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5화. 종영, 그리고 (20)
“뭐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해? 드디어 공부할 생각이 생겼어?”
껄껄대며 말하는 선생님에도 아이들은 어설프게 웃을 뿐이었다. 정작 이 상황의 원인은 반듯하게 앉은 채로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 모습을 보며 ‘역시 탈 인간’이라며 내심 감탄했을 한설아는 충격과 공포에 빠져 넋이 나간 상태였다.
방금 그러니까… 이도현이 폭탄을 터트렸고, 웃는 낯으로 선배들을 탈탈 턴 것도 모자라, 멱살이 잡혔는데, 그걸 무슨 액션 영화처럼 제압해서 반 밖으로 보내고, 선배들을 내쫓았다고?
뭔 개소리야.
누군가 한설아한테 이런 말을 했다면 그녀는 단숨에 상담 교실을 추천해줄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미궁에 빠트리는 건, 이게 개소리가 아니란 사실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의자에 앉을 땐 저래야 한다는 것처럼, 교본에 나올 듯이 완벽한 자세로 앉은 소년이 보였다. 그 소란의 주인공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조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얜 뭐지.
그건 반 아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모르긴 몰라도, 쫓겨나듯 나간 선배들도 비슷할 거라는 데 이번 기말고사 점수를 걸 수도 있었다.
한설아는 초조하게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역사 선생님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오늘 집중력 아주 좋아, 어? 2반 앞으로도 이렇게만 해.’라며 만족스러워했다. 덕분에 진도가 쭉쭉 나가 종 치기 오 분 전에 수업이 끝났다는 건 반길 만한 일이었다.
“잘 쉬고, 점심밥 맛있게 먹어라.”
“안녕히 가세요!”
이구동성으로 외친 아이들이 역사 선생님을 빠르게 보냈다. 탁. 그가 사라지자 모두의 고개가 약속한 것처럼 한쪽으로 돌아갔다.
흠칫. 도현은 그 광경에 어깨를 떨었다. 조용히 고개만 돌리는 광경은 상당히 기괴했다.
그리고.
텁.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양 도현의 어깨를 잡는 손길에 한 번 더 놀라야 했다. 그 손의 주인은 복잡한 표정의 한설아였다.
“너….”
“?”
한설아는 도현이 의문 어린 표정을 짓고 있단 걸 믿고 싶지 않았다. 이, 겉만 멀쩡하고 속은 맛이 간 애가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마저 쓸데없이 완벽한 낯짝에 괜히 물러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답답함과 불가해함이 섞인 질문이었다. 다만, 상대는 그걸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거 같았는데.
“아.”
의미를 알 수 없는 짧은 탄식 이후에.
“소란을 일으켜서 미안해.”
사과의 말이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침착하게 시선을 돌려, 반 아이들을 한 명씩 눈에 담은 후에.
“다들 미안해. 나 때문에 시끄러웠네.”
미안하다는 듯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핀트가 나가도 단단히 나간 반응에 한설아는 침묵했다.
하지만 그건 어떤 면에서는 꽤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는데. 맥이 탁 풀리는 기분과 동시에 허탈함이 차올랐기 때문이었다. 분명 아까까지는 엄청 심각한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어떤가 싶어졌다.
가장 곤경스러울 당사자가 문제의 상황에는 놀라우리만치 관심이 없고 오로지 그들에게만 미안함을 표하니 허망해지지 않기도 어려웠다.
그 행동은 그녀뿐만 아니라 2반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진짜 뭐 하는 새끼지, 하는 경악 내지 감탄.
그리고.
‘선배들한테는 그렇게 차가웠는데.’
‘아까 눈 하나 깜짝 안 하더니 우리 눈치는 보는 거야?’
하는 감상을.
남들에게는 냉정한 상대가 나에게는 다정하게 군다는 건 꽤 달콤한 일이었다. 그 상대가 어디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유명한 배우쯤 된다면 더욱 말이다. 마치 그들이 특별한 존재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들게끔 했다.
결과적으로.
“난 괜찮아. 오히려… 아! 너희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 사실 속 시원했어.”
한 명이 용기 내어 도현의 편을 들자, 그 후로는 거칠 게 없었다. 다들 서로 비슷한 생각이란 걸 확인한 덕분이었다.
