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62)화 (363/582)

제362화. 종영, 그리고 (17)

도현은 일순 고민에 빠졌다. 

이럴 때는 ‘역시나’와 ‘예상 밖’ 중에 뭐가 더 적절할까.

월요일이 되자 중학교 애들은 정말 ‘역시나’ 도현을 둘러싸고 온갖 질문을 쏟아냈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왔음에도 잠깐 어지러울 정도였다.

‘예상 밖’이었던 건 그 기간이었다. 도현은 하루 정도면 분위기가 정리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는 무슨. 어느새 금요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도현은 순순히 인정했다.

이건 조금 예상 밖이다.

역시 요즘 중학생들은 알기 어렵다고 생각하며 어디서부터 변수가 생겼을지 가늠해 보았다. 뭐. 사실 나올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친분.

그간 도현은 학교에서 스터디 멤버들과의 관계를 일부러 건조하게 표현했다. 감흥 없는 표정과 무관심한 목소리는 중학생 아이들을 속여 넘기기엔 충분했다.

그 결과. 그간 아이들은 스터디 멤버들의 관계를 비즈니스 동료 사이 정도로 받아들였다. 모두 도현이 의도한 대로였다.

‘그런데 팬 미팅을 했지.’

우리 진짜로 친해요, 를 사방팔방 알린 거나 다름없었다. 도현이 미간을 좁혔다. 여기까진 고려를 못 했는데. 명백한 실수였다.

그러다 한숨을 삼켰다.

‘지금 후회해봤자 뭐 하겠어.’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었다. 사실 후회스럽지도 않았다. 그렇다기엔 그날 너무 즐겨버렸다.

게다가.

- 너… 너, 정말.

무대 아래서 배신감에 찬 눈으로 저를 보던 얼굴이 떠오르자 한 터럭 남은 양심이 찔렸다. …지민 누나도 나름 재밌어하지 않았나. 결국 마지막 남은 양심마저 버린 소년이 뻔뻔히 생각했다.

일단 후회는 없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도현은 성자가 아니었고, 후회하지 않을 일에서 비롯된 원치 않은 귀찮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만큼 긍정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와, 속눈썹 긴 거 봐.”

“너 마스카라한 거 아니지?”

몇 번 얘기를 나눠본 적도 없는 선배들이 친근한 척 그를 둘러싸고, 애완동물 대하듯이 여기저기 건들며 장난치는 이 상황이 달갑진 않단 소리였다.

차가운 눈빛을 숨기기 위해 미소를 머금었다.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자 그들은 알아서 받아들였다. 꺄르르 웃어대는 게 퍽 즐거워 보였다. 멀리서 자리를 빼앗긴 한설아가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이게… 일주일째던가.

관심과 호의의 탈을 쓴 무례를 견뎌낸 게 벌써 일주일이나 됐다니. 도현은 조금 안타까워졌다.

본래도 도현과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그간은 조금 자제하는 분위기였다면, 지금은 완전히 고삐 풀린 망아지들 같았다. 

게다가 저돌적인 태도 하나만 있어도 대하기 어려운 편인데 그들은 선배라는 위치까지 등에 업고 있었다. 공감할 수는 없지만, 이곳에는 나름 권력처럼 작용하는 그 위치 말이다.

한두 살 많은 게 대체 뭐가 대수인지. 한두 살은 무슨, 스무 살은 많은 이들과도 심심치 않게 친구를 먹은 도현에게 그들은 기형적으로 보였다. 그럼에도 불만을 표하지 않는 건 삶의 방식이 다양하단 걸 아는 탓이었다. 

도현도 알았다. 그들과 어울리고자 한국에 왔으니까 적응해야 할 건 바로 그였다.

하지만… 어디까지?

도현은 아직 그 기준선을 잡지 못한 채였다. 어디까지가 선배라는 이유로 물러서야 하고, 어디부터가 선을 그어도 괜찮은 건지. 도현은 멋대로 제 머리카락을 흩트리는 손길을 자연스레 밀어내며 생각했다.

