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4화. 종영, 그리고 (9)
발라당!
쓰다듬을 받은 강아지가 배를 까고 드러누워 마당을 등으로 쓸어댔다. 선택받지 못한 강아지들은 관심을 달라는 듯 도현의 다리 주변을 빙빙 돌았다.
도현은 홀린 듯이 배를 쓰다듬으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 쏠려 있었다. 슬그머니 주변의 눈치를 보던 소년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손에 잡히는 물체를 꺼낸 도현이 자연스럽게 웃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번엔 손바닥에 집중되었다.
“초코바 냄새를 맡았나 봐요.”
이 정도면 훌륭한 변명이겠지.
은근슬쩍 사람들의 안색을 살피니 어리둥절하긴 해도 어느 정도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도현이 남몰래 숨을 돌릴 찰나였다.
“그거….”
여전히 뒤로 넘어져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여성 멤버, 경은지였다. 도현에게 초코바를 준 당사자기도 했다.
그녀가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설마. 도현은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꺼내진 손바닥에는 똑같은 초코바가, 그것도 다섯 개나 놓여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나도 있는데.”
“…….”
휑-
촬영장이 침묵에 잠겼다. 소리를 내는 건 어떻게든 도현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등으로 마당을 쓸고,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리치고, 다리를 휘감고, 왕왕 낑낑 깽깽 별짓을 다 하는 강아지들뿐이었다.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 속에서 소년이 웃었다.
“하하… 신기, 하네요.”
목소리에 원망이 깃든 거 같다면, 착각이 아닐 테다.
상황을 수습한 건 메인 MC 김형석이었다. 그는 괜히 메인이 아니라는 듯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도현이가 동물한테 인기가 많네!’ 하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어냈다.
“개도 사람 보는 눈이 있는 거죠!”
거기에 서지민의 너스레가 더해지니 촬영장은 완전히 평소처럼 돌아왔다.
“너.”
어느새 사다리에서 내려온 강이든이 흰 얼굴을 복잡하게 물들였다. 그런 표정은 처음이라 도현은 조금 놀랐다.
말을 고르듯 한참을 침묵하던 강이든이 입을 열었다.
“위험했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안 다칠 걸 알았어요? 그건 거짓말이다. 솔직히 확신이 없었으니까. 도현은 흘긋 시선을 돌려 카메라가 이곳을 향하지 않은 걸 확인했다.
뭐… 찍혀도 방송국 측에서 커트하겠지만. 스타의 부상을 주제로 한 대화는 여러모로 위험하니 말이다.
“저는 형이 더 위험해 보였어요.”
고르고 고른 대답은 진심이었다.
강이든은 묘한 눈으로 도현을 보더니 손을 들어 정수리를 꾹 눌렀다. 혼내는 건지 아닌지 모를 행동이었다.
“도현아, 괜찮아?”
뒤늦게 합류한 서지민이 도현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덕분에 꾹꾹이에서 풀려난 도현은 멀쩡하다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어.”
“방송 사고는 막아서 다행이죠.”
“…지금 그게 중요해?”
무의식적으로 한 말에 서지민이 기가 찬 표정을 했다. 도현은 실수했단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다가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상당히 미묘한 낯의 신휘민이었다. 그는 굉장히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굉장히 피로한 얼굴을 한다. 그의 의문을 모르는 건 아니나, 답해줄 말이 없어 외면했다.
그사이. 상황이 얼추 정리되자 촬영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다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촬영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래도 감독이 미안한 낯으로 도현에게 휴식을 권하긴 했다.
“괜찮아요.”
도현이 딱 잘라 거절했을 뿐이지.
카메라가 다시 돌아가도 사람들은 조금 어색하게 움직였다. 심장이 철렁했던 여파도 있었고, 방금의 상황에 대한 타당하고 기묘한 의문이 남기도 해서였다. 그런 분위기를 깨트린 건 노인의 호통 소리였다.
“으디 사람헌티 개새끼가 달려들어! 으이?”
낑낑, 깽!
“뭘 잘혔다고 깽깽질이여, 깽깽질은!”
목줄 잡혀 끌려간 강아지 세 마리가 기죽은 채로 낑낑거리고 있었다. 노인에게서 첫 등장 때 봤던 기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다 못한 도현이 끼어들었다.
“저… 할아버지.”
“으잉?”
“저는 괜찮아요.”
“아녀. 이놈들 버릇을 꽉 잡아놔야지. 어허. 꼬리 가만 안 둬?”
도현이 나타나자 강아지들의 꼬리가 자동반사적으로 휙휙 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이 도끼눈을 뜨며 혼을 냈다.
“우, 우리는 일하자….”
“그, 그래요.”
