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57)화 (358/582)

제357화. 종영, 그리고 (12)

한 명의 개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를 둘러싼 환경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개인은 절대로 환경과 동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소설책을 읽을 때도 도현이 제일 먼저 했던 건 세계관을 이해하는 거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담의 생각, 나아가서 작가의 의도까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상을 알 필요가 있었다. 그에 도현은 당시 시대 배경을 먼저 조사했다.

그 결과는 흥미로웠다.

먼저, 신라는 일부다처제이자 일처다부제였다. 둘 중 하나만 해도 놀라울 텐데 두 개가 혼합된 중혼 풍속을 가지고 있었다.

‘아내가 결혼했는데 남편도 결혼하는…. 근데 그게 자기 동생이랑…?’

도현은 잠시 머릿속이 엉켰다. 그게… 그럴 수 있는 건가? 현대의 가족 제도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걸 복잡한 눈으로 보다가 수긍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게다가 왜 그런 방식을 택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선덕 여왕의 남편은 용춘, 흠반, 을제 세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각자 중요한 직책을 맡아 국정에 관여했다. 그들은 단순한 여왕의 남편을 넘어서 정치적 파트너였던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비담이 선덕 여왕의 연인이었을 가능성이 생긴다. 당시 고위직에 있던 남자들이 여왕의 남편이거나 연인이었음을 생각해보자. 우연히 그 남성들이 여왕의 눈에 들어서 남편이나 연인이 되었다는 것보다는, 애초부터 여왕이 그런 관계에 있는 남성을 그 자리에 앉혔다는 게 조금 더 설득력 있었다.

그리고 비담은 귀족의 수장인, 상대등이었다. 의심해볼 여지는 충분했다. 물론, 도현이 조사한 자료 중에서는 <화랑세기>-신라시대 화랑을 다룬 사서. 현재 전해지는 건 그 필사본이나, 진위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가 포함되어 있어서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드라마는 그 자체가 화랑세기를 기반으로 쓰인 작품이다. 드라마를 이해하는 방법으로는 적절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추측한 것을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드라마 속의 비담이라는 인물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도현에게 온 비담은 다사다난한 과거사를 지니고 있다. 진지왕 폐위를 주도하면서 미실은 제 약점을 없애기 위해 비담을 궁 밖에 버린다.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말과 함께. 비담은 이유조차 모른 채 버려진다.

다행인 것은, 가진 일신의 무력이 뛰어났던 비담이 저잣거리에 쉬이 적응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다가 만난 게 덕만공주, 미래의 선덕 여왕이었다. 궁 밖을 나왔다가 암살자를 만난 덕만은 나름 항전을 하고 있었지만, 화살촉에 발린 독에 중독되어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비담은 그런 그녀를 돕게 되고 서로에게 호감을 품게 된다.

중독된 덕만공주를 치료하기 위해 집으로 데려간 비담은 천으로 가려졌던 그녀의 얼굴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다. 궁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위기는 넘겼지만, 중독은 쉬이 치료되지 않아 두 사람은 덕만이 회복할 때까지 같이 시간을 보낸다. 이 시기에 마력처럼 끌린 두 사람은 연모의 감정을 품게 된다.

공주가 회복한 후, 비담은 은혜를 갚겠다는 덕만공주의 말에 그를 궁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미실, 그의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덕만의 도움으로 궁에 간 비담은 미실을 만나게 되고….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지.’

골칫거리 보듯 저를 보는 미실로부터 출생의 비밀을 듣는다. 자연히 그가 버려진 이유까지 깨닫게 된다.

충격받은 비담을 차가운 눈으로 보고 있던 미실은, 그가 덕만과 심상치 않아 보였다는 보고를 듣고는 그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덕만의 옆에 붙어서 그녀를 유혹하라는 명령이었다.

처음에는 거부한다. 하지만 비담은 알았다. 제 어머니가 쓸모없는 아들에게 자비를 베풀 인물이 아니라는 걸. 비밀을 알려준 건, 언제든 그를 죽일 결심을 마쳤다는 뜻이라는 것도.

그런 비담에게 덕만공주는 아주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그에게 권력을 가져다줄, 어머니의 인정을 받아낼, 붕 떠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매력적인 유혹.

그렇게 비담은 덕만공주를 놓지도, 제 삶을 포기하지도 못한 채 결국 기만 어린 사랑을 시작한다.

여기까지가 아역 배우가 맡을 분량, 즉, 도현에게 온 부분이었다. 이후 이야기는 몇 년 뒤로 넘어뛰는데, 거기서부터 다 큰 덕만공주와 천명공주, 미실, 그 외 인물들의 숨 막히는 정치 싸움과 사랑 관계가 시작된다.

‘…재밌다.’

도현은 인정했다.

매니저 형은 제 취향을 잘 아는 게 틀림없었다.

