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 (364)화 (365/582)

제364화. 종영, 그리고 (19)

주변이 조용했다.

도현은 느긋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현도 알았다. 자신이 언뜻 비치는 거리감에 주저하다가도, 구김 하나 없는 옷, 단정한 자세, 차분한 목소리에 다들 소년이 얌전하리라 여기곤 한다는 걸.

웬만한 일로는 화를 내는 법이 없으니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렇게 관대하고, 어쩌면 느긋하게까지 구는 건 오히려 선이 뚜렷해서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그래. 처음 병원에서 나와 세상에 발을 디뎠을 때는 그런 선조차 없었다. 저를 해치고 주변에까지 손을 뻗어도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게 병원에서 소년이 터득한 최선이었으니까.

하지만 소년은 그로 인한 결과를 겪어보며 깨달았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했으니까.

거기다가.

- 너무 잘 대해 주지 마.

그런 소리까지 들었지 않는가. 솔직히 한설아가 그 말을 했을 땐 놀랐다. 약간 향수까지 불러일으키는 말이라서. 미국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기도 하고 말이다.

도현을 상념에서 깨운 건 침착한 목소리였다.

“불편하다고?”

며칠간 도현에게 친근하게 굴었던 선배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쉬이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대처하고 있었다.

“우리가 찾아오는 게 불편하다는 거니?”

원래 계획은 조금 더 당혹스럽게 만드는 거였지만… 예상보다 더 차분한 대응에 생각을 바꿨다. 어쩌면 좋게 말이 통할 수도. 도현은 조금 더 유하게 말하기로 했다.

“유감스럽게 들렸다면 사과할게요. 저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여기 들어오실 때 앞문에서 무언가 보신 적 있을까요?”

폭탄을 터트려놓고 놀란 아이를 어르듯 부드럽게 묻는 말투에 선배들뿐만 아니라 반 아이들까지 표정이 오묘해졌다.

“앞문?”

그들 중에 기억해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도현은 놀라지 않았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고.

“야. 앞문에 뭐 있는데?”

“그….”

갑작스레 집중된 시선에 서일준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이내 키가 큰 남자 선배가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리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타 반 학생 출입 금지요….”

“하아?”

대답과 동시에 그가 아주 어처구니없단 듯이 소리를 냈다. 그리고선 언짢음이 가득 묻어나는 투로 말했다.

“겨우 그것 가지고 이 지랄 떤 거야?”

그는 그 무리에서 제법 영향력 있는 존재 같았다. 부러 큰 목소리로 말하자, 주변에 있던 선배 몇이 동조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야. 도현아. 씨발, 우리가 타 반이냐? 타 학년이지.”

“미친 새끼. 존나 맞는 말 하네.”

그들은 뭐가 웃긴지 낄낄대며 웃어댔다. 물론 도현은 그들의 웃음 포인트에 공감하지 못했다.

“욕한 건 미안한데. 너도 이해해라. 아무리 그래도 선배한테 그딴 식으로 굴면 안 되지.”

두 살 차이일 뿐인데 그는 도현을 가르치려는 듯이 굴었다. 마치 도현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라 실수한 것처럼.

“맞아. 도현아, 우리가 널 예뻐하긴 하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다.”

처음 도현에게 침착하게 되물었던 여자 선배였다. 도현은 납득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렇네요.”

“규칙 때문에 신경 쓰여서 그런 거지? 조금 놀라긴 했는데 괜찮아.”

순순한 대답에 그녀가 조금 더 누그러진 투로 말하자, 누군가 끼어들었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야, 박성연. 왜 네 마음대로 그냥 넘어가냐?”

“아, 애잖아. 실수할 수도 있지. 넌 그것도 못 봐줘?”

짜증스럽게 쏘아붙인 그녀가 도현을 돌아보며 꽤 다정히 말했다.

“얘, 도현아. 그냥 실수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선배들한테 사과하고 끝내자. 쟤는 신경 쓰지 마. 쟤도 너 신경 써주려고 온 건데 그런 소리 들으니까 서운해서 그래. 나중에 뭐라 하면 내가 도와줄게.”

그녀의 말이 이어질수록 긴장하고 있던 반 아이들이 안심한 표정을 했다. 이도현이 사고 칠 때는 망한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선배들이 이번 일은 그냥 넘길 생각인 거 같았다. 그들의 시선이 도현에게로 향했다.

이제 사과만 하면….

“아, 죄송해요.”

분명 사과는 사과였다. 하지만 그걸 들은 선배들도, 반 아이들도 모두 표정이 좋지 못했다.

