.”

경찬호는 ‘나 도시 출신이에요’ 느낌을 풀풀 풍기는 도현을 약간 귀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잠시 후.

“도착했다.”

촬영지에 도착했다.

“담요는 나 줘.”

도현이 매니저가 덮어줬던 담요를 걷어내자 그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담요를 넘겨준 도현이 차에서 내렸다.

같은 시골인데도 유럽과는 느낌이 다르다. 그쪽은 메르헨적인 느낌이라면 여긴 좀 소박하고 정겨웠다. 웅장한 자연이나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도현이 두리번거리며 구경하고 있자 짐을 모두 챙긴 경찬호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진 거 같아 다행이네요.”

“네?”

“한동안 조금 우울해하셨잖아요.”

알고 있었구나.

도현은 슬슬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할 거 같았다. 나 사실 표정 관리 잘 못 하나 봐. 정확히는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다기보단 뿜어나오는 분위기 탓이었지만, 스스로 알 리 없는 부분이었다.

뺨을 더듬던 손을 내린 도현이 가볍게 대답했다.

“이제 괜찮아요.”

여전히 정희운의 존재는 거슬리고 신경 쓰였다. 하지만 그 모든 감정을 인정한 것만으로도 도현은 전보다 평온해졌다.

게다가 밀어내지도, 다가가지도 않겠다는 건 결국 마음 편한 대로 행동하겠단 소리였다. 기분을 딱히 숨기지 않았더니, 제가 탐탁지 않아 하는 걸 정희운이 느낀 모양이었다. 전보다 다가오려고 하는 횟수가 현저히 줄었다.

“다행이네요. 일단 가서 인사부터 합시다.”

“네.”

터벅터벅, 흙길을 조금 걸어가자 금방 촬영장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 강이든이었다. 강이든이 도현의 시선을 느끼고 이쪽을 쳐다보자 곁에 있던 사람도 자연히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도현은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려다가 아차 했다. 미국에 있던 버릇이 나와 버렸다. 뒤늦게 어정쩡하게 멈춰 서서 고개를 숙이려는데 누군가 손을 맞잡아왔다.

“아하하! 이거 그건가? 할리우드식 인사? 반가워요. 난 김형석이에요.”

김형석. <도시 밖 스타>의 고정 멤버이자 MC였다. 다행히 도현을 안 좋게 본 거 같진 않았다.

“배우 이도현입니다. 아직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아서 가끔 이러네요. 죄송해요.”

“죄송할 게 뭐 있어! 딱딱하게 구는 것보다 훨 좋구만. 그래, 내일까지 잘 부탁해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래, 그래. 혹시 농장 일 한 적 있어요?”

“오늘 처음 와 봐요.”

“정말? 하긴, 생긴 것도 딱 도시 사람 느낌이네. 그럼 힘든 일은 여기, 이든 씨한테 다 시켜버려요. 둘이 뭐야, 한 몸 아니야. 이든 씨가 하면 도현이가 하는 거지.”

같은 배역을 맡았던 걸 뜻하는 모양 같았다. 도현은 강이든을 돌아보았다.

‘아무 생각이 없네.’

우월한 이목구비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뭔가 있어 보였지만, 도현은 알았다. 지금 저건 아무 생각 없는 거다.

“그럴게요.”

알아서 잘해봐야지. 대답과 속내가 다른 도현이었다.

한차례 인사를 나눈 후 강이든을 쳐다보았다. 그가 눈을 깜빡했다. 반갑다는 인사인 모양이었다.

“매니저님은요?”

“인사.”

여기저기 인사하러 다니는 모양이었다. 도현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스태프와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다녔다. 이상하게도 인사받는 사람마다 너무 황송해하거나 놀라서 이쪽이 더 놀라웠다.

“여어! 우리 도혀니 왔네!”

순간 시골 주민인 줄 알았다. 이미 시골에 완벽하게 적응한 서지민이 몸빼 바지를 입고 설렁설렁 손을 흔들며 걸어오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응. 아침에 와서~ 시골이라 일이 많길래 좀 거들고 왔지.”

“…촬영 전에요?”

“응! 여기, 먹을 것도 받아왔다? 옥수수 좋아해?”

그녀의 친화력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긴. 그러니까 강이든 선배님이랑도 친하게 지내겠지.’

묘하게 강이든에게 가차 없는 도현이었다. 앉을 곳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서지민이 털썩 주저앉길래 그냥 옆에 같이 앉았다. 세 사람이 옥수수 타임을 갖는데 하얀 차가 들어서는 게 보였다.

보자마자 딱 알았다.

신휘민이다.

역시나.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신휘민이었다. 편안한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걸치고 있었는데 무슨 화보 찍는 거 같았다.

도현처럼 한차례 인사 투어를 돈 신휘민이 마지막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왜 바닥에서? 딱 그런 표정이었다. 서지민이 옆자리를 팡팡 치자 흙먼지가 날렸다.

“휘민 씨도 이리 와서 앉아! 옥수수 좀 먹어.”

“아뇨… 전 먹으면 안 돼서.”