‘너무 어릴 때부터 병원에 있던 고전 소설들을 즐겨 봐서 그런가.’

도현은 입체적인 인간성을 바탕으로 한 소용돌이치는 관계를 좋아했다. 멍청한 선택으로 나락에 가기도 하고, 또 멍청한 선택으로 구원받기도 하며, 결국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이야기 말이다.

비담의 경우에는 전자였다.

비담은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인물이지만… 그래도 가장 적확한 표현을 고르자면 ‘결핍된 인간’이 어울릴 것이다. 그의 모든 불행은 거기부터 시작되니까.

어릴 때는 저를 없는 듯 여기는 아버지와 권위로 누르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사춘기 때는 이유도 모르고 추방되어 폭력적으로 출생의 비밀을 깨달았으며, 처음으로 품은 연모의 감정조차 부정된다. 그 모든 건 비담을 곯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비담은 덕만을 사랑한다. 그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여전히 그때의 순수함이 남아 있다. 애틋하고 안타까운 순수함이.

동시에 그녀를 증오한다. 진골 출신, 그것도 실은 사생아인 저와 성골을 이은 완벽한 여인. 그런 그녀를 사랑할수록 비담은 곯아갈 수밖에 없었다.

비담은 그녀의 완벽함을, 자신이 가지지 못한 이상향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끌어내려, 이내 그 완벽함에 흠집을 내기 위해 멸시의 마음을 품게 된다. 바로 덕만이 여인이라는 점을 들어서 말이다.

이로 인해 역사적인 사실,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를 내세운 비담의 난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심하다면 한심한 인간상이다.

못났다면 못났다.

그렇지만….

도현이 보기엔 그건 비담의 발버둥이었다. 다만, 겉보기처럼 권력을 향한 발버둥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한 발버둥.’

덕만이 완벽한 채라면 영영 그녀를 전처럼 사랑할 수 없을 테니, 흠집을 내고 어떻게든 제가 있는 곳까지 끌어내려서 사랑하고픈 마음. 자신이 이미 썩어버린 줄도 모르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망령.

비담조차 인지하지 못한 열망이었다. 그리고 비틀리고 이기적인 그것은 우습고도 가엾게도, 결국엔 사랑처럼 보였다.

도현은 참았던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너무 몰입해서 깊이 생각했더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을 감고 몇 번 숨을 고른 도현이 생각했다.

‘왜 난 매번 이런 거에 끌리지.’

처음으로 연모하게 된 소녀를 기만할 마음을 품고, 그 옆에서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버티기 위해 합리화하고, 어느 순간 익숙해지고, 끝내 증오와 사랑을 구분할 수 없게 되며, 결국 바닥까지 떨어지는 그 모습이.

우습고도 가엾고, 결국엔 가련하고도 안쓰러운 그 모습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모르겠다. 맥베스를 좋아하던 음침한 꼬마가 여전히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확실한 건….

이 배역은 도현의 것이 되리란 것.

그거면 지금은 충분했다.

* * *

오늘따라 교실이 조용했다.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 조용히 책을 보고 있었다. 의아하게 그 모습을 보던 도현이 막 등교한 한설아를 보고 인사했다.

“안녕.”

“좋은 아침.”

책상 옆에 가방을 건 한설아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선 곧장 안경과 교과서를 꺼낸다. 도현이 그걸 멀뚱히 보고 있자, 그녀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넌 공부 다 했어?”

“공부?”

“…혹시나, 정말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응.”

꿀꺽. 마른침을 삼킨 한설아가 긴장한 눈으로 말했다.

“오늘이 중간고사인 건 알지…?”

“…물론이지.”

왜 대답이 한 박자 느린 건데?

그런 눈빛을 보내자 도현이 시선을 회피했다. 

알고 있긴 했다. 대본에 정신이 팔려서 잠깐, 아주 잠깐 깜빡한 거지. 정말 알고 있긴 했었다.

“…….”

“…….”

“…시험 범위는 알아?”

“그건 알아.”

“오늘 뭐 시험 보는지는 알고?”

“음.”

도현은 칠판을 흘긋 확인했다. 그리고 당당한 어조로 말했다.

“역사, 수학, 국어네.”

한설아는 이제 거의 물가에 애를 내어놓은 부모의 눈빛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어제 공부는 했지?”

“공부는 했어.”

정말 ‘공부’는 했다. 다만, 그 내용이 조금… 조금 많이 다를 뿐. 그러나 한설아는 순순히 물러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과목 공부했는데?”

이건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역사.”

“정말?”

“응. 진짜.”

도현이 퍽 당당해 보이자, 한설아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도현은 그 역사가 시험 범위인 세계 고대 문명 파트가 아니라 신라시대였다는 건 비밀로 하기로 했다.

아무튼 역사 공부하긴 했으니까. 그리 생각한 도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했으면 됐지.”

