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3화. 종영, 그리고 (8)
낚시에 실패해서 비록 상에 고기반찬은 없었지만, 4조가 가져온 채소와 2조의 냉이, 3조의 부재료를 합쳐 냉이된장국을 만들어 먹을 수 있었다.
도현은 나이가 어린 탓에 이런저런 일에서 자연히 제외되었다. 그들이 요리하는 동안 도현이 한 일이라곤 재료 몇 개 집어다 주기, 아니면 옆에서 응원하기였다.
“도현아!”
“네”
김형석이 부르는 소리에 도현이 빠릿하게 달려갔다. 그러자 그가 새 수저를 하나 꺼내 국을 떠서 주었다.
“한번 먹어봐. 간이 맞나, 안 맞나.”
아무래도 건네받으란 게 아니라 그냥 먹으란 소리 같아서 조심히 입을 대고 간을 보았다. 냉이가 들어가서 맑은 국물 맛에 온갖 채소 향이 잘 녹아들어 있었고, 청양고추를 넣은 건지 약간 알싸한 맛도 있었다.
“어때? 응?”
“맛있어요!”
“정말?”
“네.”
그런 대화를 하고 있자 지나가던 고정 멤버 한 명이 의외란 듯이 말했다.
“나는 미국 출신이라길래 이런 음식 낯설 줄 알았는데. 잘 먹네?”
도현은 저런 질문을 많이 받아봤다. 주로 학교 친구들에게서 말이다. 익숙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한식은 엄마가 자주 해주셔서 많이 먹어봤어요. 입맛에도 맞고요.”
“아아, 그렇구나.”
곧 점심 준비가 모두 끝이 났다. 강원도 산골짜기에 도착하자마자 미션을 수행하고 점심밥까지 차린 사람들은 완전히 기진맥진해진 상태로 상 주변에 모였다.
“도현이는 여기 앉아!”
서지민의 옆에 가서 앉으며 생각했다.
‘예능도 쉽지 않구나.’
날이 풀렸다지만 아직은 추운 날씨였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마당에 편 상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도현은 내색하지 않고 수저를 들었다.
“팍팍 먹어 둬. 악마 같은 제작진들이 먹고 나면 또 뭐 시킬걸.”
“네? 쉬는 시간은요?”
“지금 쉬잖아.”
김형석의 대답에 다른 고정 멤버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게스트는 동시에 깨달았다.
이 사람들… 예능에 완전히 스며들었다.
“휘민 씨. 먹어… 먹기라도 하자.”
“하하, 네….”
네 명의 게스트는 아침보다 조금 홀쭉해진 채 냉이된장국을 들었다. 그 와중에 윤기 흐르는 가마솥 밥과 갓 수확한 채소가 들어간 된장국은 맛있었다.
* * *
도착하자마자 한 게 점심 먹기 미션이었다면, 점심 식사 후에 그들을 기다린 건 <도시 밖 스타>의 메인 퀘스트, ‘일 잘하는 스타’였다. 주로 마을 주민들이 부탁한 일을 해결하는 거였다.
그간 <도시 밖 스타>에서 해결한 일은 다양했다. 낚시나 채집 같은 보편적인 것부터, 양봉, 울타리 치기, 감나무 심기, 뒷간 재건축 등등… 이게 예능 스케일이 맞나 싶을 정도로 진짜 일을 잘했다.
“자, 여러분. 밥을 드셨으니 이제 일을 해야겠죠?”
“누가 보면 밥 그냥 준 줄 알겠네!”
“사람은 자고로 먹이고 재워주면 그 값을 해야 하는 법.”
무시하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동안 미션을 주실 분은 여러분이 묵고 계신 집의 주인분이십니다. 마침 주인분이 강아지 산책을 다녀오셔서요.”
“커험.”
그 말과 동시에 뒷짐을 진 할아버지가 걸어 나왔다. 주변에는 호위처럼 강아지를 두른 채였다.
“오….”
“포스가….”
멤버들이 감탄했다. 수염을 기르고 생활 한복을 입은 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포스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른 체구에서 놀라울 만큼 위풍당당한 기색이 뿜어져 나왔다. 모두가 노인에게 집중했다. 헛기침을 한 번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거, 내가 이 집….”
왕왕!
분위기가 깨진 건 그때였다.
“머시여?”
왕! 왕!
“개새끼가 갑자기 뭔 지랄이여!”
막 산책하고 왔는지 목줄을 단 개 세 마리가 왕왕, 낑낑대며 목줄을 잡아당겼다. 사람들은 그저 황당하게 그 장면을 쳐다보았다.