“솔직히 이게 쟤가 미안할 일인가? 내가 보기에도 선배들이 선 넘었던데. 너희도 다 불편했잖아.”
“아, 맞아. 우리 반도 아니면서 매 시간마다 와서 자리 차지하는 건 좀….”
“말은 못 했는데 나도 싫긴 했어. 솔직히 이도현이 총대 안 멨으면 계속 그랬을걸.”
여론이 호의적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뭐지. 어느 정도 질타를 예상했던 도현은 떨떠름해졌다. 그런 도현의 옆에 다가온 서일준이 큼 헛기침을 했다.
“야야, 걱정하지 마. 내가 봤을 때 넌 잘못 없어. 선배들이 뭐라 하면 내가 도와줄게.”
에이씨. 부끄러웠는지 괜히 제 머리카락을 털어대는 서일준에 그의 친구들이 신이 나서 놀려대기 시작했다.
“오, 일쭌이~ 멋진데?”
“캬. 넌 잘못 없어, 내가 도와줄게! 간지 오졌고요.”
“크흐! 오지고 지리고요.”
“저 웬수새끼들이…?”
서일준이 왁왁거리기 시작하면서 얼어 있던 분위기가 완전히 풀렸다. 한설아는 잠시간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어깨를 짚었던 손에 힘을 뺐다.
“음, 일단… 내가 실수했어. 묻기 전에 사과가 먼저였는데. 미안해.”
스르륵, 어깨에 올라갔던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나온 말에 도현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안하다고? 네가 왜?
내가 모르는 사이 선배들이랑 결탁이라도 한 것인가?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면 왜?
그 궁금증은 금방 풀렸다.
“내가 반장인데 더 신경 쓰지 못했어. 네가 그렇게까지 불편해하는지 몰랐고… 아니, 사실 알긴 했는데. 나는, 엄, 그렇게 말할 용기가 없었거든.”
도현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침음을 흘리던 도현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건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그 말 그대로 돌려주면 되지?”
“뭐?”
“너도 사과할 일 아니라고. 타 반 출입 금지인데 들어온 것도 그 선배들이고, 네가 몇 번 싫다는 티 냈는데 그거 무시한 것도 선배들이고, 불편하다고 했는데도 밀어붙인 것도 그 선배들이고… 아. 그러네.”
한설아는 말하는 도중 깨달았다. 눈앞에서 일어난 일들이 너무 놀라워서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차분히 생각해보니 다 그쪽 잘못이었다. 한설아는 새삼스럽게, 놀란 눈으로 저를 보는 소년이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침착하게 행동했단 걸 깨달았다. 이렇다 할 실책이 잡히지 않을 만큼이나.
그녀는 미약한 소름을 느꼈고 딱 그만큼 경탄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불편하다고 할 수도 있지. 아무래 선배라도, 그 정도도 말 못 하는 게 더 이상하잖아?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하든가. 불편하다고 한마디 했다고 멱살을 잡는 쪽이 이상한 거 아니야?”
“반장 존나 사이다네.”
“난 그 선배 원래도 별로였어. 좀… 가오 잡잖아. 으, 개싫음.”
“난 저번에 인사 제대로 안 했다고 눈치 줬어. 여기가 뭐, 군대도 아니고….”
두런두런 저마다 쌓아뒀던 속내를 내뱉기 시작했다. 도현은 반 아이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이래도 되는지 불안해하는 아이들은 있었으나, 도현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도현은 황당해졌다.
내 편을 들 줄은 몰랐는데.
그게 선배들에 대한 불만에서 기인한 것이든 도현을 향한 호의에서 기인한 것이든. 이 상황 자체는 분명 의외였다.
문제는, 황당하긴 한데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거였다.
“나 근데 아까 이도현 미친 줄.”
“아, 인정.”
“나도 그 생각함.”
…생각하기 무섭게 튀어나온 말에 도현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도현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심하겐… 음. 심하겐 안 한 거 같은데. 형은 보통 멱살이 잡히면 온건하게 관절을 꺾는 대신 가운데에 위치한 급소를 차 버렸으니까….
응. 역시 심하겐 안 했다. 도현은 다시 안심하고 얼굴을 풀었다. 그러나 서일준이 진지하게 내뱉은 말에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미친놈처럼 멋있긴 했지.”
서일준이 원래 과하게 도현을 동경하기는 했다. 그러니까 이것도 아마 그것의 일환….