참지 못한 듯 바람 빠지는 소리가. 실소를 머금은 눈매가. 살짝 가린 손 사이로도 보이는 올라간 입꼬리와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가.

기대한 것에서 묘하게 빗겨 가, 어긋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해가 조금 있는 거 같네요.”

도현은 최대한 원만하게 해결하고 싶었다. 저기서 조마조마한 눈으로 도현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 하는 한설아는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정말 그랬다.

“규칙도 물론 중요하죠. 그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는 안 할게요. 그런데….”

도현이 무척 유감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 질문을 벌써 까먹으신 거 같아서요.”

“이도현…!”

한설아가 말리기 위해 끼어들었지만, 그녀를 시선으로 한번 일별한 도현이 차분히 말했다.

“제가 불편한 거로는 부족할까요, 라고 여쭤봤는데.”

도현은 마치 동의를 구하듯이 박성연을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적어도 겉으로는 무구해 보였다. 심지어는 수업 시간에 손을 들고 발표하는 모범생처럼 단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 기억날까요?”

그 말의 내용이 그들을 비꼬는 것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박성연은 일순 무슨 말을 들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양 굳었다. 누가 더 험한 욕을 하는지 겨루는 보통의 말싸움과 다르게 험한 말 하나 없이 꼬아 말하는 화법에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에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그녀는 사립 예중에 그냥 합격한 게 아니라는 듯 곧 알아들었고, 이내 수치심과 분노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런 식의 비꼼은 처음이라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또한 그녀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선배, 그렇게 화내지 마세요. 저도 마음이 별로 안 좋아요. 사실 꼭 선배들뿐만이 아니라, 여기 자체가 퍼스널 스페이스 개념이 부족한 거 같거든요.”

저걸 무슨 의도로 말했든, 박성연을 더욱 수치스럽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빨리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은근히 호감을 품었던 상대에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편하다는 소리를 들은 게 죽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지난 일주일간 그녀가 마음에 품었던 상대는 그녀를 이런 상황에 던져놓고선, 희고 매끄러운 낯짝을 하고 있었다.

자기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온기 한 점 없는 시선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그녀의 자존심을 완전히 헤집어 놓았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박성연이 한참의 침묵 끝에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너… 실수한 거야.”

“성연아! 박성연, 어디 가!”

“야, 야! 쟤 따라가!”

쾅! 짜증스럽게 문을 열고 나간 박성연에 그녀의 친구 몇이 급히 따라붙었다. 도현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여자 선배들은 모두 박성연을 따라 나간 탓에 남자 선배들밖에 없었다.

도현은 침착하게 그들과 눈을 마주했다.

“곧 수업 시작할 텐데 안 가보셔도 괜찮아요?”

사실 이건, 어느 정도 개수작이었다. 이대로 물러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걸어보는 기대 같은 거 말이다.

도현도 알았다. 그들 중에서 여자 선배들이 자신에게 조금 더 유하며, 호감이 있다는 것을. 그러나 마냥 홀린 듯이 도현을 보던 여자 선배들과 다르게 남자 선배들의 눈빛은 조금 미묘했다. 친해지고는 싶은데, 묘하게 껄끄러운 눈빛. 약간의 시기심과 질투, 열등감….

같은 학년 애들은 그런 눈으로 보는 일이 적던데… 사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들의 머릿속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나보다 어린데 왜?’ 대충 이 정도일까.

우스운 일이다. 나이가 그 경험과 노력에 꼭 비례하는 건 아닌데. 도현은 그리 생각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맘때쯤의 아이들이면 자존심이 이성을 지배할 수 있다. 다비드만 봐도 그랬다. 본인이 들었으면 펄펄 날뛸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며 도현은 그들을 살폈다.

공개된 장소에서 그들을 몰아붙였을 때, 반작용이 오리란 걸 모르진 않았다. 하지만 도현도 아무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도현의 생각은 이랬다.

아무리 자존심이 이성을 지배할 나이라고 해도 지능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학교에서, 나아가 한국에서 도현이 차지하는 위치나 그 유명세를 생각하면 쉽사리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여기가 일반 중학교가 아니라, 예술 중학교임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랬다. 루카나 윈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어릴 때 연예계에 뜻을 둔 아이들은 조금 영악한 구석이 있기도 했고.

아. 걔들은 영악한 게 아니라 그냥 성격이 나쁜 건가. …뭐, 아무튼.

저쪽에서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짓고 있는 한설아에게 괜찮다는 눈짓을 보낼 때였다.

콱!