“어디 어른이 얘기하는데 개 놈이 끼어들어!”
“풉….”
반사적으로 터진 서지민이 입을 틀어막았다.
낑, 끼잉….
목줄을 잡아당기는 게 통하지 않는단 걸 깨달았는지 이제는 눈빛 공격을 보내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눈에 동요가 일었다.
“허어, 애교 부린다고 다가 아녀.”
때마침 피디가 그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이 동네에서 개 사랑으로 유명하신 분이시랍니다.”
“아….”
그 말에 모든 납득이 끝났다.
사실 시골 마을에서 개에게 목줄을 걸어 산책시킨다는 건 드문 일이었다. 보통 집을 지키라고 마당에 데려다 놓은 후, 묶어두고 방치하는 게 시골의 방식이었으니까. 애견인이 본다면 기겁할 일이긴 해도 마을 어르신들에겐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독특한 건 저쪽이었다.
이제 보니 개들이 잘 관리된 태가 났다. 산책하면서 묻은 거 같은 먼지 빼고는 털이 풍성하고 윤기가 흘렀다.
몇 번 더 잔소리하던 노인은 반항하는 강아지들을 끌고 가서 개 우리 안에 넣고 문을 닫았다. 애처로운 개 울음소리가 울렸다.
박박! 나무판자를 긁어대는 소리가 들리자 노인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원래 시끄러운 놈들이 아닌데… 광견병이라도 걸렸나.”
그리고 도현은.
‘모, 모르는 척하자….’
괜히 마당에 난 꽃에 시선을 주며 필사적으로 ‘난 아무것도 몰라요’를 시전 중이었다.
얌전하던 강아지가 미쳐 날뛰는 이유.
그야 한 가지밖에 더 있나.
사람 손을 탄 적 없는 다람쥐도 달라붙는 마당에 집 강아지라니…. 할리가 좋아죽는 브로콜리마저도 도현이 오면 그 주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도현은 온 힘을 다해 개를 가둔 우리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 도현을 신휘민이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사이, 다시 근엄한 얼굴로 돌아온 노인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내가 이 집 주인이네. 거. 저 양반이 재워주는 값으로 뭐든 한다던데.”
“……?”
고정 멤버가 제작진을 쳐다보았다. 제작진들은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에잉, 비리비리 희멀건 걸 보니까 밭일은 못하게 생겼구만.”
노인의 시선이 향한 건 강이든과 신휘민이었다. 두 사람은 침묵했다. 비리비리 희멀건…. 그래. 희멀건은 인정하지만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체격이 있었다. 그런데 노인의 눈에는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쯧쯧 혀를 차던 노인이 말했다.
“밭일은 됐고. 마당 정리 좀 도와줘.”
“뭘 하면 될까요?”
밭일을 안 해도 된다는 소식에 밝아진 김형석이 재빨리 물었다.
“일단 잡초부터 뽑아야지. 요즘 관리를 안 했더니 지저분해서 영 보기가 싫어.”
고정 멤버들이 화색을 띄었다. 가끔 그런 날이 있었다. 쉬운 미션이 주어지는 날. 오늘이 그런 날이…!
“저어기. 나무 보이지? 그거 가지치기도 하고.”
뭐, 그래. 가지치기 정도야.
“그거 다 하고 나면 개 우리 청소도 하고.”
…몇 명이 분담해서 하면 이 정도는.
“커험, 거. 이왕 청소하는 김에 저기, 내가 만들다가 만 개집 있는데 그것도 완성해주면 좋겠구만. 에, 또….”
멤버들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보일러가 요새 잘 안돼서 그것도 좀 확인해 주고.”
“…예, 그러니까 제초, 가지치기, 화분 정리, 개 우리 청소, 개집 보수공사, 돌판 깔기, 마루 보수, 보일러 확인하면 되는 거죠?”
“그렇지! 척하면 척이네!”
노인이 칭찬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때 사악한 제작진이 끼어들었다.
“맡은 일을 끝내기 전까지 저녁밥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사람인가?
“대신, 저녁밥은 제작진 측에서 맛있는 걸로 준비해드릴 테니까 열심히 일해 봅시다.”
“나 여기 괜히 왔나 봐….”
서지민의 중얼거림에 세 남자는 조용히 동의했다.
* * *
분명 예능을 찍으러 온 거 같은데. 도현은 주변을 둘러보곤 입을 다물었다. 하나같이 아침의 뽀송함을 잃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철컥.
도현은 강이든이 자른 나뭇가지가 바닥에 떨어지자 한 곳에 곱게 모아두었다.
