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56)화 (357/582)

제356화. 종영, 그리고 (11)

“좋은 아침입니다!”

“주현 씨도 좋은 아침~.”

새솔 엔터테인먼트의 월요일은 조금 특별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새로이 시작한 한 주에 피곤함과 절망감을 느낄 오전 시간대임에도 막 출근한 여성의 얼굴에는 좌절이 엿보이지 않았다.

이주현은 콧노래를 부르며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결제해야 할 서류들을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잠깐의 점심시간 이후에는 다시 일이었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켠 후 시계를 확인했다. 그녀의 안색이 환해졌다.

시계가 숫자 5를 향해 있었다.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이때 곧 퇴근 시간임을 깨닫고 행복해하겠지만, 그녀가 느끼는 기쁨의 이유는 조금 달랐다.

딸랑-

‘왔다!’

그녀, 이주현은 설레는 마음으로 고개를 쭉 빼 들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익숙한 낯의 남자 어깨 너머로 그녀가 하루 종일 기다리던 당사자가 같이 들어왔다.

“오늘도 리즈 갱신이네….”

옆자리에 있던 김 대리가 작게 중얼거리는 말에 이주현은 마음 깊이 공감했다.

‘교복이 저렇게 잘 어울릴 일인가?’

디자인만 놓고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데 옷걸이가 너무 특별하다 보니 그조차도 달라 보였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평범한 중학생이라고 생각하겠나. 어디 재벌집 도련님 마실 나온 줄 알지.

“안녕하세요.”

게다가 인사성까지 좋았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뉴스에서 보던 할리우드 스타를 눈앞에서 보는 게 익숙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도현이 손을 들어 보였다. 새솔 직원들의 시선이 달랑이는 것에 쏠렸다. 손에 들린 상자에는 고급스러운 마크가 찍혀 있었다.

“오는 길에 간식거리 좀 사 왔어요.”

이주현은 탄복했다.

잘생기면 능력이라도 좋지 말든가. 아니면 인성이라도 부족하든가. 어쩜 저렇게 빠짐없이 치밀하게 완벽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도현이 익숙하게 테이블 위에 상자를 올려놓자 2팀 전원이 잠깐 일을 중단하고 주위로 몰려들었다. ‘오늘은 뭘까’ 하는 기대감이 두 눈에 가득했다.

소속사에 들어오고, 매주 월요일마다 출근 도장을 찍으면서 도현은 어느 순간부터 간식거리를 손에 들고 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에서 엄마랑 같이 만들었다는 머핀이었다. 그게 너무 반응이 좋자 몇 번 더 가지고 오더니, 나중에는 아예 사서 왔다. 그것도 하나같이 고급지고 비싸 보이는 간식거리를.

걱정한 팀장님이 그렇게 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했지만.

‘괜찮아요. 오히려 돈을 쓸 데가 없어서 문제였거든요.’

라는 눈이 너무 부셔서 뜰 수조차 없는 답변을 받았다. 이주현은 아직도 그때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게 중딩한테 나올 간지인가.’

심지어 부모님 돈도 아니고 스스로 번 돈이었다. 그때의 발언은 2팀 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었다. 도현은 모르겠지만, 그는 회사에서 ‘빛도현’, ‘도현느님’이라고 불리게 된 지 오래였다.

그러지 않기도 어렵지. 여느 회사와 같았던 슬픈 월요일을 바꿔준 게 바로 도현 아닌가. 그녀만 해도 회사 가면 눈 정화와 더불어 맛있는 디저트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일주일의 시작을 의연히 감내할 수 있었다.

‘회사 복지를 배우가 해주네….’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에클레어를 나눠주던 도현이 그녀의 차례가 되자 멈칫했다. 까만 눈동자와 정면에서 마주친 이주현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굳혔다. 살피듯 그녀를 보던 도현이 입을 연 건 그 순간이었다.

“염색하셨네요.”

“어?”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토요일에 기분 전환 삼아 염색하기는 했다. 하지만 파격적인 변화를 좋아하지 않다 보니 비슷비슷한 갈색이었다.

“어떻게 알아봤어?”

회사 사람 중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걸 일주일에 한 번 잠깐 보는 게 다인 배우가 알아보고 있었다.

“전보다 밝아졌잖아요. 이전에도 좋았지만 지금도 잘 어울려요.”

도현이 에클레어를 그녀의 손에 놓아주며 말했다. 진심이라는 듯이 다정하게 휜 눈은 덤이었다. 그녀는 잠시 혼이 나가 있었다.

‘뭔 애가….’

파릇파릇한 중학생에게서 커서 사람들을 홀리고 다닐 기미가 보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제가 도현의 또래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또래였으면 구제할 길 없는 짝사랑에 빠져 허우적댔을 거 같았다.

‘무서운 아이.’

갑자기 미묘한 시선을 받은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녀의 생각을 읽을 수는 없었다.

간식 나눔을 끝낸 도현은 자주 가던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경찬호가 익숙하다는 듯이 차를 내어주었다. 원래는 도현을 위한 코코아가 항상 탕비실에 놓여 있었지만….

<전지적 참견쟁이들>이 방영되고 나서 경찬호는 도현의 코코아 섭취량에 기함하고 말았다. 그리고 회사 내의 코코아를 모두 치워버렸다. 당분 섭취 과다는 건강을 해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대신에 탕비실에는 허브차가 자리 잡게 되었다.

도현은 별다른 반항 없이 받아들였다. 허브차는 익숙하기도 했고, 또 메리와의 시간이 떠올라서 나쁘지 않았다. 허브의 효과인지 아니면 경험에 의한 학습인지 모르겠지만, 허브향을 맡으면 반사적으로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다.

