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59)화 (360/582)

제359화. 종영, 그리고 (14)

“아니, 뭐. 그럴 수 있는데….”

그럴 수 있나?

말과 생각이 충돌했다. 서지민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역할에 귀천이 없다는 거야, 알고 있지만….

‘그건 정론이고.’

말이야 그렇지. 배우 지망생들을 붙잡고 너 주연 할래 조연 할래 하면 전자를 선택할 게 뻔했다. 애초에 주연급 배우와 조연급 배우는 대우부터 달랐다.

그녀만 해도 연예계에 발을 디딘 건 겨우 사 년 정도 되었지만, 한번 크게 뜬 뒤로 주조연 급이 아니면 맡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대로 ‘급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녀만 해도 이런데 상대는 이도현이었다. 아마도, 물론 좋은 이슈는 아니었지만, 전 세계 영화 애호가들이라면 전부 알고 있을 그 이도현 말이다. 노이즈 마케팅도 결국은 마케팅이었다. 그 이유가 긍정적이든 아니든 간에 도현은 전 세계적인 유명인이고 스타였다.

만약 도현이 한국에서 발판을 쌓아 할리우드로 진출한 배우라면 차라리 이해가 간다. 하지만 도현은 시작부터 세계를 무대로 했다. 거기서 갑자기 한국으로 온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이젠 한술 더 떠서 초반에만 등장하는 단역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서지민은 도현을 알다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욕심 같은 게 아예 없는 건가. 아니면 그냥 어려서 그런가.

도현을 캐스팅한 방송국 측이야, 한번 던져본 걸 테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걸 덥썩 문 도현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기 위치를 모르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평소에 행동하는 것만 봐도 거드름이나 허세는 찾아볼 수가 없으니까. 가끔 보다 보면 본인만 본인이 대단한 걸 모르는 느낌이었다.

“왜?”

그 와중에 연기 바보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지 배역에 관해서나 묻고 있다.

“별 이유는 없어요. 그냥.”

음, 하는 소리를 낸 도현이 천천히 말했다.

“구미호뎐도 그렇고 보통 드라마의 주인공은 행복한 결말을 맞잖아요. 중심 격인 남자 주인공은 완벽에 가깝게 그려지거나, 선한 성향이고요.”

“응.”

그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타깃층이 타깃층이다 보니 남자 주인공의 경우 정말 꿈속의 이상형처럼 그려질 때가 많았다. 돈 많고 키 크고 잘생기고 능력 좋고 성격은 몰라도 성향은 선하고 여자 주인공만 바라보고….

“근데 이 드라마에서는 아니에요. 비담은 선과 악으로 나누자면 악에 가까운 데다가… 그 선택으로 인해 파멸하거든요. 남자 주인공의 말로치고는 상당히 파격적이죠.”

그런 말을 하면서 즐겁다는 듯이 웃는다. 정말 재밌어 보여서 서지민은 약간 인지 부조화가 왔다. 우리 착하고 순하고 말랑한 도현이가….

“재밌을 거 같아요.”

“취향 한번….”

신휘민이 중얼거린 말에 도현이 되물었다.

“네?”

“아니, 재밌겠다고.”

“그렇죠?”

성의 없이 둘러댄 말에도 아랑곳 않은 도현이 웃으며 답했다. 서지민은 그 모습을 보고 생각을 정정했다.

그냥 연기 바보라서 그랬네.

“그게 다야? 재밌어 보여서?”

“뭐… 그것도 있고요.”

“다른 이유도 있어?”

“여러모로 적당했거든요. 촬영 날짜도 제가 미국에서 돌아온 후고, 초반에만 등장하다 보니 촬영하는 날도 많지 않고요.”

미국이라는 말에 세 사람이 반응했다. 여기서 나온 이유는 하나뿐이니까.

.

그들도 모두 기사를 접했다. 9월에 개봉이라던가. 그 전에 미국으로 떠나는 모양이었다. 서지민은 순간 앞에서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소년이 낯설어 보였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는 왜?”

신휘민의 질문에 도현이 찡그리듯 웃었다.

“저도 학교는 다녀야죠.”

“아.”

“드라마로 두 달 가까이 결석했고, 영화 일정 때문에 한 달 정도 또 빠질 텐데… 거기서 더 빠지면.”

잠깐 말을 멈춘 도현이 목덜미를 긁적였다.