구경하던 사람들이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리고 제각각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난감한 상황에 홀로 남겨진 도현은 배신감 어린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보신탕 되는 거여, 알어?”
도현은 잠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르른 하늘에 마음이 조금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그 아래로 시선을 내리자….
“내가 자식새끼 잘못 키웠지. 똑바로 서! 쓰읍!”
낑….
도현은 깊은 한숨을 삼켰다.
* * *
십 분가량 혼이 난 강아지는 간신히 풀려났다. 그리고 예능을 찍는 내내 별다른 쓸모가 없던 도현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주어졌다.
“이놈이 장군이.”
왕!
저를 부르는 걸 알았는지, 장군이가 힘차게 대답했다. 이름답게 덩치가 크고 울음소리가 커다랬다.
“고 옆이 이쁜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는 유독 털이 희었다. 왜 이쁜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알 거 같았다.
“다른 놈이 발발이.”
“왜 발발이에요?”
“발발대며 하도 나대사서.”
도현은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았다. 조금 너무한 거 아닌가 싶은 이름이긴 한데…. 아까부터 가만히 있질 못하고 도현에게 달려드는 걸 보니 찰떡이다 싶었다.
도현의 새로운 일거리는 바로 강아지 돌보기였다. 도현이 강아지를 돌보는 동안 다른 이들은 개 우리 청소와 개집 보수공사에 착수했다. 훌륭한 분업이었다.
“강아지를 많이 아끼시네요.”
“그럼. 내 자식새낀데.”
목소리는 조금 퉁명스러웠지만, 눈빛에서는 깊은 애정이 묻어났다. 노인이 조금 회한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자식 놈들 그렇게 떠나고 내 곁을 지켜준 건 이놈들밖에 없어.”
“아….”
“이제 이놈들이 내 아들이고 딸이여.”
숙연해지는 기분에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냥 조금 특이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했는데. 강아지를 향한 애정 어린 눈빛이 새롭게 와닿았다.
“할아버지! 이쪽에 있는 집은 어떻게 할까요!”
“거시기는 놔두고….”
노인이 멀어지자 자리에는 도현과 세 마리의 개만이 남았다. 도현이 개들이 묶여 있는 기둥 주변 마루에 걸터앉자, 멀어진 할아버지 쪽을 보고 있던 강아지들이 도현의 곁에 몰려들었다.
장군이는 옆구리에 자리 잡아 얌전히 몸을 말았고, 이쁜이는 무릎에 턱하니 고개를 올렸다. 그리고 발발이는.
“으, 으아. 핥지 마.”
도현은 제 허벅지 위에 올라서서 얼굴을 마구잡이로 핥아대는 발발이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이름 한번 잘 지었다 싶었다.
* * *
오늘 안에는 끝낼 수 있을까 싶었던 미션은 밤이 너무 깊기 전에 간신히 끝낼 수 있었다.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다름 아닌 서지민이었다. 그녀는 놀라우리만치 능숙하게 돌판을 깔고 고장 난 보일러를 고치며 모두의 감탄을 샀다.
이후 사람들은 눈이 돌아가서 저녁밥에 달려들었다. 맛있는 걸 준비하겠단 말은 허언이 아니었는지, 모락모락 김이 나는 밥과 고기반찬이 먹음직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배부르게 먹고 나서 간단한 게임을 하고 나니 취침 시간이었다. 방은 총 세 개였는데, 고정 멤버 중에서 유일한 여성인 경은지와 서지민이 한 방을 차지했고, 본래 고정 멤버들이 또 한 방, 그리고 도현, 신휘민, 강이든이 한 방을 차지했다.
적막이 내려앉은 밤이었다. 바닥에 두꺼운 이불 몇 장 깔고 그 위에 누운 채로 도현은 눈을 깜빡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새 없이 일한 두 사람은 이미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자 바깥에서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시골이라 그런가. 도현은 숨소리를 더욱 낮췄다.
바닥에 고작 이불 몇 장 깔고 자는 것도. 직접 재료를 구해와 밥을 해 먹는 것도. 연기가 아닌 일을 하는 것도 온통 낯설다. 낯선 것들만 모였으니 불편해야 정상일 텐데 오히려 편안하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네.’
한국에서의 적응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영혼도 잠잠했고 주연으로 출연한 첫 드라마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목표로 했던 중학교에도 순조롭게 들어갔다. 거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있긴 했어도 나름대로 잘 헤쳐 나가고 있다.
모든 게 잘 되어간다.
도현이 감았던 눈을 떴다. 깜깜한 방 안은 천장의 윤곽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도현은 조금 멍하니 생각했다.
모든 게 잘 되어가지만… 가끔.
