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58)화 (359/582)

제358화. 종영, 그리고 (13)

탁탁, 탁.

마지막 시험까지 모두 끝나자, 각 반 반장은 교무실에 들러서 답안지를 가져왔다. 그리고 칠판 앞에 선 한설아는 손에 들린 답안지와 칠판을 번갈아 보며 답을 써 내려가는 중이었다. 그녀의 손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아이들의 희비가 엇갈렸다.

탁.

다 썼다.

익숙하지 않은 판서를 하려니 손가락이 조금 저렸다. 주물거리며 팔을 내리는데 누군가 훅 다가와서 답안지를 빼앗았다.

“잘못 적은 거 아니야?”

서일준의 말에 한설아는 불안해졌다. 뭐 잘못 썼나. 그런 생각에 눈가를 찡그릴 때였다.

“뭐야… 진짜 3번이 아니라고?”

“뭐 때문에 그래?”

“아니, 이거. 12번. 이게 왜 3번이 아니지? 반장, 너 이거 몇 번 골랐어?”

“나 3번.”

“그치!”

“어, 나도 3번 했는데!”

다른 아이들도 다 비슷한 모양이었다. 아마 공부 좀 했다, 싶은 애들은 모조리 3번을 찍은 거 같았다.

“답이 잘못 나온 거 아니야?”

누군가 제기한 의혹은 아이들을 흔들었다. 그런 건가? 근데 답이 잘못 나오기도 해? 아까 국어 시간 때 지문 잘못 나와서 방송으로 수정하기도 했잖아. 답안지도 틀릴 수 있지. 여러 의견이 오가자, 서일준이 결심한 낯으로 말했다.

“내가 수학 쌤한테 갔다 옴.”

“엥. 네가 웬일임?”

“야, 일쭌이 부반장이잖아.”

“맞다. 그랬지.”

“야! 니들 내 취급이 좀 그렇다?”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한설아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답안지가 잘못 나왔을 리는 없을 거 같은데…. 그때 서일준이 그녀를 불렀다.

“반장! 너도 갈 거지?”

“나도?”

“너도 3번 찍었다며.”

“그렇긴 한데….”

어물거리던 그녀는 결국 어깨를 으쓱하며 알겠다고 했다. 물어본다고 큰일 나는 것도 아니니까. 이대론 반 애들이 납득할 거 같지도 않고. 그리고 그녀가 보기에도 정답자가 한 명도 없는 건 이상….

“…….”

“반장, 뭐 해. 빨리빨리 가 봅시다.”

“어, 으응.”

점수에는 관심이 없는 건지, 소란에서 동떨어진 채 창밖을 보는 소년에게서 한설아가 시선을 뗐다. 그리고 서일준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인데.

“…쌤!”

서일준이 자동 애교를 장착하며 수학 선생님에게 들러붙는 걸 보던 한설아가 느릿하게 걸어가다가 누군가와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응, 설아도 안녕.”

한 학년 위의 선배였다. 예중 특성상 선배들과 엮일 일이 많다 보니 한설아도 자연스럽게 몇몇 선배들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답안지 가지러 온 거야?”

“아, 그건 아니고… 답안지에 오류가 있는 거 같아서요.”

“정말? 무슨 과목인데?”

“수학이요.”

흥미로운 듯 심드렁한 듯 묻던 선배가 멈칫했다.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혹시 선생님 성함이…?”

“정영헌 선생님이세요.”

“아.”

짧은 탄식에 한설아가 의아해할 때였다. 데시벨이 높아 유독 귀에 박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니, 이게 왜요?”

자연스레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을 준 한설아는 일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건 선배도 마찬가지인지 에구,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너네도 당했네.”

“당해요?”

“정 쌤 유명해. 절대 백 점이 나오지 않게 시험 문제 내시는 걸로.”

“…네?”

“우리도 작년에 정 쌤이 수학이었는데, 만점자 한 명도 안 나왔어.”

“네? 왜요?”

“몰라. 쌤 말로는 뭐… 수학에 완벽은 없다던가. 완벽해 보여도 언제나 의심해야 한다던가… 뭐라는지는 사실 나도 모르겠고.”

“아….”

“아무튼, 수고해라. 나 심부름 중이라.”

“아, 네. 감사합니다.”

얼떨떨하게 선배를 배웅한 한설아는 씩씩거리며 돌아오는 서일준을 보았다. 그는 뭐가 그렇게 분한지 두 눈이 붉게 충혈된 채였다.

“짜증 나! 이거만 맞으면 백 점이었는데!”

그가 공부를 꽤 잘한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으며, 한설아는 어설프게 위로해 보았다.

“방금 현성 선배한테 들었는데, 수학 선생님 원래 백 점 안 나오게 문제 내신댔어. 작년에도 백 점 없었대. 너만 그런 거 아닐 거야.”

“…정말?”

“응.”

“하씨… 나 진짜 이번 시험 일등하고 싶었단 말이야.”