“그건 그냥 학교 안 다니는 거 아닌가요.”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다고?

서지민은 웃어야 할지 어이없어야 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까는 분명 할리우드 유명인이 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또 학교로 고민하는 중학생 같다.

“어차피 인정 결석일 거 아니야.”

신휘민도 예중 예고 출신으로서 잘 알고 있었다. 자주 해보기도 했고 말이다. 그 말에 도현이 의외로 단호히 말했다.

“그래도 학생은 학교를 가야죠.”

안 그래도 정희운을 피한답시고 쓸데없이 이 주나 더 빠졌다. 도현은 스스로가 불량 학생의 턱걸이에 걸려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더 나가면 안 된다. 그런 도현의 생각을 알 리 없는 서지민이 픽 웃었다.

성실한 게 딱 도현답기도 하고. 여기서 가장 꼰대 같은 게 웃기기도 하고. 여러모로 웃긴 심정이 된 서지민이 고개를 젓고선 물었다.

“그래서 미국에는 언제 가?”

“가기 전에 휴가를 보내기로 해서 먼저 프랑스부터 들를 예정이에요. 아마 여름 방학 시작하면 바로 떠날걸요.”

“그럼 그 전까지는 여유로운 거지?”

“네.”

“잘됐다. 다들 그때까지는 시간 괜찮은 것 같네.”

몇 차례의 토의 끝에 그들은 토요일 아침마다 만나서 스터디를 하기로 했다. 점심 먹고 여유로운 사람은 더 하다가 가고, 바쁜 사람은 먼저 가는 식으로. 출석도 마찬가지였다. 그 주에 가능한 사람이 셋 이상이면 모이는 걸로.

셋인 이유는 서지민 때문이었다.

서지민과 도현이 둘이 스터디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만약 신휘민이나 강이든과 둘이 스터디라도 하는 날엔… 그날 인기 검색어 자리는 맡아 놓은 거다.

대충 정해지자 다음은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였다. 그들은 돌아가면서 대본을 골라오고, 그에 따라 캐릭터를 분석하며, 시간이 나면 연기까지 맞춰보기로 했다. 대본 선정의 첫 타자는 만장일치로 강이든이었다. 여기까지 말이 나오자 오늘 해야 할 일은 끝낸 거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스터디의 본격적인 출발을 축하하며 점심을 같이 먹고 헤어지기로 했다. 식당을 안내한 건 서지민이었다. 이 카페 단골이라더니, 주변 식당가도 꿰고 있는지 한가한 곳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점심은 간단한 브런치 메뉴였다. 도현은 서지민이 추천한 브로콜리 스프에 샥슈카를 시켰다. 서지민은 파스타, 강이든은 필라프, 신휘민은 샌드위치였다.

점심시간에는 꽤 재밌는 얘기가 나왔다.

“팬 미팅을 한다고요?”

“응.”

바로 강이든의 팬 미팅 소식이었다. 서지민이 굉장히 의외란 얼굴로 말했다.

“선배. 선배 팬 사인회만 하지 않았어요?”

“오 년 전.”

“오 년 전에 팬 미팅한 적 있대요.”

도현이 능숙하게 해석해주자 신휘민이 ‘오 년 전?’ 하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는 강이든의 팬 미팅 주기가 퍽 이상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왜요?”

“매니저.”

“매니저 형이 하라고 했대요.”

“언제부터 경우 씨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그거 때문 아닐까요? 휴식기?”

“아… 그럴 수 있겠네.”

도현은 정경우에게 들어서 강이든이 지독한 슬럼프를 겪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번에 슬럼프도 벗어난 겸, 휴식기도 끝낸 겸 팬 미팅을 잡은 모양이었다.

알아서 해석해주고 속사정까지 짚어내자 강이든이 도현을 쳐다보았다. ‘…편하네?’ 하는 얼굴이라서 도현은 그의 버릇을 잘못 들이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선배. 거기 게스트 있어요?”

강이든이 고개를 젓자 서지민이 그럴 줄 알았단 눈빛을 했다. 그러고선 선심 쓰듯이 말했다.

“제가 갈까요? 팬 미팅인데, 동료 배우 한둘쯤은 있어야 하잖아요. 대신 저 팬 미팅 여는 날 선배도 와 주는 걸로. 어때요?”

“귀찮아.”

“아, 선배! 저 말고 친한 사람도 없잖아요!”