한설아는 적당히 수긍했다. 처음에는 조금 놀랐다만, 생각해보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수업 들은 날보다 안 들은 날이 더 많은 애잖아.’

드라마가 끝나고 나서도 이런저런 활동으로 많이 바빠 보였다. 거기에다가 학교 시험까지 챙기라니. 그건 그녀가 생각해도 너무 가혹한 요구였다.

게다가.

한설아의 시선이 적당히 교과서를 펼친 도현에게로 향했다. 이마에서 콧대, 그리고 턱선으로 이어지는 옆얼굴은 오늘도 완벽했다. 대각선에 앉은 애는 하라는 시험공부는 안 하고 도현의 얼굴이나 흘깃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쟤가 공부할 필요가 어딨어.’

이미 인생 탄탄대로인데 말이다. 공부 좀 못한다고 큰일 나는 건 그녀 같은 이들이었지, 제 옆자리에 앉은 소년은 아니었다. 역시 입학식 대표에 선 건 실기 점수 때문 같았다.

그래도 좀 의외긴 했다.

‘인간미 있는 거 같기도 하고….’

한설아는 의외의 친근함을 느끼며 다시금 교과서에 집중했다. 중학교 첫 시험인 만큼 잘 치르고 싶었다.

잠시 후.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간단한 안내와 격려를 해주고 나갔다. 이후, 일 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기술 선생님이 감독관으로 들어왔다.

“다들 교과서 집어넣어! 책상 서랍에 아무것도 들어 있으면 안 되니까 다시 확인해보고. 걸리면 곧바로 부정 처리할 거니까 꼼꼼하게 확인해. 가방도 뒤로 치우고.”

자리를 정리하는 아이들로 인해 잠깐 소란이 일었다. 한설아도 모두 정리한 후에 가방을 쌌다. 그리고 아침부터 영 믿음이 안 가는 제 짝을 보았다.

“다 치웠어?”

“응.”

“그럼 가방 나 줘. 내가 같이 갖다 놓고 올게.”

“괜찮은데….”

“가는 김에 겸사겸사야.”

“알았어. 고마워.”

도현이 순순히 제 가방을 넘겨주었다. 한설아는 그의 가방을 받고 뒤쪽 아무 자리에나 놓으려다가, 가방에 달린 브랜드 문양을 보고 멈칫했다.

“…….”

한설아는 도현의 가방을 제 가방 위에 공손히 올려놓았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자.”

잘 깔려 있어라, 내 가방아. 주인이 가난해서 미안하다. 한설아는 소소한 위로의 말을 건네며 자리로 돌아왔다.

“맨 앞자리는 예비종 치면 뒤로 시험지 넘겨. 본종 울리기 전까지는 시험지 펴보지 말고.”

드디어, 중학교 첫 시험의 시작이었다.

* * *

수학까지 시험이 끝났다. 다음 시간은 국어 시험이었다. 그리고 그사이의 쉬는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조용히 다음 시험을 준비하는 아이들이 속한 부류로, 대부분 성실한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내내 공부하지 않고 버티다가 벼락치기로 쉬는 시간에만 공부하는 아이 몇몇도 간혹 속해 있었다.

두 번째는 몇 분 더 본다고 인생이 달라지지 않는다며 수다 떨거나 나가 노는 아이들이었다. 여기엔 자기는 이미 가망 없다 하고 다니는 몇몇 염세주의자들이 끼어 있다.

세 번째는.

“12번은? 그거 정답 뭐 체크했어?”

“난 3번.”

“헐, 나도.”

서로의 답안지를 비교하며 답을 확인해보는 아이들이었다. 얼마 후면 알 수 있을 텐데 굳이 바로 맞춰보는 건 왤까. 한설아는 의문이 일었다.

“도현쓰! 넌 몇 번 골랐어?”

“나? 난 4번.”

“엥?”

“헐, 도현아. 너 틀렸나 봐.”

“그래?”

아이들의 말에도 도현은 별 신경 안 쓴다는 듯이 가볍게 대답했다. 한설아는 슬쩍 제 시험지를 확인해 보았다.

‘…나도 3번이네.’

보니까 헷갈려서 3번과 4번 중에서 고민했던 문제 같다. 여전히 확신은 안 섰다. 그래도 다른 아이들 다 3번 고른 거 같으니… 이게 맞는 거겠지?

“에이, 한 문제 틀린다고 인생이 망하진 않아!”

“하하. 난 괜찮아.”

서일준이 도현을 위로한답시고 어깨를 두들기자, 그가 유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뒤로도 도현의 주위에서 답을 맞춘다며 시끄럽게 떠들던 서일준은 3교시 시작종이 울리자 자리로 돌아갔다. 한설아도 문제집을 치우고 숨을 내쉬었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시험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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