“역사랑 국어는 잘 봤어?”

“둘 다 백 점이지, 뭐.”

재수 없… 아니, 한설아는 비죽 튀어나오는 감상을 내리눌렀다.

“수학 그거 한 문제 틀린 거면 괜찮을 거 같은데… 다른 애들도 틀렸을 거 아니야.”

“흠, 큼. 그런가?”

그녀는 역사에서 두 개, 국어에서 한 개 틀렸건만 어째서 이 기만자를 달래줘야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한설아는 의문을 표하는 대신 서일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렇게 저보다 세 문제는 더 맞은 기만자를 어르고 달래며 반으로 들어간 한설아는, 때마침 고개를 돌린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일쭌! 쌤이 뭐라셔!”

“뭐야, 뭐래?”

“설아야! 교무실 다녀왔어?”

몰려드는 아이들 틈에서 한설아는 문득, 정말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내내 찝찝했던 것. 뭔가 놓치는 거 같았던 것….

한설아가 성큼성큼 걸어서 도현에게로 향했다.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너….”

“?”

“수학, 채점했어?”

“응.”

“혹시 나 봐도 돼?”

“상관없어.”

이게 왜 궁금한 거지, 하는 얼굴로 시험지를 건네준다. 건네받은 시험지에 아무런 표식이 없자 한설아가 눈을 깜빡였다.

“채점 표시 안 한 거야?”

“아. 난 틀린 것만 체크해서.”

“아하…?”

적당히 반응하며 시험지를 넘기던 한설아의 말끝이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곧, 1번부터 마지막 번호까지 아무런 표시 없이 깨끗하다는 걸 깨달았다.

“…역사랑 국어도 봐도 돼?”

“마음대로 해.”

그러나 눈을 크게 뜨고 샅샅이 찾아봐도, 어째 채점 표시는 고사하고 정답 기입 외에는 푼 흔적 하나도 없었다. 한설아는 깨끗하기만 한 시험지를 보다가 곱게 내려놓았다.

진정한 기만자는 여기 있었다.

* * *

오전 9시.

카페에서 모임을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각. 서울의 한 카페에 마스크를 쓴 장정 한 명이 들어섰다. 그가 무언갈 찾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돌리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여성이 손을 흔들었다.

“일찍 오셨네요.”

자연스럽게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은 남자, 신휘민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두 사람은….”

“오고 있대요. 아, 마스크 벗어도 돼요. 여기 제가 자주 이용하는 카페라서.”

확실히. 화장기 하나 없이 후드티에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노트북을 두드리는 모습을 보니까 그래 보이긴 한다.

“조금 있다가요.”

그래도 괜히 구설수에 오르는 것보단 조금 답답한 채로 있는 게 낫다. 마스크는 남은 멤버가 도착하면 벗을 예정이었다. 그가 그동안 스캔들 한 번 안 터진 건 이런 세심한 노력 덕분이었다.

“마실 건 시키셨어요?”

“일단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고 있었는데… 휘민 씨 마시고 싶은 거 있어요? 제가 사줄게요.”

“그럼 선배님한테 조금 얻어먹어 볼까요?”

그에게 돈은 크게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런 것에 구애받기에는 너무 많이 벌었으니까. 이건 일종의 사회생활이었다. 거절하는 건 오히려 선 긋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말이다.

역시. 그런 모습이 나쁘지 않은지 서지민이 즐겁게 웃었다.

“뭐야, 연예계로 따지면 휘민 씨가 선배님이죠.”

“오늘은 연기 스터디잖아요.”

“그건 그렇네. 똑똑하다, 휘민 씨.”

노트북을 덮은 서지민이 담백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짜 사주려는 모양이라서 신휘민은 군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서지민의 단발머리가 후드에 푹 파묻혀 있었다.

“뭐 마실래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부탁드려요.”

“더 비싼 것도 괜찮은데!”

“제가….”

“아, 알아요. 체중 조절해야 한다고요.”

알아서 대답하는 그녀에 신휘민이 입을 다물었다. 정답이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우리나라 아이돌들 정말 고생이 많아요. 살 좀 찌면 어때서. 그녀의 말에 신휘민은 속으로 반박했다. 살찔 거면 아이돌 그만둬야죠. 남들의 이상향이 되겠다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았나.

하지만 그도 눈치가 있었기에 입 다물고 수긍했다. 언젠가 그가 이런 요지의 말을 했을 때 말문이 막힌 리더가 ‘휘민아, 너는… 너는 이 새끼야, 사람의 마음이 없어’라고 비난한 전적도 있었고 말이다.

그들이 커피를 가지고 돌아갈 때, 때마침 카페 안으로 누군가 들어섰다. 커다란 인영과 그 반절 정도 되는 인영이었다. 둘 다 모자를 눌러쓴 채였지만, 딱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여기, 여기!”

서지민이 신이 나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이 이쪽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떻게 같이 왔어요?”