“레전드는 그거 아니냐. 반 밖에 내다 버린 거. 무슨 분리수거 하는 줄.”
“끄흡, 분리수거 미쳤냐.”
“그거 타이밍 개쩔긴 했음. 너네 선배들 표정 봤어?”
“아, 나 봤어.”
나도, 나도. 여기저기서 동조의 목소리가 나왔다. 여태껏 어떻게 얌전히 있었나 싶을 정도로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난 웃을 뻔했는데 참았잖아.”
“어, 시발. 나도 뿜을 뻔함.”
“의문의 웃참 챌린지.”
“미친놈아, 웃기지 마.”
흐극흐핳헉하며 이상한 소리로 웃던 아이들이 고삐 풀린 것처럼 저마다 감상을 쏟아냈다.
“조곤조곤 촌철살인 하는데 도른 놈인 줄.”
“그래? 나도 앞으로 그렇게 화내볼까.”
“그것도 와꾸가 필요해요~.”
“왱, 나 기엽짜낭.”
“…내 귀가 맛이 갔나?”
“우, 우웨엑.”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시끄럽게 떠들던 아이들은 급기야 도현의 성대모사까지 하기 시작했다.
“제가 한 질문을 벌써 까먹으신 거 같아서요.”
“캬아!”
“제가 불편한 거로는 부족할까요?”
“크흐! 명대사다, 명대사!”
“오늘부터 우리 반 급훈이다! 야, 서기! 적어, 적어!”
“…….”
이 정도면 그냥 돌려 까는 거 아닌가.
확실히 가능성 있었다.
수업 종이 쳤다.
“야, 거기 빈 공간!”
“얼른 막아라, 이 인간 울타리들아! 일을 하란 말이야!”
서일준이 넥타이로 철썩철썩 내리치자 아이들이 아이구, 나으리, 때리지 마십쇼 하며 더 가까이 뭉쳤다. 현재 아이들은 선배들이 도현에게 접근할 수 없도록, 인간 울타리를 자처하며 똘똘 뭉쳐서 식당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어찌나 삼엄하게 경호하는지 도현의 머리털도 안 보일 정도였다.
‘어차피 괜찮을 텐데.’
그러나 애들이 너무 비장하게 구는 탓에 차마 말하지 못했다. 사실 그냥 저러고 노는 거 같기도 하고. 도현은 지금 반 아이들에 관해서 많은 부분을 포기한 상태였다.
“너 혼자 왜 이리 태평해.”
직속 근위대장 역할을 맡은 한설아가 도현을 타박했다. 도현이 영혼 없이 웃자, 떨떠름해진 한설아가 물었다.
“너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물론 괜찮지.”
먼 산을 보며 대답하던 도현이 한설아를 쳐다보았다. 이번엔 조금 영혼을 찾은 채였다.
“설아,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러기엔 이 시선이 느껴지지 않니?”
도현은 저를 둘러싼 2반 아이들 틈으로 힘겹게 바깥을 보았다. 분투 끝에 바깥 상황을 확인한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이 많아 보이긴 하네.”
“너라면 없겠어? 일 학년이 삼 학년 상대로, 그것도 여러 명을 상대로 싸웠다는데.”
마치 17 대 1로 몸싸움이라도 벌인 것 같은 말투에, 도현이 마찰이 조금 있었을 뿐이라고 정정을 부탁했다. 한설아는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눈빛으로 보건대, 아무래도 한설아에게 도현은 완전히 믿을 수 없는 종자로 찍힌 게 분명했다.
“이번 일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조심해. 큰일이 안 생겨서 다행이었지. 그 선배가 때렸으면 어쩔 뻔했어.”
“응, 조심할게.”
대답에는 큰 열의가 없었다.
어차피 더는 못 건들 테니까.
애초에 당연한 일이었다. 후배라는 이유로 쉽사리 건드는 것도 어느 정도지. 윤창석이 도현의 멱살을 잡았을 때. 그는 보지 못했겠지만, 도현은 보았다. 다른 선배들이 불안한 눈으로 눈치를 보는 걸.
그리고 그 대상은 멱살을 잡은 이가 아니었다. 도현이었다.
열여섯이면 어리긴 해도 누구를 건들면 안 되는지 판단할 나이는 되었다. 한 명 정도는 그런 판단조차 못 하는 거 같긴 했지만… 뭐. 어느 집단이든 부족한 사람 한 명쯤은 있는 것 아닌가.