그 말에 강이든이 도현을 쳐다보았다. …나? 도현은 조금 얼떨떨하면서도, 왠지 길고양이와 친해진 거 같은 은은한 감동을 느꼈다.

“도현이는 예외죠! …아, 아니다. 저 좋은 생각났어요. 여기 있는 사람 다 가는 거 어때요? 팬들 난리 날 거 같은데. 도현아, 넌 어때?”

“전….”

도현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서지민이 그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잘 생각해 봐. 너도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거 아니야? 미리 예습한다고 생각해. 네 팬 미팅이 아니니까 부담도 덜할 테고. 딱이네.”

“제 팬 미팅이요?”

“그럼 안 할 생각이었어?”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어려서 안 한다지만. 나중에는 팬분들 만나고 인사도 드리고 해야 할 거 아니야.”

강이든의 팬 미팅 얘기를 할 때는 ‘그런 것도 하는구나’ 싶었는데 제 얘기로 넘어오자 당혹감이 훅 차올랐다. 팬 미팅을? 내가?

“저를 보러 오실 분이 있을까요?”

“…진심이니?”

떨떠름한 음성에 도현이 되레 의아한 눈빛을 했다. 신휘민이 저건 글렀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음, 그래…. 아무튼… 이건 너한테도 좋은 기회라는 거지. 원래 모범적인 학생은 예습을 철저히 하는 법이라잖아.”

아무리 그래도 저런 말에 넘어가겠어. 신휘민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결심한 듯 굳은 눈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습… 그렇네요. 알겠어요. 저도 갈게요.”

“그걸 넘어간다고?”

“네?”

“아니… 아니야.”

“형은요? 형도 올 건가요?”

신휘민은 잠시 머리를 굴렸다. 강이든은 연예계에서도, 그리고 일반인에게도 친구 없기로 유명한 배우였다. 정확히는 연예계에서는 마이웨이로 소문난 거고, 일반인들에게는 신비주의 컨셉으로 인해 사생활이 공개되지 않은 거지만 말이다.

거기서 돈독해 보이는 우정이라….

“언제냐에 따라 달라질 거 같은데.”

가서 나쁠 건 없겠다 싶었다.

“날짜 정해지면 알려주세요. 갈 수 있으면 갈게요. 그리고.”

강이든의 시선을 느끼며 신휘민이 방긋 웃었다.

“팬 미팅에서 뭐 해요?”

“아직.”

“아직 안 정했다는 거죠? 그러면,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신휘민은 본디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본인이 워낙 잘난 탓에 그런 일이 거의 드물었지만… 드라마 촬영 때부터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는 솔직히, 일방적인 도움을 받고 있었다.

“팬 미팅에서 장기 자랑 하나는 해야 할 거 아니에요? 제가 일일 댄스 강사 해줄게요. 그거 콘텐츠로 만들어서 팬 미팅 오프닝에 틀고… 끝날 때 선배님이 등장해서 춤추면 딱 좋을 거 같은데. 어때요?”

빚도 갚고. 겸사겸사 인맥이랑 이미지도 챙기고 말이다.

거절은 거절하겠다는 얼굴로 웃으며 신휘민이 제안했다. 그에 서지민이 감탄했다. 역시 아이돌. 어느 부분에서 팬들이 좋아하는지 꿰뚫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휘민 씨는 천재야.”

“그렇죠?”

“싫….”

“소속사에서 재롱 하나쯤은 준비하라고 했을 텐데요. 아니에요?”

날카로운 질문에 ‘이든아, 노래 한 곡, 아니, 세 곡만 준비하자. 알았지?’ 하며 사정사정하던 매니저가 떠오른 강이든이 입을 다물었다.

“동의하시는 거죠? 그럼 날짜부터 잡을까요? 연습실은 제가 아는 곳 있으니까 거기로 가요.”

“우리도 갈까요, 휘민 씨?”

“구경 오셔도 상관없어요. 아니면 아예 스터디 날 오후에 할까요?”

“그거 좋다!”

강이든만 빼놓고 강이든 팬미팅 계획이 착착 이루어지고 있었다.

“서프라이즈로 가죠. 이든 선배. 아무한테도 알려주면 안 돼요. 알겠죠?”

포기한 건지 뭔지. 무표정한 낯의 강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스터디 멤버들이 강이든이 춤에 소질이 있다는, 의외의 사실을 깨닫고 놀라워한 건 그다음 주의 이야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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