“선배님이 저 픽업하셨어요.”

신휘민의 질문에 대답한 건 도현이었다. 도현의 말에 신휘민은 수긍하면서도 의외라고 생각했다. 집 주소도 아는 사이였나.

“두 사람은 뭐 마실래요? 제가 쏩니다!”

서지민이 두 사람을 이끌고 계산대로 가는 걸 신휘민이 느긋하게 구경했다. 조금 떨어져서 보자니 헛웃음이 나왔다.

‘저게 가린다고 가린 건가.’

나름 꽁꽁 싸맨답시고 한 것 같긴 한데, 전혀 일반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서지민은 모자를 쓴 건지 얹은 건지, 작은 두상이 모자에 잡아먹힌 채였고, 강이든은 피지컬부터가 달랐다. 그리고 이도현은 가려도 가려지지 않는 존재감이 독보적이었다.

그렇게 남 일처럼 구경하고 있자니 그들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어느새 서지민이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던 구석 자리는 세 남자와 한 여자로 꽉 차게 되었다.

서지민이 조금 감격한 듯 말했다.

“드디어 하네요. 스터디.”

그 말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잡기 참 힘들기도 했다 싶었다.

잠시 후.

하루가 멀다 하고 얼굴을 마주하다가 오랜만에 보니 괜히 반가웠던 이들은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간단한 근황을 이야기했다. 그들의 이야기 주제는 어느새 도현의 학교로 향해 있었다.

별다른 일 없었냐는 말에 고민하던 도현은 한 가지 이야기를 꺼냈다.

“저번 주에 중간고사였어요.”

“뭐? 중간고사?”

“그러고 보니… 그럴 계절이네. 밖에 벚꽃 피었잖아.”

중간고사 = 벚꽃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낭만적인 거 같기도 하고. 제 감상을 말하니 세 사람이 도현을 요상하게 쳐다보았다. 왜?

“시험은 잘 봤어?”

“그럭저럭이요.”

전 과목 백 점이라 담임 선생님한테 칭찬받았다. 전교 1등이라는 말과 함께. 왜인지 그 후로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저를 전투적으로 쳐다보고, 짝이 기만자라며 중얼대기는 한데… 아무튼.

스물여덟의 기억을 가진 주제에 중학교 1학년 시험 잘 봤다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던 도현은 적당히 대답했다. 

이 주제를 넘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반칙 쓴 느낌에 기분이 좀 묘한데 축하까지 받으면 양심이 따가울 거 같아서였다.

하지만 서지민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시험 끝났으면 말을 하지! 기다려 봐.”

그 말과 함께 사라진 서지민은 조각 케이크 다섯 개와 함께 돌아왔다.

“종류별로 사 왔어. 축하 기념이야.”

“이런. 나도 뭔가 줘야 하나?”

“괜찮아요. 고작 중간고사인데요.”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세 어른은 묘한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보통 갓 중학교 입학한 애가 이렇게 무심하던가. 그 말이 진심인지 도현은 케이크에만 관심을 보일 뿐, 더는 그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케이크를 먹으면서 잠깐 대화가 소강했다. 자연스러운 정적을 깨트린 건 신휘민이었다.

“그래서.”

운을 띄운 그가 천천히 말했다.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죠?”

“오늘 정해봐야죠. 그러려고 모인 거니까. 음… 일단 일정한 모임 날짜부터 정해볼까요? 그게 제일 시급한 거 같은데.”

“정해놓은 날에 스케줄이 생기면요?”

“그럼 그 멤버 제외하고 만나야지. 매번 취소할 수는 없으니까.”

도현은 서지민의 대답에 긍정했다. 그런 식으로 취소하다가는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스터디가 될 수도 있었다.

“일단, 그럼 앞으로의 스케줄을 공유하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변동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그럼 의견 낸 휘민 씨부터!”

“아. 전 아직 컴백 일정이 안 잡혀 있어요. 온탑이 연차가 쌓이기도 했고… 저를 시작으로 하나씩 개인 활동을 늘려갈 거 같은 추세라서요.”

원래 사장은 개인 활동을 반대하는 쪽이었지만, 신휘민이 놀라우리만치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내자 욕심이 생긴 건지 마음을 바꿔 먹었다. 그 결과 리더 형은 지금 솔로 앨범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 후로도 스터디 멤버들은 각자의 일정을 공유했다. 서지민은 이야기가 오가는 영화는 있지만, 빨라도 하반기에 시작하는 거 같았고, 강이든은 아직 뭔가 예정에 없는 모양이었다.

세 사람의 시선이 모이자 도현이 입을 열었다.

“저도 작품 하나 들어가요.”

“정말? 뭔데?”

“근데 그게… 음. 단역이라서요.”

“단역?”

“단역이라고?”

파격적인 선택이었는지 서지민과 신휘민이 눈을 크게 떴다. 강이든만이 동요 없이 흥미로운 낯이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초반에만 등장하는 아역이라고 들었어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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