아무튼 결론은 그들이 도현을 더 건들지 않을 거란 사실이었다. 물론 무리의 중심처럼 보이는 윤창석이 길길이 날뛰면 또 모르겠지만….
‘아마, 안 될걸.’
도현이 묘하게 웃었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그 속을 모르는 한설아의 눈에는 도현이 답 없는 낙관주의자로 보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탄했다.
“그냥 그때 선생님한테 걸렸으면 조금 더 안전하지 않았을까? 그냥 걸리게 놔두지, 넌 이상한 부분에서 착해서….”
그 말엔 정정할 부분이 꽤 많았지만, 그걸 짚어내는 대신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설아야. 역사 시간에 선생님 그랬잖아. 전쟁에서 명분은 가장 중요하진 않지만, 어떤 순간에는 가장 강력해질 수 있다고.”
“……?”
의뭉스레 말하는 도현에 한설아가 이해하기 어렵단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더 부연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테니까.
* * *
“야, 윤창석. 너 어디 가려고?”
“어딜 가긴! 씨발, 그 씹새끼 조져 버려야지. 야, 일어나. 가게.”
수업 시간 내내 되새길수록 화가 나서 죽는 줄 알았다. 그 수치스러운 꼴이라니. 마치 제 위치가 오물 위에 나뒹군 것처럼 창피하고 화가 일었다. 한시라도 빨리 찾아가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려주고 그의 자존심을 회복해야 했다.
그가 씩씩거리며 한 말에 앉아 있던 이들이 껄쩍지근한 표정을 했다. 미묘한 침묵 아래, 그들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안 가면 안 되냐?”
“뭐? 뭔 개소리야. 너도 봤잖아. 그 새끼 기어오르는 거.”
“아, 알지. 아는데….”
“알면 가자고.”
그가 우물쭈물거리자 조용히 있던 사람이 툭 말을 던졌다. 내내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창석아. 이건 그냥 넘어가자.”
“맞아. 야, 솔직히 우리가 아무런 잘못 없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걔가 너 도왔잖아.”
이 새끼들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가. 윤창석은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고 다음에는 분노했다.
“돕긴 씨발, 뭘 도와?”
“역사한테 걸릴 뻔한 거, 걔가 넘어가게 해 줬다며.”
“그 새끼가 나 밀친 건!”
“야, 그건… 솔직히 어쩔 수 없었지. 안 그랬으면 너 역사한테 걸렸을걸. 얘들아, 안 그러냐?”
“나도 쟤 말이 맞는 거 같다. 그냥 한 번씩 주고받은 거 같은데 꼭 가야겠냐?”
윤창석은 배신과 충격에 얼룩진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들은 그 시선을 피했다. 꼭 윤창석의 편을 들 생각이 없는 것처럼.
만약 도현이 그때 한 번이라도 직접적인 비난의 말을 꺼냈거나, 아니면 그들을 돕지 않았더라면 윤창석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생겼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실제로 소년은 태도가 미묘할지언정 선을 넘은 적은 없었고, 심지어 방식이 어찌되었건 도움까지 주었다.
안 그래도 이도현과 척지는 게 껄끄러웠던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었다.
“야, 창석아. 화나겠지만 이번엔 네가 참아라. 솔직히 우리보다 두 살이나 어리잖아. 그냥 애새끼가 지랄했다 생각하고 넘어가자. 응?”
“사실 그렇게까지 화낼 일도 아니었어. 반대로 걔가 너 신고하려면 어쩌려고 그래? 임마, 좀 사리고 그래라.”
몰아붙일 때는 동조했던 이들이 이제는 그런 적 없다는 듯이 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흥분이 가라앉자 그들도 겁이 난 탓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은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척, 교묘하게 윤창석에게 모든 걸 덮어씌웠다. 사실 그들이 생각하기엔 그게 진실이었다. 멋대로 멱살을 잡고 난리 친 건 윤창석이니까.
그 속에서 윤창석은 깨달았다.
여기에 그의 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가 조용해지자 이들은 상황이 소강했다고 여겼는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래, 야. 내가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사줄게. 그니까 기분 풀어라. 엉?”
툭툭, 어깨를 두들기는 손길에 윤창석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다가, 입 안의 살을 깨물었다. 살면서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