도현은 대본을 펼쳐보기 전에 물었다.

“형이 보기에 괜찮은 거 있었어요?”

“…음.”

모호한 반응에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미적지근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경찬호가 말했다.

“아무래도 전작의 영향 때문인지 대부분 사극입니다.”

“아.”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작의 영향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괜찮은 게 하나 있긴 한데….”

그가 답지 않게 말을 흐렸다. 도현은 재촉하는 대신 차분히 기다렸다. 그가 아는 경찬호는 괜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운을 띄웠다면 머뭇거리긴 해도 결국 말을 해줄 터였다.

도현의 생각이 적중했는지 경찬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안받은 역할이 단역입니다.”

“단역이요?”

“네. 정확히는 주연 인물의 어린 시절 역할이고, 드라마 초반에만 잠깐 등장합니다.”

도현은 그런 역할을 언급한 것에 의아해하기보다는 근원적인 이유를 짚었다.

“그 캐릭터가 아주 매력 있나 보네요?”

“…네.”

주연 배우의 어린 시절. 

그것도 초반부에만 등장하는 아역.

그걸 이렇게 조심스럽게 꺼냈다는 얘기는 그만큼 매력적인 배역이란 소리일 터였다. 도현이 생각에 잠긴 낯으로 시놉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경찬호는 조금 긴장한 낯으로 도현을 주시했다. 그가 봐온 도현이라면 배역의 크고 작음을 따질 거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꺼내 본 얘기였다.

하지만 가정은 가정일 뿐. 실제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거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앞으로의 방향성을 잡아야지.’

이도현이라는 배우의 성향을 좀 더 온전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도현이 정말 주연, 조연, 단역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역할과 대본만을 따진다면, 경찬호도 앞으로 그걸 기준으로 판단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

‘새로운 기준으로 판단할 뿐이다.’

그게 그가 매니저로 해야 할 업무였다.

어쨌든, 한 번은 짚고 가야 할 문제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팔락.

그사이 시놉시스를 모두 읽은 도현이 종이 뭉치를 내려놓았다.

“확실히… 재밌네요. 상당히 독특하고요.”

그 말에 경찬호는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신라시대. 극의 주인공은 선덕 여왕. 그리고 제안이 온 역할은….

비담.

‘비담의 난’을 일으킨 그 비담이었다.

“일단 당장 정할 필요는 없죠?”

“천천히 생각해도 됩니다.”

“그럼 이건 제가 가져갈게요. 알아볼 게 좀 있어서요.”

“그렇게 하시죠.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하시고요.”

“네, 그럴게요.”

도현은 산뜻한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주변을 지나가던 직원 한 명이 벌써 가느냐고 물어왔다.

“해야 할 일이 생겨서요. 다음에 뵐게요.”

두 눈이 흥미로움과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걸 본 경찬호는 깨달았다.

예상하긴 했는데….

‘정말 신경을 안 쓰네.’

어딜 봐도 잔뜩 신이 난 얼굴이었다. 그 역할이 단역 수준의 분량을 가졌다거나,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라는 건 조금도 고려 가치가 없다는 듯이 말이다.

아직 출연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행동 지침을 세우기엔 충분했다. 아무래도 제 배우는 역할과 대본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편인 거 같았다.

* * *

집에 돌아온 도현은 곧장 방에 들어가 제게 들어온 배역 ‘비담’과 관련한 자료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현이 파악한 바로는 이랬다.

비담은 <화랑세기>에 ‘선덕제의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과 염종이 모반을 하였다’라는 단 한 줄로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삼국유사>에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고 오직 <삼국사기>에만 네 번 언급된다.

<삼국사기>에 언급된 건 그가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는 것과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이었다. 그 외의 출생에 대한 부분이나 삶의 행적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에 집중하면… 몇 가지 사실을 추측할 수 있지.’

일단, 상대등은 대등(大等)으로 구성된 귀족회의(貴族會議)의 주재자로서 명실공히 신라 귀족을 대표하는 존재였으므로, 진골(眞骨) 중에서도 이찬(伊飡)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1)

이로 인해서 비담이 진지왕과 미실 사이의 출생일 거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도현에게 온 시놉시스에서도 비담은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로 그려진다.

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면, 드라마 속 비담에게는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그가 실은 진지왕의 아들이 아니란 것.’

<화랑세기> 세종 편에서는 진지왕이 미실에 대한 마음이 식어 그녀를 왕후로 만들어주겠단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나온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진지왕이 비담이 제 아들이 아님을 알게 되어 그녀에게 왕후의 자리를 주지 않은 걸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건 꽤… 설득력 있는 설정이었다. 

‘만약 비담이 정말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면, 미실이 진지왕의 폐위를 주도한 게 조금 아이러니해지니까.’

당연한 이치였다. 진지왕이 폐위되어 신분이 추락하면 비담 또한 처지가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담이 애초부터 왕이 될 수 없는 혈통이었다면 미실의 결정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마 이 부분을 고려해서 작가가 그런 설정을 한 거 같았다.

그런 가정을 모두 제외하고서라도, 만약 둘 사이에 아들이 있었더라면 역사서에 한 줄이라도 기록되어야 했을 텐데 그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담의 과거사는 거기서부터 출발한 설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라마에서 비담은 선덕여왕과 연인 관계로 얽혀 있다. 도현에게 캐스팅 온, 비담의 어린 시절이 바로 그 관계의 시작점이었다. 얽히고 엉킨 망한 사랑이란 관계의 시작 말이다.

그리고 이 설정은 허구긴 해도 비담의 사생아 설정처럼 영 가능성 없진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1)이기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상대등上大等”, 한국학중앙연구원,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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