아주 가끔. 이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미국에 있을 친구가 생각날 때나… 이 순간에 가장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곁에 없다는 걸 느낄 때.
문득 궁금증이 차오른다. 지금 날 보면 형은 뭐라고 할까. 너무하다고 할까. 아니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을까. 그는 하나뿐인 동생의 편을 들까, 아니면 내 편을 들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침부터 너무 시끌벅적했기 때문일까. 고요해진 지금 상념이 엉겨들었다. 소년은 생각을 떨쳐내듯이 눈을 감았다. 곧이어 방 안에 조용한 숨소리가 가득 찼다.
* * *
다음 날 가장 빠르게 기상한 사람은 도현이었다. 여섯 시가 되자 자동적으로 잠에서 깬 도현은, 여전히 꿈나라에 가 있는 두 사람을 깨우지 않도록 조용히 이불을 걷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새벽의 시골 공기는 신선했다. 도현이 밖으로 나오자 기척을 느꼈는지 개 우리 쪽이 조금 시끄러워졌다. 도현이 우리 안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쉿. 시끄럽게 하면 안 돼.”
알아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강아지들은 짖지 않고 꼬리만 세차게 흔들어댔다. 도현이 작게 웃고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
도현의 허리까지 오는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강아지들과 장난을 치고 있자니, 누군가 길게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하암, 뭐야. 도현이?”
그녀는 경은지였다. 아침 미션을 수행하는 게 몸에 배다 보니 일찍 기상하게 된 참이었다. 그녀가 눈을 비비고 도현의 옆에 다가왔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원래 이 시간에 일어나요.”
“정말? 나보다 낫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아무 말이나 하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몇 번 더 하품하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어우, 이제 잠 좀 깬다.”
그녀가 한층 맑아진 눈빛으로 도현과 강아지를 쳐다보았다.
“강아지들이랑 놀고 있었어?”
“네.”
“다시 봐도 신기하네… 어쩜 이렇게 널 좋아하지.”
도현은 대답 대신 웃었다. 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였다. ‘진짜 요정인가…’ 하는 말은 잠이 덜 깨서라 생각하며 흘려들었다.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잠을 몰아내고 있자 마루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은 피곤한 듯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이는 신휘민이었다.
그는 피로한 낯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평소와 같았다. 머리카락도 차분하게 정돈된 채였고 얼굴도 깔끔했다. 아이돌이라 그런가. 자기 관리가 철저했다. 그 뒤로 나온 강이든의 머리카락이 숙면을 증명하듯 자유분방하게 떠오른 채였기에 더욱 대비되었다.
“선배님.”
강이든이 멍하니 도현을 쳐다보았다. 도현은 그의 발치에 시선을 주며 말했다.
“양말 짝짝이에요.”
물끄러미 제 발을 내려다보던 강이든이 도로 방에 들어갔다. 갈아 신고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강이든이 다시 나올 때쯤에는 모두가 기상한 후였다. 좀비처럼 비척대며 마당 한가운데 모인 이들은 제작진들이 준비한 미션을 기다렸다.
“다들 잘 주무셨나요?”
“네에-”
“오늘 아침 미션은, 바로 보물찾기입니다.”
“보물찾기?”
“마을 곳곳에 제작진들이 공을 숨겨뒀어요. 공 안에는 식재료 카드가 들어 있습니다. 공을 찾으면, 그 카드에 그려진 식재료를 제공해 드립니다.”
“설마 마을을 전부 돌아다니라고…?”
“물론, 힌트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제작진이 커다란 판을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담벼락, 매실나무, 장독대, 마을회관’이라는 단어들이 쓰여 있었다.
“저게… 힌트야?”
황당하단 목소리가 울린다. 도현도 정확히 같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지만, 그보다 훨씬 작은 공을 찾아다니라니. 고작 저런 힌트를 가지고?
“자. 시간은 지금부터입니다. 앞으로 한 시간 내로 공을 찾아서 가져와야 합니다. 그럼, 시-작!”
피도 눈물도 없는 제작진이 다짜고짜 타이머를 눌렀다.
잠이 확 달아나버린 이들이 얼떨떨한 얼굴을 하다가, 어제 점심 식사 미션 때 했던 대로 팀을 나누고 각자 네 개 중 하나의 힌트를 골라 찾아오기로 했다.
도현과 신휘민은 매실나무였다. 다른 팀이 말릴 새도 없이 출발하자, 마당에 남은 두 사람이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신휘민이었다.
“너 매실나무 어떻게 생겼는지….”
그는 도현의 표정을 읽은 듯 말을 멈췄다.
“…그래. 내가 괜히 물었네.”
어쩐지 느껴지는 데자뷔에 두 사람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