도현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가장 키가 큰 선배가 멱살을 잡았다. 그로 인해 도현은 강제로 의자에서 몸이 떨어졌다. 단정하게 다린 셔츠가 인정사정없이 구겨지는 걸 느끼며 도현은 조금 안타까워졌다.

지능이 있을 거란 게 그렇게 큰 기대였나.

“야, 윤창석.”

“씨발, 놔 봐. 이 새끼랑 얘기 좀 해야겠으니까. 야.”

그가 위협적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퍼스널 스페이스 개념을 갖다 버리다 못해 신발 바닥으로 짓밟는 수준이었다. 니키와도 이렇게 얼굴을 가까이한 적이 없는데. 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비드가 진즉에 거품을 물었을 테니까.

“너 선배가 우습냐?”

우습다기보단… 부담스러웠다. 한이련과 여우야 키스 장면 수준으로 가까운 거리감에 저절로 미간이 좁아졌다. 그가 아예 도현의 멱살을 끌어당겨 책상 옆에 서게 했다. 허벅지에 밀린 책상이 덜컹거리며 소리를 냈다.

“조금 유명하다고 다른 애들처럼 봐줄 줄 알았냐고, 씹새끼야.”

“야! 미쳤어? 이도현이잖아!”

“야, 야. 창석아, 그만해라. 놔.”

그러나 말리는 말과 행동은 그를 부추기는 훌륭한 연료인 모양이었다. 그가 위협적으로 소리쳤다.

“아- 씨이발, 이도현인 게 뭐! 뭐 어쩌라고!”

“이 새끼 진짜 미쳤네.”

“쟤 좀 떨어트려 봐. 하, 시발. 진짜 뭔….”

도현은 슬슬 피곤해졌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멱살이 잡혀본 적이… 아, 맥이 그랬지. 새삼 떠오르는 기억에 피곤함이 조금 가셨다.

“서, 선배님! 진정하시고….”

서일준이 쩔쩔매며 무어라 말하는 게 보였다. 한설아도 옆에서 거들고 있었다. 조용해지려고 꺼낸 말인데… 오히려 민폐를 끼치고 있다. 이쪽 생태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확실히 패착이다. 하지만….

‘달라질 건 없어.’

어차피 일이 커지는 것조차 상정한 범위 안이었다. 도현은 저와 싸우는 건지, 아니면 그를 말리는 이들과 싸우는 건지 모를 윤창석의 손목을 조심스레 쥐었다.

눈을 슬쩍 돌려 확인하니 곧 선생님이 오실 시간이었다. 그 전까지는 상황을 정리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놔 줄 생각이 없다면, 놓게 만들면 된다. 도현은 더 고민하지 않은 채 행동을 개시했다.

“악!”

멱살을 잡은 손을 밀어내려는 부질없는 시도를 하려는 줄 알고 비웃음이 떠올랐던 얼굴이 당혹으로 일그러졌다. 멱살을 잡은 팔을 꺾은 도현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윤창석을 다른 팔로 받쳐 들었고.

그가 어떠한 반응을 하기 전에 몸을 일으켜 세워 등을 밀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향하는 곳은 명백히 문이 있는 쪽이었다.

한순간에 일어난 일에 도현을 제외한 모두가 혼이 나갔다. 등이 밀린 윤창석도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한 채 반과 복도를 가르는 빗금 앞까지 섰다. 그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문을 붙잡을 때였다.

“자. 선배. 안녕히 가세요.”

“뭔 개….”

“응? 삼 학년이 왜 여깄어?”

욕설을 퍼부으려던 윤창석이 뚝 멈췄다. 반짝거리는 머리를 자랑하는 역사 선생님이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그야말로 귀신같은 타이밍이었다. 

그 순간, 거기서 태연한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다. 한 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역사 선생님이었고.

“잠깐 놀러 오셨어요. 이제 가신대요.”

한 명은 이도현이었다.

“일 학년 교실에서? 아무튼 빨리 가라. 수업 시간인데 아직까지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네.”

언뜻 이를 가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도현은 분한 눈으로 저를 보는 윤창석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모르겠지만, 멱살이 잡힌 순간부터 도현은 선생님의 위치를 파악한 상태였다. 그리고 아슬한 순간을 노려 그를 문으로 이끌었다. 너무 빠르면 복도에서 실랑이가 있을 테고, 느리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테니까. 그건 별로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도현은 엉거주춤 반을 나오는 선배들을 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덕분에 안 혼났죠?”

멱살을 잡은 장면을 안 들켰다는 소리임을 알아들은 이들의 표정이 굉장히 이상해졌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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