옥수수를 먹으면 안 되는 게 아니라 이쪽에 끼고 싶지 않은 거다. 자연스럽게 두어 걸음 물러난 신휘민이 감독님과 얘기 좀 하겠다며 사라졌고, 그걸 보던 서지민이 껄껄 웃었다.

“까칠한 게 매력이지~ 우리 휘민 씨는!”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저씨가 되어서 온 걸까. 도현은 조금 아연해졌다.

* * *

촬영이 시작되었다.

“오늘도 도시를 떠나온 <도시 밖 스타>!”

우와아!! 여기저기서 환호성과 박수가 쏟아졌다. MC 김형석의 멘트에 예능 고정 멤버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오늘 게스트는 누군가요?”

“아, 들으면 깜짝 놀라실걸요! 요즘 가장 핫한 분들이라서!”

“가장 핫한 분들이요? 설마….”

“네. 전 국민을 구미호 앓이로 몰아넣었던 분들이죠! <구미호뎐>의 배우분들을 모셔봅시다!”

강이든, 서지민, 신휘민, 이도현이 차례로 등장하자 촬영장이 술렁였다.

“와, 와! 대박!”

한 여성 멤버가 호들갑을 떨었다.

도현은 웃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한두 번 이런 연기를 해본 게 아닌지, 몰랐던 척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참고로 저 리액션 좋은 여성 멤버는 아까 전 도현에게 초코바까지 쥐여 주었던 사람이었다.

구미호뎐 배우진들이 가운데에 서고 그 양옆에 고정 멤버가 서 있는 구조였다. 차례로 자기소개를 한 번씩 했다. 도중에 신휘민이 버릇처럼 ‘To the top! 안녕하세요, 온탑입니다!’라고 했다가 촬영장에 웃음이 번졌다.

실수 때문에 머쓱한 척하는 신휘민에 도현은 속으로 감탄했다.

‘저거 대본인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대본이 있는 것도 신기했고 자연스럽게 호응하는 사람들도 신기했다.

“와, 너무 황금 게스트 아닌가요. 구미호뎐 배우분들이라니.”

“저 그거 두 번 정주행했어요!”

MC들이 저마다 드라마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김형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네 게스트들을 한 번씩 조명했다. 그럴 때마다 칭찬 세례가 쏟아졌다.

이번엔 도현의 차례였다.

“솔직히 이분까지 와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이도현 씨!”

“와, 저두요. 설마 실물로 볼 줄이야.”

“은지 씨도 연예인이잖아요?”

“그래도 도현 씨는 뭔가… 요정이나 그런 거 같은 느낌이잖아요!”

“맞아, 인정.”

“저도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어요. 도현 씨. 이번에 여우야 연기로 크게 화제가 되었는데… 어후, 저도 드라마 보면서 소름이 다 끼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이 질문을 빼놓을 수는 없죠. 같은 배역을 두 분이서 분담해서 했는데, 어떠셨어요?”

“재밌었어요. 같은 배역인데도 캐릭터 해석이나 표현이 서로 달라서 그거 맞추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고요. 무엇보다 선배님한테 배울 게 많아서 좋았어요.”

딱히 예능 욕심 같은 건 없던 도현은 무난한 모범 답안을 내어놓았다. 도현의 매니저도 도현을 예능에 내보내면서 그냥 편하게 하라고 했고.

그 후로도 몇 차례 잡담과 리액션이 오갔다. 대부분 대본에 적혀 있던 것들이라 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답할 수 있었다.

오프닝이 끝나자 감독이 마이크를 들었다.

“여러분, 곧 있으면 무슨 시간인지 아시죠?”

“저, 저 또….”

“밥은 좀 그냥 줍시다!”

고정 멤버로부터 아우성이 튀어나왔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점심 식사를 위해서 재료를 공수해 와야 합니다.”

야유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감독은 여유롭게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조를 나눌 거예요. 방식은 첫 미션이니까 간단하게 제비뽑기로. 두 명이 한 조, 총 네 개의 조로 나뉠 거고 각 조는 주어진 미션을 수행해서 한 시 전까지 돌아와야 합니다. 늦어지면… 밥을 늦게 먹겠죠?”

“내가 이럴 줄 알았지.”

그들의 등장에 환호했던 여성 멤버가 한탄했다. 도현은 그 멤버를 흘깃 쳐다보았다. 혹시 이래서 초코바를 준 걸까? 배고프지 말라고?

이후에 이어진 제비뽑기에서 도현이 뽑은 숫자는 2였다. 그리고 신휘민과 눈이 마주쳤다. 혹시….

“2번이에요?”

“너도?”

“네.”

도현은 신휘민과 같은 조였다.

“자! 다 뽑았으면 미션 공지하겠습니다!”

감독이 수행해야 할 미션을 차례차례 공개하기 시작했다. 1번은 낚시, 2번은 나물 채집, 3번은 마을 회관에서 재료 얻어 오기, 4번은 밭에서 재료 수확이었다.

“나물…?”

미션을 확인한 신휘민이 중얼거리다가 도현을 보았다. 너 나물 구분할 줄 알아? 그의 질문에 도현이 뭘 묻냐는 듯한 표정을 돌려주었다.

“알 거 같아요?”

“하하, 망했네.”

그들의 미션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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