퍼스널 스페이스의 개념이 없는 건 그렇다 치고, 이들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그들이 아직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라는 것, 그리고 도현의 뒤에 따라붙는 스타들의 이름이 열여섯에게 자제심을 기대하기엔 너무 화려하다는 것 모두 이해는 한다.

다만, 이해한다 해서 귀찮은 게 갑자기 안 귀찮아지는 게 아니고 불편한 게 마법처럼 편해지는 게 아닐 뿐이었다.

반 애들이 이쪽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유명한 사립 예중인 만큼 학생 수준이 높긴 하지만, 어딜 가도 흑색 무리는 있듯이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제 주변을 무단으로 점거한 이 선배 무리는 교내에서 불량한 축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물론 공인을 꿈꾸는 이들이 많다 보니 선을 넘지는 않는다. 하지만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굴다 보니 더 거슬렸다. 막 나가면 그냥 쳐내기라도 할 텐데 그러기도 어려웠다.

불쾌하다.

도현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저로 인해서 반 아이들이 피해를 받는 이 상황이 말이다. 불쾌함을 삼킨 도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선배, 곧 다음 교시 시작해요.”

“응? 괜찮아, 괜찮아! 조금 늦어도 영어 신경 안 써~.”

“아 다음 영어야? 개 싫다. 늦게 들어가자.”

도현이 고개를 틀어 서랍장에 기대서 있는 한설아를 보았다. 도현의 검은 두 눈에 한가득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한설아가 괜찮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그들은 결국 종 치기 직전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수업 열심히 들으란 말에 도현은 예의 바르게 웃으며 대답을 돌려주었다.

“…미안해.”

도현은 드디어 제 자리에 앉는 한설아를 보며 조용히 말했다. 한설아가 손을 내저었다.

“그게 네 탓이겠어? 괜찮아. 그리고 우리가 뭘 어쩌겠어. 선배인데.”

선배. 참 거슬리는 단어다. 

델마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던 게 이곳에서는 도현의 행동을 제한했다.

“너무 마음 쓰지 마. 저러다 말겠지.”

정말 그럴까.

교과서에 시선을 고정하며 도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어쩐지 아일라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철들기 전의 아일라 말이다.

“너무 힘들면 내가 현성 선배한테 말이라도 해볼까? 도와주실지도 모르잖아.”

“걱정은 고맙지만, 괜찮아.”

괜히 그녀를 끌어들여 제2의 헤더를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꼭 그렇게 되리란 보장은 없어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소년은 본디 두 번 실수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미였다.

도현은 미안함을 꾹꾹 눌러 담아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설아야.”

“으, 응?”

초여름의 바람처럼 나긋한 목소리에 어쩐지 당혹스러워 보이는 얼굴이 조금 붉어진다. 어디 아픈가 싶어 물어보려는데 그녀가 조금 더 빨랐다.

“왜?”

“다음 주까지만 참아줄 수 있을까? 다음 주에도 변하는 게 없으면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진심이라는 듯 눈썹을 누그러트린다. 검은 눈동자는 그녀의 눈치를 보듯이 안색을 살폈다. 말문이 막혀 눈만 깜빡이던 한설아가 간신히 한 음절을 뱉었다.

“너….”

말을 흐린 그녀가 갑자기 제 뺨을 때렸다. 짝! 찰지게 울리는 소리에 도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 숨을 내쉰 한설아는 얼얼한 뺨을 느끼며 말했다.

“너 어디 가서 그러고 다니지 마.”

“?”

“…왜냐는 듯이 쳐다보지 마. 진짜 모르는 거 같잖아. …잠깐, 진짜 몰라?”

“뭐를?”

“…….”

한설아는 기막혀하다가, 이내 심각한 낯이 되었다. 때마침 국어 부장이 프린트를 배부하며 선생님은 십 분 정도 늦는다는 공지를 하고 있었다. 한설아는 갈등에 빠졌다.