이번에도 도현은 깍두기 멤버였다. 물론 도움을 주려 시도는 해봤다. 다치니까 가만히 있으란 소리를 들었을 뿐. 그에 굴하지 않고 돌아다니다가 어렵사리 찾은 일이 나뭇가지 치우기였다.
“너무 많이 자르면 못 써!”
“네.”
“그 옆에. 그래, 거기.”
감독관처럼 뒷짐을 쥐고 돌아다니던 노인이 이번엔 그들 앞에서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강이든은 특유의 무감한 얼굴로 시키는 대로 했다.
“할아버지!”
한쪽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에게 초코바를 주었던 여성 멤버였다. 그녀는 막 화분 정리를 다 마쳤는지 허리를 편 채 땀을 닦고 있었다.
“할아버지. 개 우리 청소하려면 강아지를 다른 곳에 둬야 할 거 같은데요!”
“그럼 꺼내서 기둥에 묶어놓고 있어. 목줄은 거시기, 뭐냐…. 거시기 옆에 걸려 있어.”
“네!”
알아들은 건지 뭔지. 그녀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우리 문을 열었다. 일단 조금만 열고 들어가서 목줄을 건 후 개들을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다. 계획은 그랬단 소리였다.
“어, 어어?”
문을 살짝 열자마자 뛰쳐나온 개에 놀란 멤버가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엉덩방아의 충격을 느낄 새도 없었다.
왕왕!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에 있던 개들이 줄줄이 나와버린 것이다. 사다리에 올라가서 가지치기하던 강이든도, 바닥에 쪼그려 앉아 제초제를 뿌리던 신휘민도, 돌판을 깔 자리를 확보하던 서지민도 그 옆에서 그녀를 돕던 김형석도 모두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으아!”
막 정리가 끝난 구역을 강아지가 밟고 지나가자 서지민이 절망했고 뽑아 놓은 잡초를 쌓아둔 곳을 지나쳐 간 다른 한 마리에 신휘민이 머리를 싸맸다. 그러나 곧 그들은 다른 의미로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강이든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저 과하게 기운차 보이는 강아지들이 향하는 게 그가 있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가 가지치기를 위해 높은 사다리에 올라간 상태란 거였다. 그걸 보던 제작진들의 얼굴도 하얘졌다.
이대로 사다리랑 부딪치면….
순식간에 그들의 머릿속에 기사 제목이 스쳐 지나갔다. ‘국민 배우 강이든. 예능서 부상… 제작진 측의 불찰’, ‘예능 도시 밖 스타, 스타들의 안전은 관심 밖?’, ‘부상 위험 가득한 미션, 누구를 위한 예능인가….’
“허억!”
대, 대형 사고다. 안 돼!
그려지는 끔찍한 미래에 그들이 경악하고 있을 때였다.
사박.
모두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마당의 흙이 밟히는 소리가 그리 크게 들린 건 처음이었다. 반사적으로 감독의 시선이 그곳에 향했다.
“…도현?”
강이든이 중얼거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사다리 아래서 떨어진 나뭇가지를 줍고 있던 도현이었다.
“너, 위험…!”
드물게 강이든이 큰 소리를 내자 도현이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인 후 두 걸음 더 나아갔다. 훗날 제작진이 회상하건대 그건 나락에 갈 뻔한 프로그램을 구해주러 온 영웅의 모습이었다.
탁.
도현의 발걸음이 멈췄다. 강아지들은 여전히 브레이크 없이 달려오는 중이었다. 아직 나이로 치면 어리지만, 시고르자브종 특성상 몸은 이미 다 큰 아이들이었다. 그 몸과 도현이 부딪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거 같진 않았다.
노인이 굳은 낯으로 손에 쥔 지팡이를 들었다. 여차하면 개들이 다칠 위험이 있더라도 지팡이를 뻗어서 막을 생각이었다.
충돌 사고를 일으킬 거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그 순간.
“안 돼.”
도현이 손바닥을 내밀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마당의 흙이 날리며 흙먼지가 일었다. 차마 볼 수 없었던 몇몇 이들이 눈을 감았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마찬가지로 개가 달려가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었던 여성 멤버는 조용한 주변에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입을 벌렸다.
정적이 내려앉은 촬영장.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도현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통해서 다행이다.’
브로콜리가 달려들 때 하던 게 다행히도 통한 모양이었다. 도현은 브로콜리를 칭찬할 때처럼 가운데 있는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굿보이.”
그 앞에는 삼 일은 굶고 고기를 발견한 것처럼 달려가던 개들이 순한 양이 되어 ‘기다려’를 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