이걸 말해야 하나?

입에 담기에 너무 낯간지럽고 이상해서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저 표정을 보니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모를 기세였다. 결국 한설아는 눈물을 머금고 자신이 희생하기로 했다.

휙휙. 주변을 둘러본 한설아가 도현을 향해 몸을 낮췄다. 두 사람의 거리감이 좁혀졌다. 그녀가 딱 도현에게만 들릴 만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유명한 건 너도 알지.”

낮게 속삭이는 것에 도현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아는 그걸 착잡한 눈으로 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 그건 알아야지. 아무튼, 넌 심지어 유명한 이유도 유별나. 최연소 베니스 신인상 수상자, 그리고 블록버스터급 할리우드 영화의 최초 동양인 주인공. 심지어 한국에 오자마자 드라마를 대히트 시켰으면서, 너는 화면 밖에서도 결점이 없잖아. …아, 그래. 아니라고? 물론 너도 사람이니까 하나쯤은 결점이 있겠지. 나도 알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이는 너는 조금 다르거든.”

반박하려던 입을 도로 다물자 한설아가 만족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리고선 어린아이에게 눈높이를 맞춰 얘기하듯이, 천천히 말했다.

“이거뿐이면 차라리 나았지. 넌 그런 얼굴에 그런 목소리를 가진 주제에… 친절하기까지 해.”

“그게 왜?”

친절한 건 좋은 거 아닌가. 도현이 고개를 기울자 한설아가 답답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눈을 뜬 그녀는 뭔가 허탈한 표정이었다.

“그래… 사실 너한테는 문제가 없어. 인간이 문제지.”

“저, 설아야. 나도 인간인데?”

“아.”

하도 애들끼리 탈 인간, 탈 인간 해서 실수했다. 한설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겼다. 도현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네 행동에 다른 애들이 착각한다는 게 문제지.”

그래. 사실 한 번쯤은 꼭 말하고 싶었던 문제였다. 벌써 가망 없는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가엾은 영혼이 몇이던가. 이유를 들어보면 다들 너무 그럴듯해서 더 문제였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어서 집에 못 가고 있었는데 우산을 빌려줬다’부터 시작해서 겉옷을 빌려 달라니까 그냥 빌려준다. 제가 무슨 책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더라…. 듣던 한설아는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저를 응시하는 소년을 보았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중일 텐데도 불만 없이 집중한 얼굴이다. 시선이 맞닿자 피하는 법이 없는 검은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해왔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러니까 그러지….’

반 애들도. 그 선배들도.

저러니까 다들 착각하는 거 아닌가. 저런 얼굴로, 저런 눈빛으로, 쓸데없이 친절하기까지 한데 누가 착각 안 하겠냐고.

물론 도현은 그럴 의도가 아니었겠지만, 저렇게 생긴 주제에 드라마에서 툭 튀어나온 사람처럼 구는 건 정말이지… 질이 나빴다. 마냥 친절하기만 한 게 아니라, 다 해줄 것처럼 굴다가 어느 순간 훌쩍 물러나서 사람을 더 안달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더욱.

당사자는 의도하지 않은 채 친구들을 조련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한설아의 심정은 참 착잡했다. 그녀는 튀어나오려는 여러 말들을 눌러 담은 채 한마디만 했다.

“그냥… 너무 잘 대해주지 마.”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린 도현이 물었다.

“누구한테?”

“그냥 다. 애들도, 선배들도.”

한탄처럼 나온 말에 소년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길어지는 침묵에 뭐 잘못 말했나, 하는 불안감이 들 때였다. 도현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그래?”

뭐지. 왜 찝찝함이….

“조언 고마워. 참고할게.”

“으응, 그래.”

분명 원하던 대로 됐는데 왜 이렇게 찝찝한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한설아는 생각했다. 

단연코, 그 말을 그런 식으로 들을 줄 알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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